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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의 미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바마, 평화운동 단체 반발 속 미군 증파 계획 발표… 병력 확충과 거점 확보 전술에 회의론
등록 2009-12-03 17:37 수정 2020-05-03 04:25

명사로, 주로 심리학에서 쓰이는 용어다. 국립국어원 누리집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선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이나 장면이 언제, 어디에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이라고 풀었다. ‘기시감’(데자뷔), 소름 돋는 경험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11월23일 밤(현지 시각) 국가안보팀 소집령을 내렸다. 아프가니스탄 정책을 확정짓기 위해 열린 아홉 번째, 최종 회의였다. 이날 하루 미국 전역의 평화운동 단체들은 일제히 “백악관(+202-456-1111)으로 전화를 걸어 아프간 병력 증파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히라”고 회원들을 독려했다. 큰 소용 없었다. 뉴스 신디케이트 는 11월24일 복수의 외교·안보 관계자들의 말을 따 “(이날 밤 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간 전쟁을 ‘필요한 전쟁’이라고 규정했다”며 “앞으로 1년간 아프간에 약 3만4천 명의 미군 병력을 증파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미 육군 제173 공중강습여단 소속 병사들이 11월21일 아프가니스탄 라고르주의 ‘생크기지’에 도착해 짐을 부리고 있다. 연합AP

미 육군 제173 공중강습여단 소속 병사들이 11월21일 아프가니스탄 라고르주의 ‘생크기지’에 도착해 짐을 부리고 있다. 연합AP

2만여 전투병력 순차적 증파

공식 발표를 앞두고 백악관 쪽에선 ‘입단속’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이미 추가 파병의 구체적인 내역까지 새나오고 있다. 는 “(이라크에서 활약한) 미 육군 ‘101 공중강습사단’ 소속 3개 여단과 ‘10 산악사단’ 병력, 해병 1개 여단 등 2만3천여 전투병력과 지원부대가 내년 3월부터 9개월 동안 아프간에 순차적으로 증파될 것”이라며 “같은 기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주둔하고 있는 아프간 남부에 미군 7천여 명이 추가로 파병되고, 아프간 군경 훈련을 위한 교관요원 4천여 명도 증파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결정은 이미 굳어진 듯싶다.

증파를 공식 발표하는 자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임무를 마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무한정 아프간에 주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할 것으로 전해진다. 무슨 말인가? 진보적 시사주간지 은 11월24일 인터넷판에서 “특정 시점까지 특정 군사·안보적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당위론과 함께 출구 전략에 대한 언급도 나오기는 할 것”이라며 “그러나 실제 구체적인 출구 전략이 제시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증파는 그저 증파일 뿐이란 얘기다.

비슷한 시기 아프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 정부의 만연한 부정부패를 강력히 성토해온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슬며시 태도를 바꾼 것도 주목할 만하다. 클린턴 장관은 지난 11월19일 (RFE/RL)와 한 인터뷰에서 “카르자이 대통령이 (부패 척결을 위해) 성심을 다하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약속이나 한 듯 아프간 검찰당국은 11월24일 “현직 장관 3명을 포함한 전·현직 각료급 인사 15명이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모종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모양새다.

지난 8월 백악관에 제출한 전략보고서에서 스탠리 매크리스털 아프간 주둔 미군사령관은 병력 증파와 관련해 크게 세 가지 안을 제시한 바 있다. 첫손에 꼽은 것은 8만 명의 병력을 증파해 탈레반을 압도하는 방안이었다. 그는 압도적 병력 증파가 “가장 위험도가 낮으면서, 저항세력 소탕에 확실한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매크리스털 사령관은 4만~4만5천 명 증파안의 위험도를 ‘중간급’으로, 증파 규모가 2만 명 수준에 그치면 ‘고위험도’ 방안이라고 각각 구분했다.

