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접근 금지’ 비밀 수용소의 참상
② 피난민 재정착 지역 잠입 취재
③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보트피플불교도가 대부분인 싱할라족의 나라 스리랑카에서 힌두교도가 대부분인 소수민족 타밀족은 오랜 무력 저항을 해왔다. 긴 내전의 끝, ‘타밀호랑이’ 반군이 진압된 뒤 스리랑카에는 평화가 왔을까? 스리랑카 정부는 안정을 말하지만, 2009년 5월 내전 종료 선언 뒤에도 반군포로, 피난민, 보트피플로 떠도는 타밀족 사람들의 생존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9월3~30일 스리랑카 현지에서 취재한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3회에 걸쳐 르포를 연재한다. 편집자
2009년 5월, 스리랑카 전쟁이 종착지로 향할 무렵 정부군은 전쟁터에서 빠져나온 수십만 명의 난민 사이에서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이하 타밀호랑이) 반군을 샅샅이 추려냈다. 35살의 여성 수간디(가명)도 그중 한 명이다. “1995년 킬리노치(반군영토였던 ‘타밀엘람’의 수도) 전투에서 다리 하나를 잃은데다 먼저 투항한 동지들이 정부군과 동행해 (반군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었다.” 수간디는 다리 부상 뒤 정치국 소속으로 타밀엘람의 각종 데이터 수집 업무를 해왔다. 그러다 2006년부터 강화된 정부군의 공세가 타밀엘람 목전까지 치고 들어왔다. “킬리노치 함락 직전(2009년 1월 초), 보이스오브타이거(VoT·타밀호랑이 라디오 방송사) 국장 자완이 ‘장애인 전사’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타밀호랑이 전 대원에게 전투에 나서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외다리 여성도 가둔 반군 수용소명령을 하달하러 온 자완 역시 다리 하나를 잃은 장애인 전사다. 이들에게까지 전투를 명령하던 막바지, 반군은 소년·소녀들까지 징집해갔다. 제대로 훈련받지도 않고 싸울 의지도 없는 어린 병사들이 뒹굴던 전장은 결국 비참한 끝을 봤다. “우린 장애인 전사들인 ‘블랙타이거’(자살 공격조)와 함께 제2선에 포진해 있었는데, 5월15일 제1선이 무너지고 나와 팀을 이뤘던 동지가 머리를 다쳤다. 부상자 이송팀에 연락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못했다.”
수간디는 부상당한 동지를 끌고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지점까지 갔다. 부상자와 주검 더미 현장을 지키던 또 다른 동지는 그녀에게 정부군 쪽으로 넘어가라고 조언했다. 다음날 수간디는 총알이 날아오는 쪽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5월19일, 스리랑카 북부 오만타이 검문소에서 반군포로 수용소로 끌려갔다. 당시 오만타이 검문소 스피커는 반군들을 향해 자수 안내 방송을 계속하고 있었다. “단 하루라도 반군 활동을 한 자는 자수 바란다. 이름만 등록하면 보내주겠다. 길어야 3개월 조사하고 풀어준다.”
수많은 젊은이가 부모의 설득으로 자수했다. 사하이에 라니(43)의 아들도 그중 한 명이다. 하지만 아들은 애초 약속과 달리 와우니아 팜바이마두 수용소에 1년6개월 넘게 수감 중이다. “아들이 (반군에) 징집된 게 2007년 4월이고 이듬해 초 도망쳐나왔어. 그놈을 숨기느라 지하 벙커에서 2년 동안 똥오줌 다 받아냈는데….” 어머니의 두 눈에서 눈물 줄기가 쏙 빠졌다.
정부가 반군포로를 석방하기 시작한 건 올해 4월10일 장애인 포로들을 내보내면서부터다. 수간디도 이때 석방됐다. 이번에는 그녀의 외다리가 석방에 도움이 됐다. 석방되기 직전까지 심문당한 수간디는 군이 타밀호랑이 정보국 파일 내용대로 상세히 심문했다고 말한다. 언제 어떤 전투에서 싸웠는지, 몇 시에 전투에 나가 몇 시에 돌아왔는지까지.
