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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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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가봉의 봉고 ‘왕조’

오마르 봉고 사망 뒤 41년 만의 대통령 선거, 이번엔 아들인 알리벤 봉고가 당선돼
등록 2009-09-15 15:15 수정 2020-05-03 04:25

북위 23도, 동경 27도. 대서양과 맞닿은 서아프리카의 ‘가봉 공화국’에는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 최근까지 단 2명뿐이었다. 초대 대통령 레옹 음바와 그의 후임자인 알베르베르나르 봉고 온딤바다. 지난 8월30일 치러진 대선 결과가 공식 발표된 9월3일, 드디어 제3대 대통령이 탄생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성씨는 제2대 대통령과 같다. 가봉에 ‘왕조’가 탄생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가봉 수도 리브르빌에 지난 8월23일 집권 가봉민주당의 대선 후보 알리벤 봉고의 대형 사진이 내걸렸다. 봉고 후보는 선거 부정 의혹 속에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사진 REUTERS/ DANIEL MAGNOWSKI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가봉 수도 리브르빌에 지난 8월23일 집권 가봉민주당의 대선 후보 알리벤 봉고의 대형 사진이 내걸렸다. 봉고 후보는 선거 부정 의혹 속에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사진 REUTERS/ DANIEL MAGNOWSKI

23년 일당 체제, 41년 가봉 대통령

1975년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엘 하지 오마르’로 이름을 바꾼 봉고는 1935년 12월30일 당시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남동부의 레와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통령에 오른 뒤 고향 마을 이름을 ‘봉고빌’로 바꿨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체신 공무원’ 노릇을 하기도 한 봉고가 ‘출세의 길’로 접어든 것은 식민모국이던 프랑스 군대의 장교로 입대하면서부터다.

1960년 8월 가봉이 프랑스에서 독립하자, 봉고는 망설임 없이 정치에 뛰어든다. 레옹 음바 정권 아래서 탄탄대로를 걸은 그는 정보장관·문화장관을 두루 거친 뒤, 1966년 11월 부통령에 임명된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67년 11월27일 투병 중이던 음바가 숨을 거둔 지 닷새 만에 봉고는 마침내 가봉의 두 번째 대통령 자리를 꿰찼다. 그의 나이 갓 서른두 살을 넘긴 때였다.

이후는 그야말로 ‘역사’다. 23년을 ‘일당 체제’로 군림했고, 안팎의 비판에 밀려 다당제를 도입한 1990년 이후에도 19년 세월 흔들림 없이 ‘종신 집권’의 꿈을 이어갔다. 지난 6월8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병원에서 대장암으로 생을 다하기까지, 봉고는 73년5개월여 삶 가운데 41년6개월여를 ‘가봉 대통령’으로 살았다. 한숨은 참아야 한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난 6월 그가 급서했을 때만 해도 가봉에선 ‘희망’을 말하는 이들이 제법이 있었다. 위성 뉴스전문 채널 는 당시 수도 리브르빌발 기사에서 거리의 주민들 말을 따 “누구든 ‘봉고’만 아니면 된다. 새 얼굴이면 누구나 좋다”고 전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마르 봉고 집권 기간 가봉에 야당은 사실상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일당 독재가 물러간 뒤에도 사세는 마찬가지였다.

봉고는 두 가지 잔꾀로 철권을 유지했다. 유력한 야권 지도자가 나타날 때마다, 돈으로 꾀거나 장관 자리로 유혹해 ‘싹’을 잘랐다. 봉고가 ‘자연이 부여한 임기’를 마친 뒤에도 이렇다 할 인물이 부각되지 못한 이유다. 이번 대선 기간에 일부 야권 후보는 “고 봉고 대통령님의 영혼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내놓기도 했단다. 그리고 지난 8월30일 마침내 대선이 치러졌다.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오마르 봉고’ 없는 선거였다. 하지만 다른 봉고가 있었다. 알리벤 봉고(50), 오마르의 아들이다.

프랑스 명문 소르본대학 출신인 그는 서른 살이던 1989년 외교장관에 올랐다가 2년여 만에 물러났다. 누군가 뒤늦게 ‘장관에 임명될 수 있는 최저 연령은 서른다섯 살’이란 헌법 규정을 들춰낸 탓이란다. ‘장관급 나이’를 지난 1999년 벤 봉고는 국방장관에 임명되면서 ‘2인자’임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엔 집권 가봉민주당(PDG)의 대표가 됐으니, 오마르 봉고가 숨진 뒤 PDG가 그를 ‘대선 후보’로 지명한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오마르 봉고는 부자였다. 숨지기 전까지 드러난 은행계좌만도 66개, 소유한 저택도 나라 안팎에 45채였다. 오죽하면 그의 ‘혈맹’이던 식민모국 프랑스의 법원이 올 들어 그가 소유한 파리의 부동산에 대한 적법성 여부를 따지고 들었을까? ‘공식’ 결혼만 세 차례, 자녀만도 ‘서른 명 이상’으로 알려진 봉고다. 그럼에도 프랑스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봉고 왕국’을 전폭적으로 지지·지원했다. 봉고는 프랑스 정유업체 ‘토탈’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현 대통령은 물론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까지 장례식에 참석해 고인의 넋을 기린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독립 59주년을 맞은 가봉에는 프랑스 군대가 여전히 주둔하고 있다.

독립 59주년 프랑스 군대가 여전히 주둔

산유국인 가봉의 공식 실업률은 20%, 공식 통계는 없지만 극빈층이 전체 인구의 60%를 넘어선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알리벤 봉고가 42%의 득표를 얻었다는 발표에 이어 9월3일 가봉 헌법재판소가 이를 추인하자, 사르코지 대통령은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날부터 가봉 곳곳에선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시민들과 이를 진압하는 경찰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여러 날 이어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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