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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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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아이티인이다

지진·허리케인에 이어 콜레라 창궐로 신음하는 아이티…

끝없는 고통 속 그들에게 세상 벗들이 손을 내밀어야
등록 2010-12-02 10:51 수정 2020-05-03 04:26

“메 포압 세 자미 라 상테, 메 살 세 엔미 라 상테….”(깨끗하게 씻은 손은 건강의 친구, 더러운 손은 건강의 적…)
하얀 천 조각으로 머리카락을 묶은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스피커에서 크레올어로 흘러나오는 ‘콜레라 캠페인’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부른다.
하루에 2천여 명 발병, 40여 명씩 숨져

콜레라에 희생되는 아이티인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11월19일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한 슬럼가에서 콜레라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수레에 실려가고 있다.REUTERS/ EDUARDO MUNOZ

콜레라에 희생되는 아이티인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11월19일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한 슬럼가에서 콜레라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수레에 실려가고 있다.REUTERS/ EDUARDO MUNOZ

온종일 거리는 확성기를 통해 울려퍼지는 콜레라 예방 캠페인 노래와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연설, 그리고 시위 행렬의 외침이 뒤섞여 있다. 흡사 지진과 콜레라로 혼란스러운 아이티 현주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11월28일 대선이 끝나고 나면 거리를 뒤흔들던 각종 음파의 진동도 멈출 것이다. 더불어 저 아이의 노래도 멈추기 바랄 뿐이다.

오늘도 하루가 콜레라 대책회의로 시작된다. 여느 날처럼 사망자와 환자 증가 현황 확인을 시작으로 각국 적십자사 활동 사항과 지원이 필요한 부분을 공유하며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하루를 연다.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 수 1415명, 환자 2만5248명(11월20일 기준). 최근 들어 하루에 발생하는 콜레라 의심환자가 2천 명을 넘어서고 입원환자가 1천여 명씩 늘면서 콜레라치료센터는 이미 포화 상태다. 지난 10월22일 최초 콜레라 의심환자가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망자 수가 1천 명을 훌쩍 넘어섰다. 생명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후의 보루처럼 여겨지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도 콜레라 환자가 2천 명 이상 발생하고 사망자 수도 100여 명에 이른다. 지진 이재민 100만 명 이상이 열악한 텐트촌에서 지내고 있으니 어쩌면 이제 환자 수를 세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일지 모른다.

지난 1월 지진 이후 열악한 환경 속에서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탓일까. 일반적으로 콜레라 환자의 치사율이 1%인 데 비해 아이티에서는 3~4%로 높고, 특히 어린이 사망자 수가 많다. 깨끗한 물을 먹고 잘 씻을 수 있었다면, 평소 끼니를 제대로 먹고 영양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면 혹 콜레라에 걸렸더라도 생명까지 내주진 않았을 텐데…. 이런저런 상념이 회의 내내 머릿속을 뒤흔든다.

이제 콜레라가 전국에 확산돼 안전지대는 없다. 개인 위생관리를 잘하도록 예방활동을 펴고, 콜레라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격리 치료하며, 보이지 않는 적과 언제 끝날지 모를 싸움을 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콜레라 대책회의를 끝내고 현장으로 향하는 의료요원들의 발걸음은 지진으로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를 끌고 가듯 무겁기만 하다.

최근 콜레라 환자 증가로 치료제가 부족하던 터에 간밤에 미국에서 도착한 ORS(Oral Rehydration Salts)와 링거액(치료제)을 싣고 국제적십자사연맹에서 운영하는 포르토프랭스 내 한 콜레라치료센터로 향했다. 콜레라는 지난 10월 말 허리케인 ‘토마스’가 지나간 뒤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환자 수도 급증했다. 의료시설이 부족해 콜레라치료센터는 기존 병원 건물 내에 설치하고, 병원 진료부서는 공터에 친 임시 천막으로 이동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 격이나 다름없다. 콜레라 환자 병동에는 사람들이 가기를 꺼린다.

절단된 다리에 흐르는 소녀의 눈물
아이티인들은 대지진에 콜레라까지 겹쳐, 일상이 파괴된 비참한 생활을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긴급의료단에서 통역봉사를 하던 아이티인 윌링턴은 24살 청년 재키의 삶을 소개하며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를 에 보내왔다. 아버지를 잃은 재키는 어머니와 두 동생, 그리고 부모와 형제자매를 모두 잃은 여자친구 등과 함께 한 텐트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한 채 고단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이 젊은이들이 미래의 꿈을 놓지 않도록 지원의 손길을 보내달라고 월링턴은 호소했다.

