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화산 폭발에서 시작된 항공 운항 중단 사태가 여러 날 이어지면서 유럽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봄철 휴가 기간을 맞아 해외여행을 떠났던 사람들이 귀국하지 못하고 공항에서 기약 없는 노숙 생활을 했으며, 유럽에 출장 온 외국인들은 귀국편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해 며칠째 직장에 복귀하지 못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해외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자국 국민을 조속히 귀국시키기 위해 항공모함 등 군함까지 동원하는 방안을 고려했을 정도다. 프랑스 외무부도 현지 대사관과 영사관을 통해 본국으로 귀국하지 못하는 국민에게 임시 숙소 알선 등 각종 도움을 제공했다.
유로컨트롤, 유럽연합과 관계없어하지만 며칠째 각국 공항에 발이 묶인 사람들은 이번 항공 운항 중단 조처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은 것에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 대부분의 공항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화산재는커녕 파란 하늘만 보일 뿐이고, 일부 항공회사는 이 정도의 상황에서는 항공기 운항에 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항공 운항 중단으로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일부 항공사는 이 기간 동안 승객 없는 시험용 비행기를 수십 대 운항해본 뒤, 극히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이 정도의 화산재 때문에 항공 운항을 전면 중단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럼에도 항공 운항 중단 조처가 지속되자 일부 항공사는 급기야 유럽연합(EU)에 항공 운항 중단에 따른 손해배상을 요구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아울러 일부 현지 언론이 이러한 항공사들의 목소리에 동조해서 항공 운항 재개를 하지 않는 EU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게다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EU 회원국의 관계장관회의 개최가 항공기 결항으로 순연되자, EU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몇몇 과학자도 가세해 화산재 위험이 과장된 측면이 있다며 이러한 항공회사들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비난에 직면한 EU는 당혹스러움을 넘어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유럽의 항공 운항 중단과 재개는 실제로 EU 차원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잖은 언론이 EU를 이번 결정의 주체라는 전제로 기사를 쓰고 EU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열심히 전하고 있지만, 사실 현재 유럽 지역 항공 운항 중단과 재개는 EU가 아니라 유럽대륙 내 각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문제다. 사안에 따라 권한과 책임의 영역이 달라지는 EU의 복잡한 운영 방식을 유럽인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풍경이다.
이러한 오해는 한국 언론에서도 엿보인다. 이번 유럽 항공대란과 관련된 한국의 언론 보도에서 ‘유럽항공안전청’이라는 이름으로 보도된 곳은 사실 브뤼셀에 본부를 둔 ‘항공 운항 안전을 위한 유럽기구’(유로컨트롤·EUROCONTROL)라는 공식 명칭을 가진 국제기구로, 유럽대륙에 위치한 38개 회원국이 항공 운항 정보를 공유하고 항공 운항 관제를 공동으로 운영하기 위해 1963년 체결한 국제조약이 그 모태다. 유의할 점은 유로컨트롤 본부가 브뤼셀에 있기는 하지만 EU와 직접 관련이 없는 기구라는 사실이다. EU는 다른 회원국처럼 이 기구에 일종의 회원 자격으로 가입해 있을 뿐이다.
항공 운항 결정은 개별 국가 권한
유로컨트롤이 이번 항공 운항 중단과 재개 결정 과정에서 회원국 간 정보 공유와 협의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이곳도 사실 영공의 개방과 폐쇄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 권한은 없다. 유럽에서 영공의 개방과 폐쇄를 결정하는 권한은 아직까지 EU나 유로컨트롤에 전적으로 위임되지 않았고, 오직 각 국가 정부만이 이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20일 유럽 항공 운항 부분 정상화 합의 이후에도 아직까지 국가별로 항공 운항 정상화 정도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번 항공대란 사태에 대한 세간의 비난이 EU에 집중되는 상황이 계속되자, 지난 4월20일 이례적으로 현지 언론에 해명 성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이 자료를 통해 “EU는 영공 개방과 폐쇄와 관련해 어떠한 법적 권한도 없으며, EU 집행위원회나 유럽의회에도 법적으로 어떠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은바, 현재 영공 개방 및 폐쇄와 관련된 모든 권한은 오직 개별 국가 정부에 있을 뿐”임을 강조했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EU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조속한 항공대란 수습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자료에서 EU는 4월20일 비행금지 부분 완화 결정에 이르기까지 EU 관련 기관과 관료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시간대별로 재구성해 보여주기까지 하면서 “만약 EU가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유럽 영공은 굳게 닫혀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EU 관계자들이 더 속상해하는 것은 역내 항공 이용객의 안전과 권리 보호를 위해 이번 사건 이전부터 꾸준히 노력해온 점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EU는 2004년 2월 항공사의 운항 취소나 연착 등에 대한 EU 차원의 단일화된 보상 규정 법안을 만들었다. 각국의 상이한 법체계나 항공사의 자의적 규정에 따른 소비자의 부당한 손해를 미연에 예방하는 법률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09년 11월 유럽사법재판소(ECJ)는 운항 취소나 연착 등에 대한 구체적인 판례를 만들어 항공사와 이용자 간 보상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바 있다.
“그럼에도 조정 능력 발휘 못했다”
물론 이번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로 야기된 항공 운송 대란 사태에서 EU의 대응 방식에 대해 아쉬움이 전혀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파리정치대학의 EU 전문가인 아디나 크리잔(38)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EU가 주도하는 ‘유럽단일영공’(Single European Sky) 계획이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단계에 다다르지 못한 만큼 EU가 이 문제에 대해 전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EU가 순회의장국을 중심으로 더 창의적으로 신속한 조정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도 그것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고 지적했다.
EU는 이처럼 아직도 유럽인에게 일상적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유럽공동체 주민의 안전과 권리 보호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묵묵히 하나하나 만들어나가면서 유럽 공동의 위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쉽지 않은 국가 간 이해관계 조절에 적극적으로 나서온 EU와 그 관계자들로서는, 이번 유럽 항공대란 사태에서 비난의 화살이 엉뚱하게 자신들에게 향하는 상황이 못내 속상하고 억울한 것이 사실이다.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 하늘을 마비시킨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로 인한 가장 억울한 피해자는 다름 아닌 EU라는 말이 요즘 현지 전문가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회자되는 이유다.
파리(프랑스)=윤석준 통신원 파리정치대학 유럽학연구소 박사과정 연구원 semi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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