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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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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11월은 한국의 6월처럼


<한겨레21> 통신원 질문에 “버마는 한국처럼 결정적 기회를 잡았다”고 답한 수치…

그의 가택연금 해제는 랑군의 봄으로 꽃필까
등록 2010-11-25 10:36 수정 2020-05-03 04:26

몰려드는 인파를 보면서 조지(22·가명)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싱가포르에 1년간 유학을 다녀온 부유층 자녀인 그는 “정치보다 내 미래를 설계하기 바쁘다”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1월13일 오후 2시, 아웅산 수치(65)가 가택연금에서 해제되기 3시간 전에 만난 조지는 버마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수치의 석방 이후 나흘 동안 취재한 버마 랑군의 분위기는 조지의 바람과는 사뭇 달랐다.
“아웅산 수치 륨 먀오 제이!”(아웅산 수치를 석방하라!) 13일 오후, 수치의 자택이 있는 랑군 인야 호수 인근에서 벌어진 경찰과의 대치 현장에서 윌루(29)가 수치의 지지자들과 함께 소리쳤다.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

아웅산 수치의 11월13일 석방은 버마 민주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수치가 13일 랑군의 자택 앞에서 지지자가 건넨 꽃다발을 받은 뒤 기뻐하고 있다.연합 AP

아웅산 수치의 11월13일 석방은 버마 민주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수치가 13일 랑군의 자택 앞에서 지지자가 건넨 꽃다발을 받은 뒤 기뻐하고 있다.연합 AP

멀리 떨어진 북다곤에서 10여 명의 동료와 함께 온 그는 수치의 아버지이며 버마 독립투사인 아웅산 장군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윌루는 “아웅산 장군은 버마의 아버지고 수치는 버마의 어머니다. 우리는 군부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7년 승려들이 대거 참여한 ‘샤프론 혁명’ 이후 NLD에 입당한 그와 동료들은 다니던 다곤대학에서 제적당했다. 그는 “정부가 두렵지만 수치와 함께 자유를 찾으려는 마음이 훨씬 더 크다”며 “지난 7일 치러진 총선은 그저 게임이었다”고 말했다. 의석의 25%를 군부가 지명하도록 하는 2008년 신헌법에 기초한 총선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다. 이제 15년 동안의 암흑이 풀린 것이다.” 니 니 민(28)이 소리쳤다. 13일 오후 5시, 연금에서 해제된 수치가 “나서야 할 때 움츠려 있지 말자”라는 석방 소감을 말한 뒤였다. 1989년 첫 가택연금을 당한 수치는 그동안 석방과 연금을 거듭하며 15년간 갇혀 지냈다. NLD 당원 니 니 민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연금을 당한 수치 자택의 경호원으로 일했다. “당시 수치가 ‘나라를 위해 우리 삶을 헌신해야 한다’고 내게 종종 얘기했다”고 소개한 그는 “이제야 버마가 진정한 국민 지도자를 만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수치가 석방 소감을 말한 뒤 1시간이 넘도록 거리는 축제의 장이었다. 지지자들은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고, 서로를 얼싸안는 모습도 보였다. 니 니 민은 “아버지가 1990년 총선에서 당선됐지만 군부가 민의를 무시하고 조국을 짓밟았다”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 좋은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군부가 두려워 집에만 있었지만 석방 현장에 가고 싶었다.” 15일 밤, 랑군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난 틴 다 이(19·가명)가 조심스레 말했다. 대학생인 그는 수치의 이름과 ‘정부’라는 단어를 거의 속삭이듯 발음하며 주위를 계속 둘러봤다. 틴 다 이는 “우리 정부는 많은 귀를 갖고 있다”며 “말하기 두렵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수치가 연금에서 풀려 희망이 보인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물어보라. 모두 수치를 좋아한다. 만약 그가 군부에 맞서 싸우자고 말한다면 따를 것이다. 수치는 우리의 영웅이다.”

