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8월, 박정희는 “군에 복귀하겠다”는 ‘군사혁명’ 당시의 약속을 깨고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다. 그가 공식적으로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옷을 갈아입은 순간이다. 1961년 5월16일 2군 부사령관으로 쿠데타를 주도해 그해 7월 최고권력자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이후 2년 남짓 만이다. 군복을 벗은 박정희는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된 뒤 민간인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군정 연장”이라는 비판 속에 1963년 10월15일 치러진 대선에서 박정희는 470만2700여 표(46.7%)를 얻어, 윤보선을 15만 표 차이로 꺾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1967년 재선 뒤 장기 집권에 눈먼 박정희는 1969년 3선 개헌을 통과시켰고,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해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중임·연임 제한을 없애 영구 집권의 길을 텄다. 그의 통치는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질 때까지 18년간 계속됐다. 군복을 벗은 뒤로만 16년이다.
배후에서 최고 실권 휘두를 권력자들한국 현대사의 아픈 기억이 지금 버마(미얀마)에서 어른거린다. 11월7일 20년 만에 치러지는 총선에서 버마 군사정권이 군복을 벗는다. 한국과 다르다면, 여전히 군복을 입은 장군들이 남아 최고 권력을 휘두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서열 3위 슈웨 만(63) 참모총장, 4인자인 테인 세인 총리, 서열 5위 틴 아웅 민 우(63) 병참감 등이 예편해 군복을 벗고, 군부를 대변할 연방단결발전당(USDP)에 입당했다. 한국의 국가재건최고회의 격인 국가평화발전평의회(SPDC) 의장으로 권력 1인자인 탄 슈웨(77)와 2인자인 부의장 마웅 에이(73)는 그대로 군인으로 남아 배후에서 최고 실권을 행사할 전망이다. 군복을 벗은 자든 벗지 않은 자든, 박정희처럼 군인이 권력을 뒤흔드는 ‘군정 연장’이다.
20년 만의 총선에도 군정 연장은 불 보듯 뻔하다. 하원 격인 인민회의 440석과 상원 격인 민족회의 224석 가운데 25%인 166석을 군부가 지명한다. USDP는 음식과 현금 등을 유권자에게 뿌리고 있다. 야당의 선거 참여도 사실상 봉쇄했다. 군부는 올해 초 정치범이 소속된 정당은 선거에 후보자를 낼 수 없도록 한 새 선거법을 발표해, 가택에 연금된 아웅산 수치를 비롯해 약 500명의 정치범이 수감된 야당 민족민주동맹(NLD)의 길을 막았다.
이에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NLD는 “선거가 공정하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며 참패할 게 뻔한 선거에 참가하기를 전면 거부했다. 선거라는 시늉을 통해 서방의 금수 조처에 따른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군부의 얄팍한 술책에 들러리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수치는 지난 10월26일 NLD 홈페이지에 공개한 성명에서 이번 선거가 군부독재를 연장시킬 것이며, 국민은 투표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투표 불참을 재차 독려했다. NLD 대변인 니안 윈은 “우리가 선거에 참여하려면 지도자 수치와 수감 중인 약 500명을 당에서 내쫓아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다”며 “선거 뒤 군인만 나라를 통치할 것이다. 군복을 갈아입을 뿐이다”라고 비판했다.
군부가 형식적으로나마 정통성을 내세울 화려한 ‘예편식’인 선거를 NLD가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사실 너무도 자명하다. 1990년 총선에서 수치가 이끈 NLD가 485석 가운데 39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지만, 현 군사정권은 정권을 이양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군림하고 있다. 빼앗긴 선거 승리를 되찾지 못한 채, 군부에 꽃다발을 안겨줄 선거를 인정하기는 어렵다. 국제사회에서 ‘버마’와 ‘미얀마’가 엇갈리게 불리는 것도 현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군사정권이 1989년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꾼 뒤 유엔과 대부분의 국가는 미얀마를 공식 국호로 인정하고 있지만, NLD는 물론 군사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많은 단체와 언론 등은 여전히 이 나라를 버마로 부르고 있다.
수치는 선거 불참을 선언하고 국민에게도 투표하지 말 것을 독려했지만, 야권에서는 민주적 변화를 시도할 20년 만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현실참여론’도 비등했다. 버마는 1948년 영국에서 독립한 뒤 들어선 우누 총리의 사회주의 정부가 1962년 3월 네윈 장군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무너진 이후 의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왔다. 이 때문에 의회를 통해 민주화를 이루려는 일부 인사들은 이번 선거를 앞두고 NLD에서 벗어나 민족민주세력(NDF)을 결성했다. 2007년 사프론(saffron), 곧 황색 가사를 입은 승려 등이 대거 참여한 ‘사프론 혁명’의 실패를 지켜본 이들은 그동안의 이상적 ‘비폭력 투쟁’이 20년 넘는 독재통치를 물리치지 못한 사실에 회의를 품고 있다. 미아트 니아르나 소 NDF 랑군 위원장은 “우리는 아웅산 수치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침묵을 지킨다면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 의회로 가서 국가를 위해 정부가 바뀌어야 한다고 설득하려 한다”고 강조했다. 15살에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건너간 수치가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매료된 뒤 ‘이상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이 일부에서 재차 제기됐다. 새 선거법이 모든 정당의 선관위 재등록을 의무화한 상태에서, 결과적으로 수치의 총선 불참과 정당 미등록으로 총선 참가 자격이 자동적으로 박탈되고 당의 해체로 이어져 NLD의 미래는 더 불확실해졌다.
하지만 NDF가 이번 선거에서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선거법에 따라 후보들은 이 나라의 평균임금 1년치에 해당하는 약 500달러를 등록비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집과 자동차를 팔아 후보 등록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NDF는 163명의 후보만 입후보했다. 이 밖에 소수 정당이 다수 참가했지만, 그 3분의 2는 소수 인종을 대표하는 것으로 민주화보다는 개별 소수 인종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버마에서 되풀이되는 한국 군정의 역사버마 군부는 1962년 군사 쿠데타 이후 거의 40년 동안 인물을 바꿔가며 지배권을 행사해왔다. 1988년 8월8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이른바 ‘8888 항쟁’) 등 ‘랑군의 봄’도 군홧발로 짓밟았다. 1988~89년 버마에서 희생된 사람은 3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부는 이번엔 군홧발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민주적 제도인 선거라는 탈을 쓰고 민주화 요구를 짓밟을 태세다. 1980년 전두환, 1987년 노태우가 갔던 길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인 전두환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하고, 대장으로 예편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11대 대통령에 올랐다. 뒤이어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노태우가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한 뒤, 전두환 정권에서 요직을 거쳐 1987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렇게 한국에서 군복을 벗은 장군들의 ‘군정’은 1993년 2월까지 29년 가까이 지속됐다. 11월7일, 버마는 한국의 오욕의 역사를 되밟는다. 다음 차례는 헌법 뜯어고치기가 될지 모른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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