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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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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무치의 울음, 그 씨앗은 차별과 배제

중국 정부의 한족 이주 정책으로 위구르족 갈수록 소수파로 전락…
누적된 박탈감이 민족갈등으로 폭발
등록 2009-07-17 17:31 수정 2020-05-03 04:25

차별과 갈등의 씨가 뿌려지면, 좌절과 분노는 유혈의 열매를 맺는 법이다. 다만 죽거나 다치는 건 언제나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다. 중국 서부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성도 우루무치의 핏빛 낭자한 오늘을 만들어낸 것도 같은 이치다.

중국 서부 신장자치구에서 위구르족과 한족 주민 간 유혈 충돌 사태가 벌어진 지 나흘째인 7월8일 중국군 병사들과 시위진압 경찰병력이 성도 우루무치 중앙광장에 도열해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사진 REUTERS/ DAVID GRAY

중국 서부 신장자치구에서 위구르족과 한족 주민 간 유혈 충돌 사태가 벌어진 지 나흘째인 7월8일 중국군 병사들과 시위진압 경찰병력이 성도 우루무치 중앙광장에 도열해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사진 REUTERS/ DAVID GRAY

시계를 조금만 되돌려보자. 지난 6월25일 밤 중국 남부 광둥성 사오관시에 자리한 홍콩계 장난감 공장 ‘쉬르’의 노동자 기숙사가 피로 물들었다.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한족 노동자 100여 명이 떼를 지어 위구르족 노동자들의 숙소를 덮친 게다. 앞서 이 업체는 5월과 6월 두 달에 걸쳐 모두 800명가량의 신장 출신 위구르 노동자를 신규 채용한 바 있다. 위구르 노동자들이 도착한 이후 기숙사 안팎에서 범죄가 급증했다는 얘기가 꼬리를 물더니, 급기야 위구르족 노동자들이 자기들 기숙사에서 한족 여성 노동자를 성폭행했다는 괴소문이 한족 노동자들을 자극한 게다.

광둥에서 흘린 피가 우루무치 사태 기폭제

한밤의 ‘활극’은 이튿날 새벽 400여 공안 병력이 출동한 뒤에야 잦아들었다. 이 과정에서 위구르족 노동자 2명이 무참히 살해됐다. 홍콩 일간 는 6월28일치에서 “이날 유혈 사태로 병원으로 옮겨진 부상자만도 중상자 10여 명을 포함해 118명에 이른다”며 “이 가운데 81명이 위구르족 노동자”라고 전했다. 사실상 한족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습격’이었던 게다.

‘허망한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건 발생 사흘째인 6월28일이다. 이날 중국 관영 은 “공안당국이 사건의 발단이 된 괴소문을 유포한 용의자를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주아무개’로 알려진 한족 출신 용의자는 애초 쉬르 공장에서 일하다 퇴사한 뒤 재취업을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위구르족 노동자들이 대거 채용된 탓에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 걸까? 그는 “신장 녀석들이 무고한 한족 여성 2명을 쉬르 공장 기숙사에서 성폭행했다”는 무모한 거짓을 인터넷 사이트에 유포했다가 덜미를 잡혔다.

광둥성에서 뿌려진 피는 3200여km를 날아와 신장에서 또 다른 유혈을 촉발시켰다. 7월5일 성도 우루무치에서 성난 위구르족들이 쉬르 공장의 동족들이 당한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몇백 명에서 시작한 시위는 삽시간에 몇천 명으로 불어났다. 오랜 차별의 세월이 만들어낸 분노는 그만큼 휘발성이 강했다. 은 “(위구르족) 폭도들이 (한족) 행인을 공격하고 차량에 불을 질렀다”고 전했다. 시위대를 향한 발포 소식이 뒤를 이었다.

이튿날인 7월6일 중국 당국은 전날 하루에만 무려 140명이 유혈 사태로 목숨을 잃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도시는 봉쇄됐고, 중무장한 군 병력이 거리를 점령했다. 외부와의 통신은 차단됐고, 인터넷도 먹통이 됐다. 〈AP통신〉은 현지 휴대전화 업체인 ‘차이나 모바일’ 관계자의 말을 따 “평화를 유지하고, 유혈 사태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휴대전화 서비스를 중단했다”고 전했다. 중국 당국은 시위 사태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검거 선풍이 불기 시작했다.