소수민족도 나지막이 수치 지지

16일 낮, 서슈웨곤다인 거리에 위치한 NLD 당사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로 붐볐다. 당사에서 지은 밥을 먹고 있는 당원도 보였고, 수치의 포스터를 사는 지지자도 보였다. 버마의 한 주간지 기자인 치 튜 지(24·가명)를 비롯해 수치를 기다리는 내외신 기자도 많았다. 그러나 치 튜 지는 “오늘 내가 취재한 내용이 제대로 실릴 리 없다”고 내뱉었다. 그가 소속된 주간지는 40면을 발행하는데, 최신호에 총선이나 수치와 관련한 기사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 (정치적) 기사를 쓰면 정부의 검열에 걸린다”는 그는 “오늘 쓸 기사도 삭제당하고 정부가 만드는 기사로 채워질 것 같다”고 말했다. 언론의 자유가 없다고 토로하는 그는 NLD의 심정적 지지자다. “이번 총선에서 야당인 민족민주세력(NDF)에 투표했다. 선거를 거부한 NLD와 노선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오후, 밋타 뉴 지역에 위치한 NDF 당사는 단 3명의 당직자만 있어 한산한 모습이었다. 주간지 의 편집자이기도 한 당원 조 투 야(33)는 “민주화를 향한 우리의 열망은 이번 선거에서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부정선거가 전혀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부정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치의 석방으로 민주화 세력에게 다시 큰 기회가 올 것으로 전망한다. “수치는 대중적으로 강력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녀를 중심으로 버마 민중이 재집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조 투 야는 이어 “앞으로 우리 당의 진로는 수치의 NLD와 어떻게 잘 협동할 것이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6일 랑군 동부에 위치한 타케타 지역으로 갔다. 소수민족 ‘친족’인 마미(20·가명)는 이번 총선에서 군부 여당에 표를 줬다. 대부분 기독교를 믿는 친족에게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억누르지 않지만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우리의 권리가 제한된 상황에서 정부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미는 “현재 정부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라디오에서 수치의 석방 사실을 들었을 때 기뻤다”고 말했다. 그는 ‘더 나은 정부’를 원한다. 마미가 꿈꾸는 정부는 ‘고향 집에 편히 갈 수 있게 해주는’ 정부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 고되다. 허가증이 필요하고 수시로 검문을 당한다.”

다른 소수민족인 ‘카렌족’ 니 라 칸(21·가명)도 군부 여당에 표를 줬다. 투표를 하라는 정부가 무서워 투표장에 가니 공무원들이 “여기에 찍어!”라며 여당 쪽을 가리켰다는 것이다. 질문에 말을 아끼던 그는 “우리 속마음을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참을 주저하다 “수치에 의해 좋은 기회가 온다면 정부에 대항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또한 ‘더 나은 정부’를 원한다. 니 라 칸이 꿈꾸는 정부는 ‘집에 전기가 잘 들어오게 해주는’ 정부다. “전기가 안 들어올 때가 많다. 어두운 날에 정전이 될 때마다 무서움을 느낀다.”

수치와 버마의 뜨거운 사랑

수치 석방 이틀째인 14일 오후, NLD 당사 앞에서 수치는 1만여 명의 지지자가 모인 가운데 대중연설을 했다. 당사 앞 슈웨곤다인 거리는 그녀를 조금 더 가까이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현수막을 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치는 “나 또한 버마 민중을 사랑한다”고 적힌 현수막을 들어올렸다. 환호성이 거리를 메웠다. 연설 뒤, 당사 안에서 연금 해제 이후 첫 기자회견을 연 수치에게 직접 질문했다. “한국도 군부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데 젊은이들의 투쟁이 큰 역할을 했다. 버마의 젊은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버마의 젊은이들은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보다 절대 덜 용감하지 않다. 그리고 지금 버마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랑군의 봄인가? 아니면 또다시, 군부의 쇼일까? 아웅산 수치가 민주화의 상징으로 떠오른 1988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8888 항쟁) 때 17살이었던 조 리 우(39·가명)에게 물었다. 그는 “군부에 대한 두려움과 불만이 쌓인 지금, 수치가 밖으로 나왔다”며 “예측할 수 없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랑군(버마)=양창모 통신원 ian.jealousy.y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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