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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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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경찰 ‘유튜브 폭로’ 일파만파

현지 경찰관이 뇌물 등 부패 고백하는 동영상 올려…
당사자 해직 불구 전직 경찰관들 ‘고해성사’ 잇따라
등록 2009-12-03 17:00 수정 2020-05-03 04:25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디모프스키. YOUTUBE.COM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디모프스키. YOUTUBE.COM

“안녕하십니까? ‘명예’와 ‘위엄’이란 낱말을 그저 말뿐이 아닌, 가슴속에 불길로 새기고 있는 동료들에게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10년간 러시아의 자랑스런 경찰관으로 살아왔습니다. 조국을 위해 바친 세월이었습니다. 뭔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일을 위해 분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 일을 혼자 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증거조작해 죄 뒤집어씌운 내용도

정복 차림의 경관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피곤에 지친 표정이지만, 낮게 깔린 목소리는 한없이 진지하다. 러시아 남부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노보로시스크 경찰국에서 마약수사를 맡고 있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디모프스키(32·사진) 경사다. 1996년부터 2년 간 육군에서 복무한 그는 전역과 함께 경찰에 투신했다.

지난 2004년부터 노보로시스크에서 근무해온 디모프스키 경사는 지난 11월 초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2분에서 7분 남짓한 동영상 3편을 잇달아 올려, 러시아 경찰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만연한 부패를 고발하고 나선 게다. 그의 발언 가운데는 뇌물을 받아 챙겼다는 내용부터 증거를 조작해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등의 민감한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일주일 남짓 만에 그가 올린 동영상(www.youtube.com/watch?v=R4vB2a15dOU)은 조회 수 100만을 훌쩍 뛰어넘었다. 디모프스키는 즉각 해직됐고, 노보로시스크 경찰당국은 ‘경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그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러시아 경찰의 ‘무법자’ 이미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모스크바에 본사를 둔 여론조사 전문기관 레바다센터가 2008년 12월 실시한 설문 결과, 응답자의 40%가 ‘경찰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28%는 ‘경찰이 두렵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 탓인지 지난 3월 러시아 내무부는 ‘경찰관 행동강령’까지 제정해 뇌물과 과도한 폭력 사용을 엄격히 금하기도 했다. 효과가 있었을까? 인터넷 매체 는 러시아가 ‘경찰의 날’을 맞은 지난 11월10일 하룻동안 보도된 경찰 관련 소식의 일부를 이렇게 전했다.

“라시드 누르칼리예프 내무장관은 ‘경찰의 날’ 기념식 연설에서 ‘경찰의 총구는 범죄자를 겨냥해야지, 평화로운 시민을 향해선 안 된다’고 새삼 강조했다. 지난 4월 모스크바의 한 슈퍼마켓에선 경관이 총기를 난사해 3명이 숨지고 6명이 다친 바 있다. …시베리아의 첼랴빈스크에선 60루블(약 2500원) 때문에 말다툼을 벌이다 20살 청년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전직 경관에게 징역 12년형이 선고됐다. … 남서부 도시 스트라포폴에선 22살 된 초임 경관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17살 여학생을 죽이고 주검을 희생자의 친척집 부근에 유기한 혐의로 기소됐으며….”

디모프스키가 내놓은 ‘사이버 양심선언’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도 이 때문이다. 유튜브엔 전직 경관들의 ‘고해성사’가 꼬리를 물었다. 미하일 예프세예프란 전직 경관은 “2005년 북서부 우흐타에서 발생한 방화사건으로 25명이 숨지면서 비난 여론이 일자, 상관들이 범인을 빨리 잡기 위해 무고한 사람 2명을 붙잡아 증거를 조작해 기소했다”며 “이들은 결국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고 고백했다.

과도한 폭력과 만연한 부패로 얼룩진 러시아 경찰의 오늘을 만든 건 무엇보다 열악한 근무환경이 ‘원흉’으로 꼽힌다. 디모프스키 경사는 동영상에서 “토요일과 공휴일도 없이 한 달 31일 가운데 30일을 일했다”며 “특근수당은 고사하고, (10년 경력에) 월급은 고작 1만4천루블(약 57만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처우 불만에 이직한 경찰 10만여 명

좀더 근본적인 이유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시사주간지 은 11월22일 인터넷판에서 알렉사데르 루로프 집권 러시아연합당 의원의 말을 따 “소비에트 붕괴 이후 현직 경관들이 근무조건이 좋은 민간 경비업체로 대거 이직하면서, 경찰 전체의 자질이 떨어진 게 더 큰 문제”라고 전했다. 은 러시아 내무부 자료 내용을 따 “1991년부터 2004년까지 줄잡아 10만 명이 경찰을 떠났다”고 전했다. 곪으면 터지는 법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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