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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3차례 위기 공통점은 ‘불신’

북한이 양보하면 한·미·일은 더 많은 것 요구… “대북 협상용 지렛대 확보 위해서라도 주고받기 필요”
등록 2009-06-19 18:50 수정 2020-05-03 04:25

지난 6월11일 오후 2시께, 미 워싱턴 의사당 더크슨 상원빌딩 419호실에서 상원 외교관계위원회 주최로 청문회가 열렸다.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필두로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를 지낸 에번스 리비어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 리언 시걸 사회과학원 동북아 협력안보프로젝트 국장, 인도지원단체 머시코어의 낸시 린드보그 회장, 그리고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가 증언에 나섰다. 주제는 ‘다시 벼랑에 선 북한’, 존 케리 외교관계위원장은 서면으로 준비한 모두발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북핵 폐기 앞두고 3차 위기, 지독한 역설

2002년 미 위성사진 전문업체 디지털글로브가 공개한 평안북도 영변의 북한 핵시설 일대 모습. 미국과의 협상이 늦어지면 북한이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해 플루토늄을 양산하고, 이를 이용해 추가 핵실험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사진 AP 연합

2002년 미 위성사진 전문업체 디지털글로브가 공개한 평안북도 영변의 북한 핵시설 일대 모습. 미국과의 협상이 늦어지면 북한이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해 플루토늄을 양산하고, 이를 이용해 추가 핵실험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사진 AP 연합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과거에도 경험한 바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근 한 대북 전문가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가 제3차 북핵 위기로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하더라. 첫 번째 위기는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풀었다. 북한은 이후 8년 동안 플루토늄 생산을 중단했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2002년 북한 쪽이 기본합의를 어겼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직접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려 하지 않았다. 이로써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기본합의 틀은 깨졌고,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핵물질 보유고를 4배 이상 늘렸다. 오늘 우리는 더욱 위험해진 북한과 마주하고 있다.”

돌이켜보자. 지난해 6월26일 북한이 ‘10·3 합의’에 따라 중국 쪽에 플루토늄 프로그램의 목록을 제출했다. 북핵 폐기의 2단계인 불능화를 위한 조처였다. 이튿날엔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을 폭파했다. 세계의 관심이 한반도로 쏠렸다. 북핵 폐기가 머지않은 듯했다. 미국과의 별도 합의를 통해, 북한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내역과 시리아에 제공한 원자로 기술을 포함한 핵확산 활동 관련 정보도 공개하기로 한 상태였다. 북으로선 할 만큼 한 셈이었다. 바로 이 무렵 ‘3차 핵 위기’가 싹튼 것은 지독한 역설이다.

북한은 중국에 넘긴 자료에서 모두 38kg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추정한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량과 엇비슷한 규모였다. 하지만 미국도 그렇거니와 특히 한국과 일본이 북한이 제출한 목록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1991년 이전에 생산한 플루토늄이 문제였다. 이에 대해선 북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확실한 정보가 없다. 그럼에도 한·미·일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결국 부시 행정부는 불능화 단계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핵 프로그램 관련 자료를 검증해야겠다고 북을 압박했다.

7월 들어 북-미 양자접촉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북한은 7월12일 6자회담 틀 내에서 검증 장치를 만드는 데 동의했다. 신고된 핵시설을 방문해 기술인력들을 면담하고 관련 문건을 검토하는 것도 허용했다. 당시 북한은 최종 핵 폐기 단계에서 검증 절차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뜻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은 ‘만족’을 몰랐다. 북쪽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문서화할 것을 고집했다. 부시 행정부도 이에 동의했다. 압박의 강도가 조금 더 높아졌다. 백악관 쪽은 7월30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시점을 늦출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10·3 합의’ 어디에도 검증과 관련된 조항은 없다는 점이다. 북은 합의 내용을 나름대로 충실히 이행해나갔다. 일부 추가적인 양보 조처도 취했다. 그럼에도 한·미·일 3자는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약속’을 어긴 쪽은 누구인가?

북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해 8월14일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추가 불능화 작업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기왕에 불능화했던 핵시설과 장비도 복원했다. 위기가 깊어질 조짐을 보이자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급거 10월 초 평양을 방문해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북핵 검증 과정의 얼개를 담은 초안에 합의했다. 미뤄졌던 테러지원국 해제 조처도 취했다.

핵폐기 검증 절차 ‘문서화’ 고집

하지만 한번 어긋난 협상 틀은 복원이 쉽지 않았다. 그해 12월11일 한·미·일 3국은 북한에 문서화된 검증 절차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에너지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북한은 불능화를 다시 중단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정권 교체’가 이뤄진 지난 1월 말부터 위성(탄도미사일) 발사 준비에 들어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기다려달라’는 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지만, 북은 그예 지난 4월5일 위성(탄도미사일)을 쏘아올렸다.

‘악행’에 대한 ‘처벌’을 피할 순 없었다. 미국 주도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북을 비판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북은 “사과하지 않으면 핵실험을 강행하겠다”고 흥분했다. 엄포로 그치지 않았다. 지난 5월25일 북은 2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유엔안보리는 추가 제재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북은 다시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 준비에 들어갔다. 불신이 만들어낸 위기의 증폭, 앞서 두 차례의 핵 위기 때와 고스란히 닮아 있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이란 협상용 지렛대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그렇지 못하다. 북한을 강제할 만한 협상용 지렛대가 없다.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권에 수도 서울이 있는 한국은 사실상 ‘인질’ 상태다. 그래서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경제제재는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북한을 굴복시킬 만큼 충분한 고통을 안겨주지 못했다. 더구나 제재는 북한에 미국이 여전히 적대국이라는 확신만 키워준다. 이는 다시 북한의 무장을 부추긴다.”

리언 시걸 사회과학원 동북아 협력안보프로젝트 국장은 6월11일 상원 청문회 증언에서 “미국이 협상용 지렛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주고받기식의 외교적 노력을 지속해 미국에 대한 북한의 의존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시걸 팀장은 이어 존 케리 외교위원장이 “대미 의존도를 높이는 게 협상의 목적이란 걸 알면 북한이 더욱 고립의 길로 나아가지 않겠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12년까지 강하고도 번영을 구가하는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핵과 미사일이 강한 나라를 만들어줄 수 있을진 모르지만, 번영을 가져다줄 순 없다.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이 말한 것처럼 ‘플루토늄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강성대국’을 건설하자면 미국이 필요하다는 점을 김 위원장도 잘 알고 있다.”

리언 시걸 “고위 특사 파견해 로드맵 합의를”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걸음을 해온 지난 세월, 북핵 위기는 온갖 변주 속에 16년째 이어지고 있다. 협상이 계속 늦어진다면, 북한은 영변 원자로 재가동으로 치달을 게다. 원자로를 재가동하면 사용후 연료봉이 양산되고, 이를 재처리하면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 충분한 양이 모이면 북은 또다시 핵실험을 할 수 있다. 시걸 팀장은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한 제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해법이 될 순 없다”며 고위급 대북특사 파견을 촉구했다. 하루라도 빨리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정도의 거물급 대북특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핵과 미사일 문제를 풀 수 있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게다.

물론 다른 목소리도 여전하다. “그간 외교적 노력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앞으로는 압박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가르침을 줘야 할 때다.” 네오콘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던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 대사는 지난 6월9일 미기업연구소(AEI)가 주최한 한-미 관계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6월16일 한-미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역사에서 배울 줄 모르는 후안무치의 전형이다. 이 대통령은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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