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31일, 아침에 눈을 뜨자 스웨덴 평화 활동가 필리프의 표정이 심각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가자지구로 향하던 국제 구호선을 공격했다는 소식이다. 16명의 사망자, 3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라말라에 있는 다국적 평화운동단체 ‘국제연대운동’(ISM) 본부는 탄식과 눈물로 가득 찼다. 기사를 검색해보니 사망자가 19명이라는 보도까지 있었다.
미국계 유대인 에밀리의 실명
내가 이번 사건에 더 크게 당황한 이유는 우리 단체에서도 며칠 전 바로 그 배를 타고 구호 활동을 위해 가자지구에 들어가겠다던 동료가 2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동료들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배에 탑승하지 않았다고 했다. 배를 탔느냐 못 탔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린 셈이다. 팔레스타인 활동가 모두의 비극이었다.
이날 오전 9시30분 라말라 시내로 나갔다. 평화 활동가들이 하나둘 모였지만 다들 한숨만 내쉴 뿐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오전 10시30분에는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위치한 갈란디아 검문소를 향했다. 이전과 다르게 검문소에서 군인들이 짐을 모두 풀어 확인했다. 경계가 한층 강화돼 긴장된 분위기였다.
낮 12시 무렵부터 갈란디아 검문소 부근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는 “팔레스타인에 자유를” “가자에 평화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깃발을 흔드는 등 평화롭게 시위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인들이 과격하게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흥분한 일부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군인들을 향해 돌을 집어던졌다. 이때 이스라엘 군인들이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에 길쭉한 가스 분출구가 6개 달린 대형 최루탄 1발과 총으로 발사하는 눈알 크기만 한 발포용 최루탄 3발을 쐈다.
발포용 최루탄 하나가 내 동료인 미국인 활동가 에밀리의 왼쪽 눈에 꽂혔다. 당시 최루탄을 발사한 군인과 에밀리의 거리는 불과 3m 남짓이었다. 발포용 최루탄은 45도 이상의 각도로 하늘을 향해서만 발사하게 돼 있는데, 이스라엘 군인은 기본적인 무기 사용 수칙조차 지키지 않았다. 에밀리는 라말라 병원으로 이송됐고, 결국 왼쪽 안구를 제거했다.
에밀리는 그렇게 한쪽 눈을 잃었다. 21살인 에밀리는 미국과 이스라엘, 두 개의 국적을 갖고 있다. 아버지가 이스라엘인이다. 미국에서 살던 그는 지난해 그림 공부를 하겠다며 이스라엘에 왔다가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알게 됐다. 그는 평화운동에 뛰어들어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그렸다. 딸의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버지는 사고가 나자 한걸음에 달려와 에밀리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평소보다 군인수 3배 증가
활동가들이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국제 구호선을 공격한 뒤 팔레스타인 현지 활동가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다. 매주 진행해온 평화 집회에 배치된 군인 수가 2배로 늘어났다. 6월5일 활동가들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남쪽 헤브론에 모여 평화 시위를 했다. 국제연대운동 활동가들이 주도하는 ‘헤브론 평화 시위’는 매주 토요일 슈하다 거리의 광장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퍼포먼스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날 우리는 종이 상자로 이번 국제 구호선 참사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터키의 국기를 붙인 관을 만들어 퍼포먼스를 했다. 퍼포먼스를 마친 뒤 우리는 이스라엘 올드시티를 향하려 했지만 이미 완전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길목을 막고 있었다. 다른 길로 가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보다 군인 수가 3배가량 늘어났다. 게다가 그들의 조끼에는 예전에는 볼 수 없던 최루탄과 소리탄이 장착돼 있었다. 최루가스는 갈수록 독해져 그 냄새에 기절하는 이들도 있다. 소리탄은 손바닥만 한 크기로,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을 낸다. 내 옆에서 소리탄이 터지는 바람에 그 소리에 놀라 뒤로 쓰러진 적도 있다. 우리는 물리력을 동원해 이곳을 통과하려고 한다면 분명 누군가 다칠 것이라는 판단에 그 자리에서 시위를 끝냈다. 참고로 우리가 걸으며 시위를 진행하려던 곳은 모두 팔레스타인 땅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까지 들어와 우리 시위를 진압한 것이다.
이렇듯 현지에서는 팔레스타인 평화 활동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력적인 진압이 더 심해지고 있다. 국제사회의 비난은 거세다. 국제연대운동 소속인 한 이탈리아 평화 활동가는 “(국제 구호선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터키라는 큰 친구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터키는 이스라엘과 많은 관계를 단절할 것이며, 조만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이스라엘 평화 활동가는 “이스라엘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런 행동은 (팔레스타인과 평화 협상을 하는) 이스라엘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탓만 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신문 1면에 이스라엘 해병 특공대가 헬리콥터에서 내려올 때 국제 구호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철봉을 휘두르는 사진이 실렸을 뿐이다. 이스라엘 시민들은 “우리나라 군인들이 총을 쏜 것은 저 폭도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변에 위협을 느껴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자명하다. 가자지구 안에서 팔레스타인인은 모든 것이 봉쇄된 채 힘든 삶을 살고 있다. 가자지구 바로 옆 지역에서도 가자 안의 상황을 알 도리가 없다. 가자지구를 지배하는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아무런 소통도 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인은 국제 구호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위험해도 국제 구호선을 띄워야 하고 평화 활동가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지난 6월2일, 유엔 인권이사회는 국제 구호선 참사를 조사하기 위해 독립적인 국제조사단을 파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44개국이 표결에 참석했고 찬성은 32표였다. 이스라엘의 후원국인 미국이 반대표를 던졌고 한국과 영국, 프랑스, 벨기에, 일본, 헝가리 등 9개국은 기권했다. 한국은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평화 활동가들을 무장 공격한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천안함 사건 뒤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외국인들이 내게 “돌아가신 분들의 평안을 빈다”는 말을 건네던 모습과 대조되는 행동이다.
6월7일, 이스라엘은 국제조사단을 거부했다. 국제조사단을 제안했던 반기문 사무총장의 이후 대응에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여러 논의가 오고 갔는데도 정작 현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스라엘군의 평화 활동가 탄압만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한국을 비롯해 국제사회가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지 않는 이상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라말라(팔레스타인)=백동훈 국제연대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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