석방 뒤에도 그녀는 자유롭지 않다. 반군 조직에서 익힌 컴퓨터 기술과 행정 능력 덕에 최근 새 일터를 구하고 거주지를 옮긴 그녀에게 (타밀인 납치로 악명 높은) 범죄조사국(CID)은 ‘재직증명서’와 거주지 등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비참한 캠프 생활도 전했다. “내가 수감됐던 M수용소 A블록에는 샤워시설이 없어 군의 인도하에 D블록 우물로 가서 샤워를 했다. 샤워장에 가리개도 없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허용되는 샤워 시간을 어기면 여군이 몽둥이로 팔뚝을 세차게 때리기도 했다.
사라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수용소가 아니라 사회복귀훈련센터다.” 반군 수용소 책임자 수단타 라나싱헤 준장은 ‘수용소’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반군 활동에 개입한 기간과 정도, 그리고 복귀 프로그램에 임하는 자세 등에 따라 석방 순위를 정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수감자들은 스리랑카 주류 언어인 싱할라어로 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아침을 연다. 캠프 안의 모든 전달 사항은 싱할라어로만 이루어진다. 자연스럽게 싱할라어를 할 줄 아는 이가 소그룹의 대표 역할을 했다.
“한 소년은 국가를 부르지 않아 땡볕에서 무릎 끓고 하루 종일 벌을 섰고, 또 다른 소년은 국가를 부르는 동안 기침을 했다는 이유로 군홧발에 차였다. 해산하라는 명령을 못 알아듣고 자리에 계속 남아 있던 이가 군홧발에 차여 쓰러진 일도 있다.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지난 4월 M캠프에서 석방된 카란(38·가명)은 “지난해 12월에는 한 수감자가 병원에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허가가 안 떨어졌고, 결국 사망했다”고 덧붙였다.
남편이나 자녀가 갇힌 수용소를 용케 알아낸 가족들의 방문은 군인 두세 명이 감시하는 가운데 10~20분가량 허용된다. 그나마도 교통비 때문에 방문에 어려움을 겪는 가족이 많았다. 매주 일요일에는 미사를 위해 당국의 허가를 받은 신부·수녀들의 방문이 허용된다. 카란 팀이 하룻저녁을 굶고 있을 때 한 수녀가 먹을 것을 조달해준 것도 그래서 가능했다.
역시 다리 하나가 불편한 카란도 지난 4월에 풀려났다. 풀려나기 한 주 전 카란을 포함한 107명이 인근 학교 건물로 먼저 이송됐다. 거기에서 한 명이 죽었고, 6명은 테러리스트조사국(TID)에서 데려갔다. “한 명은 두 눈이 먼 장님이고, 두 명은 한 눈을 잃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눈 하나와 두 손이, 나머지 한 명은 다리 하나가 없고….” 그 6명이 다른 캠프로 이송됐는지, 강제 실종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카란이 전하는 또 다른 에피소드 역시 강제 실종의 의구심을 낳고 있다. 하루는 수감자 3명이 조례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군이 “그들은 간밤에 도망갔다”고 말했다는 것. “캠프 사방에 무장 군인이 배치돼 있다. 도망가면 바로 사살당한다고 세뇌를 받아왔다. 누구라도 도망갈 환경은 전혀 아니었다.”
국제적십자사(ICRC)를 포함해 독립적 기구의 감시가 전혀 허용되지 않는 반군 수용소에 대해 국제법률가협회(ICJ)는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부 운영 집단 수용소”라고 표현했다. 국제법률가협회가 9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공식·비공식적으로 드러난 수감자 규모는 지난해 11월 수용소 책임자가 언급한 1만992명에서부터 스리랑카 유엔대표부가 밝힌 1만2700명까지 다양하다. 지난 2월 수용소 책임자로 임명된 라나싱헤 준장이 9월29일 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밝힌 수치는 1만970명이다. 수감자 수치가 둘쭉날쭉하는 데는 불규칙하게 이어지는 추가 검거가 한 원인인 것으로 분석된다.