최대치 보내도 필요 병력 60만에 턱없이 부족

하지만 는 군사·안보 전문가들의 말을 따 “아프간 정도의 인구 규모를 가진 나라에서 전면적인 저항세력 소탕작전을 벌이려면 60만 명 정도의 대군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현재 아프간에는 미군 6만8천여 명과 NATO군을 포함한 기타 외국군 4만2천여 명이 주둔하고 있다. 매크리스털 사령관의 최대 요구치를 받아들인다 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단 얘기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미군과 NATO군 지휘부는 그동안 아프간 정규군과 경찰병력 확충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은 11월21일 “현재까지 아프간 정규군은 9만5천여 명, 경찰병력은 9만3천여 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그동안 오바마 대통령은 병력 증파와 별도로 아프간 군경의 작전능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리기 위해 훈련교관을 대거 파견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매크리스털 사령관도 지난 8월 전략보고서에서 내년 10월까지 아프간 정규군 병력을 13만4천 명까지 끌어올린 뒤 궁극적으로 24만 명까지 확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현실이 그다지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지난 1년 동안 아프간 정규군(ANA)에 입대한 신병 4명 중 1명이 무단으로 군무를 이탈했다.” 인터넷 대안매체 는 11월24일 미 국방부에 딸린 ‘아프간 재건 감찰국’의 자료 내용을 따 이렇게 전했다. 이 매체는 “지난 9월1일까지 1년 동안 아프간 정규군은 3만5천 명의 신병을 모집했지만, 남은 병사는 고작 1만9천 명 수준”이라며 “이는 2만6천여 명씩 늘어났던 앞선 2년에 비해 33%나 떨어지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탈영병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란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는 “아프간 신병모집 업무를 총괄하는 현지 미군 당국은 훈련을 마치고 실전에 배치된 병력만을 정규군 병력으로 집계하던 관례를 깨고, 지난해 8월 말부터 막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한 신병까지 정규군 병력으로 집계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실전능력이 전무한 훈련병 1만2천여 명이 정규군 병사로 집계되는 등 전체 병력 규모가 부풀려졌다”고 전했다.

“아프간을 대표하는 정규군을 갖춘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타지크족이 주류인 북부지방에 배치된 파슈툰족 출신 병사는 점령군 취급을 받게 된다. 파슈툰족이 장악하고 있는 남부지방에 배치된 타지크족 출신 병사도 똑같은 취급을 받을 게다.” 칼럼니스트 콘 핼리넌은 지난 11월12일 외교안보 전문 인터넷 매체 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는 “그렇다고 파슈툰족 병사를 파슈툰족 지역에, 타지크족 출신 병사를 타지크족 지역에 배치하는 것도 해법은 아니다”라며 “자기 종족 지역에 배치된 병사들은 부패하고 정통성 없는 중앙정부 대신 자기 지역민의 요구에 부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인구 90% 흩어져 사는 광활한 땅에 속수무책

인구 밀집지역에서 치안의 거점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저항세력 소탕작전을 벌이겠다는 매크리스털 사령관의 전술 변화에 대한 회의론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다. 아프간에서 그나마 인구가 많은 ‘대도시’로 꼽을 수 있는 지역은 고작 5곳이다. 인구 250만의 수도 카불이 도드라지고, 남부 칸다하르(약 33만 명)와 북부 마자리샤리프(약 20만 명)를 비롯해 헤라트(약 27만 명)·잘랄라바드(약 20만 명) 등이 고만고만하게 뒤를 잇고 있다. 이 5개 지역은 아프간 전체 인구의 약 10%를 차지한다.

나머지 90%의 인구는 광활한 땅에서 평균 1천~1500명씩 마을과 부족 단위로 흩어져 살고 있다. 물론 소규모 마을 단위까지 병력을 파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립된 상태에서 기습·포위 공격을 당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지역을 모두 포기할 수도 없다는 데 고민이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핼리넌은 “아프간의 미군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돼버렸다”고 꼬집었다.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과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간, 그리고 다시 2000년대 미국의 이라크가 지금 아프간에서 합종과 연횡을 거듭하고 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익숙한 풍경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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