아이티인들은 대지진에 콜레라까지 겹쳐, 일상이 파괴된 비참한 생활을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긴급의료단에서 통역봉사를 하던 아이티인 윌링턴은 24살 청년 재키의 삶을 소개하며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를 에 보내왔다. 아버지를 잃은 재키는 어머니와 두 동생, 그리고 부모와 형제자매를 모두 잃은 여자친구 등과 함께 한 텐트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한 채 고단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이 젊은이들이 미래의 꿈을 놓지 않도록 지원의 손길을 보내달라고 월링턴은 호소했다.

병동에 들어서는 순간, 지진 발생 뒤 무너진 병원 건물 복도에 임시 진료소를 설치하고 시장통 같은 분위기에서 진료하던 장면과 클로즈업되면서 지진 초기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때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끝없이 밀려드는 환자와 중증 환자들의 신음, 그리고 수술실이 없어 마취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날카로운 메스가 상처 부위를 지날 때마다 내는 절규는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한 노인이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의 손녀를 데리고 왔다. 한창 뛰어놀 나이의 어린 소녀의 절단된 다리가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봉합한 부위를 풀고 상처를 긁어낸 뒤 다시 꿰맬 때 볼을 따라 흐르는 눈물을 훔치지도 못하고 울부짖는 아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있던 할머니의 표정, 그 너머로 보이던 아이의 눈동자는 아직도 세계를 향해 도움을 호소하는 수많은 아이티의 눈동자가 되어 내 맘을 깊이 파고든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구토와 설사로 기진맥진한 콜레라 환자들의 신음이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가냘프다는 것일 뿐.

100여 병상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통로 임시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들은 하나같이 수확철을 지나 스산한 들녘에 서 있는 앙상한 옥수수 줄기처럼 메마른 모습이었다. 오목하게 파인 눈동자를 뜰 기운도 없는지 5살 남짓한 남자아이가 한 손에 링거액을 맞으며 엄마가 스푼으로 떠먹이는 물을 반쯤 흘리며 받아먹다 낯선 이방인과 잠시 눈을 마주친다. 순간 한국에서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아들 녀석의 모습과 교차되면서 마음이 착잡해진다. 여기저기서 새로 실려온 환자들은 임시 침대를 준비할 겨를도 없이 구토를 해댄다. 노란 고무장갑을 낀 사람이 달려와 치우고 한편에선 간호사가 링거주사를 맞히는 모습은 병원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콜레라 이재민 텐트촌 같다. 우리 손길이 부족해서일까, 우리의 관심이 너무 잠깐 머물러서일까. 인류 최악의 지진과 허리케인, 그것도 모자라 전염병까지….

의약품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좀 전에 마주한 어린아이의 퀭한 눈동자에 밟혀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창 재롱도 피우고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사랑받아야 할 나이에 사경을 헤매는 저 아이가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걸어나가게 되길, 그리고 저 아이와 함께 아이티가 폐허를 딛고 서서히 제 모습을 찾고 성장해가길 기도해본다.

오늘 살았다는 안도보다 앞서는 내일 걱정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동행한 현지 운전수가 뜬금없이 묻는다. “아이티를 돕는다고들 왔는데 아이티 사람들의 고통을 아세요?” 그냥 ‘네’라고 별 생각 없이 대답하려다 “고통이 있는 곳에 적십자가 있고 그곳에 저희가 있는 거죠”라고 동문서답을 하고 말았다. 막상 대답을 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이 사람들의 진짜 고통이 뭘까’ 질문을 던진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사의 기로에서 지진으로 갈라진 틈을 비집고 나왔을 때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생존 문제, 가족·형제·친구를 잃고 혼자 남겨진 현실에서 한끼 한끼를 연명하면서 오는 불안과 외로움, 끝없이 밀려드는 재앙 속으로 언제 자신도 빨려 들어갈지 모른다는 공포, 수많은 구호단체 속에서 잠시지만 일자리를 잡아 생활하고 있지만 그들이 떠난 뒤 황량한 빈터에서 일자리를 찾아 헤매며 서성거리고 있을 내일의 모습…. 어쩌면 보이는 고통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길에 여기저기 파인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여전히 콜레라 캠페인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어쩌면 깨끗하게 씻어야 할 게 손만은 아닌 것 같다. 언제쯤이면 이 슬픈 동요가 끝나려나. 콜레라가 끝나도 이 노래는 한동안 아이티 역사에 장송곡으로 기억될 것 같다.

“깨끗하게 씻은 손은 건강의 벗, 더러운 손은 건강의 적.”

나도 세상을 향해 힘껏 불러본다.

“내미는 손은 세상의 벗, 움켜쥔 손은 세상의 적.”

포르토프랭스(아이티)=이재승 대한적십자사 구호요원

*연대의 손길을 나누고 싶은 독자들은 대한적십자사 국제협력팀(3705-3662)에 문의하면 아이티 지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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