백기 투항 민간인에 총질 또 드러나
스리랑카 정부가 ‘사회복귀훈련센터’(대략 10여 개로 추정)라고 부르는 ‘반군 수용소’에서 다른 형태의 수용소로 이송된 수감자도 적지 않은데, 이 또한 수감차 수치에 혼선을 야기하고 수감자들의 행방을 더욱 묘연하게 하고 있다. 일부 수감자는 ‘반군 수용소’로 정의되지 않는 ‘웰리칸다’나 ‘오만타이’ 혹은 콜롬보 외곽에 위치한 악명 높은 ‘부사 군캠프’ 등지로 이송됐다.
부사 군캠프를 꾸준히 방문해온 국제적십자사는 실종 남편을 찾던 부디마(30대·가명) 가족에게 남편의 행방을 알려주고 방문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부디마의 남편은 반군이 아닌 타밀구호기구(TRO)의 직원이었다. 타밀구호기구는 친반군 구호기구로, 전쟁 막판까지 전장에서 유일하게 구호작업을 한 단체다. 이렇게 국제적십자사는 부사 군캠프를 포함해 수십 개의 수용소를 방문하고 있지만, ‘반군 수용소’에는 지난해 7월 이래 접근하지 못했다고 사라신 위제라트나 대변인이 밝혔다.
재판 없는 장기 구금과 비밀에 부쳐진 수용소. 이렇게 수감 중인 반군포로들이 강제 실종을 당할 것이란 우려는 정부군이 타밀 반군을 현장에서 사살하거나 고문하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더욱 가중되고 있다. 이 영상은 전쟁 막바지 백기 투항한 반군과 그들의 가족 수십 명이 학살당한 이른바 ‘백기 투항’ 사례와 더불어 최근 가속화되는 스리랑카 전쟁범죄의 증거물로 거론되고 있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는 또 다른 백기 투항 민간인들이 학살당할 뻔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한 30대 남성의 증언을 들어보자. “5월17일 늦은 오후 물리바이칼(마지막 교전지)에서였다. 인근 벙커에 있던 신부 한 분이 ‘정부군이 이곳까지 들어왔다’며 모두들 백기를 들고 투항하라고 소리쳤다. (어린이·연장자·신부를 포함한) 우리는 백기를 보이며 벙커 밖으로 나가려 했고 그럴 때마다 군은 총을 쏘았다. 총성이 멈춰 다시 백기를 보이며 30m가량 떨어진 군인들 쪽으로 움직였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군인들이 소리쳤고 우리가 등을 돌리자 총질을 했다. 바닥에 전부 엎드려 있다가 총성이 멈춘 뒤 기어서 벙커로 왔다. 그날 밤새도록 군은 수천 개의 벙커를 하나씩 공격하는 것 같았다. 우리 벙커가 공격받지 않은 건 기적이다. 다음날 아침 군은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전쟁범죄로 처벌될 수 있을까
병원과 식량 배급줄까지 폭격하고 백기 투항하는 민간인들까지 학살과 생존의 갈림길을 오가야 했던 이 전쟁터가 과연 재판대에 오를 수 있을까? 굼뜨던 유엔 사무총장의 스리랑카 전범 자문위원회는 이제 막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타밀호랑이’와 ‘전쟁범죄’ 두 단어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단어이자 가장 민감한 이슈다. 이에 대한 어떠한 질문도, 논쟁도 그리고 증언도 강제 실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쟁범죄를 조사하라는 국제사회의 압력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는 ‘교훈과 화해위원회’(LLRC)라는 기구를 구성했지만 이 위원회가 교훈과 화해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 이는 거의 없다.
콜롬보(스리랑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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