사태 사흘째, 중국 당국은 인명피해 규모를 고쳐 내놓았다. 그새 사망 156명, 부상자도 1천여 명으로 늘었다. 7월5일 하루 우루무치의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새삼 오싹해진다. 중국 당국은 이날까지 체포한 ‘폭도’가 1430명을 넘어섰다고 덧붙였다. 이날 오후 무장한 한족 주민들이 ‘보복 공격’에 나섰고, 공안당국은 밤 9시부터 이튿날 아침 8시까지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신장자치구는 중국 전체 면적의 6분의 1에 이르는 광활한 땅에 13개 종족 2천만 인구가 몰린 곳이다. 대대로 그 땅에서 살아온 위구르족은 청나라가 패망한 1912년 이후 광범위한 자치를 누려왔다. 1933년 10월엔 아예 독립을 선포하고 제1차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건설하기도 했지만, 이듬해 초 다시 중국에 귀속됐다. 독립의 열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아 1944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제2차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1949년 다시 우루무치를 장악했고, 1955년 신장을 자치구로 선포했다. 위구르족들은 1949년을 ‘식민화’ 원년이라 부르지만, 중국 당국의 공식 입장은 “서한시대(기원전 206년~서기 2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떼놓을 수 없는 중국 영토의 일부”란 게다.

1990년대 들어 위구르족 분리·독립 움직임이 다시 거세지면서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이란 단체까지 만들어졌다. 중국판 ‘테러와의 전쟁’이 뒤를 이었다. 2001년 9·11 동시테러 직후 중국 당국은 ETIM이 알카에다와 연루된 테러조직이라 주장하고 나섰다. 우루무치에서 이번 유혈 사태가 벌어진 직후 이 “테러와 분열주의, 극단주의란 3대 세력이 다시금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미 국무부도 ETIM을 테러단체로 지정해놓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가? ETIM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중국 당국은 서부 개발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신장 일대에 막대한 규모의 투자가 뒤따를 것이란 선전과 함께 한족들의 집단이주를 독려하고 나섰다. 그 결과는 신장 일대의 인구 구성 비율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다. 이른바 ‘한족화’ 전략이었다. 실제 지난 1940년대 신장 지역의 한족 인구 비율은 5% 남짓에 그쳤지만, 현재 신장 전역에서 한족 인구는 전체의 40%에 달한다. ‘원주민’인 위구르족은 45%에 그치고 있다.

2005년 통계 기준으로 인구가 약 268만 명에 이르는 우루무치에선 이미 ‘역전 현상’이 벌어졌다. 영국 시사주간지 는 최신호에서 “이미 지난 2000년 인구통계 자료를 봐도 우루무치의 다수파는 인구의 45.3%를 점한 한족이며, 위구르족(42.8%)은 소수파로 전락했다”며 “신장 일대에서 한족 인구 증가율은 위구르족의 2배에 이른다”고 전했다. 여기에 교육과 일자리 기회마저 한족에게 우선권이 주어지고 있다. 위구르족으로선 이래저래 위기감을 느낄 만하다.

“신장 정부는 분열 세력에 대한 강도 높은 단속을 이어갈 것이다. 분열주의 세력에게 자비란 있을 수 없다. 오직 치명적 타격만이 있을 뿐이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2005년 4월 펴낸 ‘치명적 타격’이란 보고서에서, 왕리콴 신장자치구 공산당 서기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이 단체는 보고서에서 “위구르족은 자치권 확대나 독립국가 건설을 원하고 있으며, 이는 다민족 국가를 추구하는 중국 당국에 위협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며 “중국 당국은 위구르족 정체성의 뿌리인 이슬람을 길들이는 게 위구르족을 길들이는 수단이라고 보기 때문에 위구르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다면적으로 감시·통제·탄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족의 보복 공격 방관이 사태 더 키워”

7월8일 우루무치에 병력이 증강 배치됐다. 주요 8개국 정상회담 참석차 이탈리아를 방문했던 후진타오 국가주석도 급거 귀국길에 올랐다. “유혈 사태에 가담한 자는 극형에 처할 것”이란 당국의 발표도 잇따랐다. 7월9일, 사흘간 문을 닫아걸었던 관공서가 마침내 업무를 재개했다. 버스도 다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단다. 이대로 수습될 수 있을까? 은 ‘상하이 출신 한족’이라고 밝힌 한 퇴직 교사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당국이 (한족의) 보복 공격을 초기에 막지 않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우루무치의 거리에 뿌려진 종족 간 미움의 잔영은 오래도록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당장 군 병력이 철수한 뒤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두렵기만 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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