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30주년, 다시 갈림길에 섰다.’
1979년 탄생한 세계 최초의 이슬람 공화국 이란의 새 역사는 출발부터 험난한 노정의 연속이었다. 혁명의 달뜬 열기는 수도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에서 예기치 못한 인질 사태를 연출시켰다. 해를 넘겨 444일 동안 계속된 ‘이란 인질 위기’는 미국과의 국교 단절로 이어지면서 신생 공화국의 고립을 불렀다. 그리고 이내 전쟁이 터졌다. 1980년 9월부터 이웃나라 이라크와 8년 가까이 벌인 핏빛 공방으로 1980년대를 송두리째 날려야 했다. 신생 혁명은 날개조차 펼 겨를이 없었다.
개혁파 성직자 모하마드 하타미가 1997년과 2001년 두 차례 거푸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때 ‘변화’의 열풍이 페르시아 땅을 휩쓸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기득권을 차지한 채 ‘혁명의 대의’를 밀랍으로 만들어버린 집권세력은 요지부동이었다. 지난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 강경보수 성향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전 테헤란 시장이 예상을 깨고 당선된 배경에는 ‘무능한 개혁파’에 대한 유권자의 실망, 그 철저한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2009년 6월, 어느새 다시 대선이다. ‘실패한 개혁’을 발판 삼아 들어선 보수 정권의 지난 4년은 이란 사회를 얼마나 바꿔놨을까? 고유가로 흥청이던 경제가 아니다. 핵과 미사일, 그에 맞먹는 무모한 언사가 불러온 것은 철저한 고립과 갈등뿐이다. 현안은 켜켜이 쌓여 있고, 30주년을 맞은 혁명의 어제와 오늘을 둘러싼 논쟁은 세대를 초월해 불을 뿜고 있다. 제10대 대통령 선거를 맞이한 이란의 오늘이다. 이번 대선은 혁명의 지난 세월, 그 빛과 어둠을 굴절·분산시켜 헤아리고 되새겨보는 ‘프리즘’으로 삼을 만하다.
“정부에 대한 모욕과 비난이 정도를 넘었다. 모두가 진실로 여길 때까지 끝없이 거짓을 늘어놓는 것은 나치 히틀러의 선전·선동을 연상시킨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6월10일 선거 유세를 마감하면서 새삼 경쟁 후보를 ‘위협’했다.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고위인사를 모욕하면 최대 2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게 이란 형법이다. 초접전 양상을 보이고 있는 선거 판세를 여실히 드러낸 발언이다.
“이란 역사상 이 정도 접전 속에 치러진 선거는 없었다. 그야말로 막판까지 예측 불허다.” 아랍 위성방송 는 6월11일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외신들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선거 결과를 ‘확신’하는 이들은 거의 없어 보인다. 투표를 하루 앞둔 이날까지 이란 안팎의 전문가들은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를 하는 후보가 나오긴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럴 경우 득표가 많은 2명의 후보가 일주일 뒤인 6월19일 결선투표를 치르게 된다. 물론, 지금으로선 어떤 예측도 무의미하긴 마찬가지다.
애초 이번 대선에 출사표를 던진 이들은 여성 42명을 포함해 모두 475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선 후보의 출마 자격을 ‘검증’하는 12인 혁명수호위원회의 엄격한 잣대를 통과한 것은 보수·개혁 양쪽 진영에서 각각 2명씩 모두 4명에 불과하다. 현직인 아마디네자드 대통령과 모흐센 레자이 전 혁명수비대 사령관이 보수 진영을 대표해 출마했고, 메흐디 카루비 전 마즐리스(의회) 의장과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가 개혁세력의 재집권을 내세우며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렸다. 재선을 노리는 현직 대통령이 3명의 유력한 경쟁자와 맞붙은 것도, 개혁파에서 2명의 후보를 낸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선거 시작부터 가히 ‘혁명적’이었다.
올해 쉰네 살인 모흐센 레자이 후보는 혁명 직후인 1981년 스물일곱 살 나이에 혁명수비대 사령관에 올라 1997년까지 16년 동안 이란 정규군을 이끌었다. 지난 2001년 뒤늦게 경제학 박사학위를 따낸 레자이 후보는 빈곤·물가·실업 문제 등을 쟁점 삼아, 자신과 지향이 비슷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과 선거운동 기간 내내 끝없이 날을 세웠다. 레자이 후보는 지난 2005년 대선에도 출마했다가 막판에 자진 사퇴한 바 있다.
개혁파인 메흐디 카루비 후보는 마즐리스 의장을 두 차례 지냈다. 첫 번째 임기 때인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보수 강경파가 다수였고, 두 번째 임기 때인 2000년부터 2004년까지는 개혁파의 입김이 거셌다. 두 번째 임기 동안 카루비 후보는 의회에 진출한 개혁파의 구심점 노릇을 했다. 2005년 대선 때도 개혁파를 대표해 출마했던 그는 1차 투표에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 70만 표가량 뒤진 3위를 기록하며 결선투표 진출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
이들 두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중대 변수’로 떠오르지 못했다.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보수 대 개혁’ 구도로 흘러간 터다. 어차피 두 후보는 양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레자이 후보가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빛에 가렸다면, 카루비 후보는 또 다른 개혁파 후보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결선투표가 치러진다면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대 무사비 전 총리’의 대결이 될 것이라는 데 이견은 전혀 없다.
무사비 후보는 스스로를 “이슬람 혁명의 원칙을 유념하는 개혁파”라고 규정한다. 그럴 만하다. 혁명 직후인 1981년 그를 총리로 발탁한 것은 ‘이란 혁명의 아버지’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였다. 무사비 후보의 총리 재직 당시 이란 대통령은 현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였다. 1989년 개헌으로 총리직이 폐지되면서 이란의 ‘마지막 총리’로 남은 그의 재임 기간은 ‘이란-이라크 전쟁’과 겹쳐져 있다. 그는 극한의 봉쇄 속에 생필품마저 부족했던 ‘전시경제’를 공평하고 효율적인 배급체제로 무난하게 관리하면서 국민적 신망을 쌓았다.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조차 그의 출마를 바라보며 ‘혁명의 나날들’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는 이유다.
올해로 예순여덟 살이 된 무사비 후보는 일찌감치 이슬람 혁명에 가담해 ‘이슬람공화당’ 기관지인 의 편집국장을 지냈다. 총리 임명에 앞서 혁명 초기엔 외교장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슬람 전통건축을 전공한 건축가이자 화가이기도 한 그는 1989년 총리에서 물러난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을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대선 출마 당시 그의 직함이 ‘이란예술원 회장’인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그는 지난 1997년 대선 때 개혁파 진영의 출마 강권을 끝내 고사한 바 있다. 그를 대신해 개혁파 후보로 나섰던 성직자 출신 모하마드 하타미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지난 3월16일 무사비 전 총리가 출마 선언을 하자 그보다 앞서 출마 의사를 밝혔던 하마티 전 대통령이 지지 성명을 내고 미련 없이 후보직을 물린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다.
“한 달 전만 해도 젊은 층의 무관심 속에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재선이 안정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최근 상황이 급변했다. 뭔가 수면 아래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란 정치평론가 샤래프 에만 조메는 6월9일 아랍 위성방송 인터넷판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방송은 같은 기사에서 “수도 테헤란 안팎에선 무사비 전 총리가 한발 앞서나가고 있는 모양새”라며 “수도권 외곽에선 여전히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지지층이 흔들림 없이 결집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결국 젊은 층 유권자의 투표 참여율이 최대 변수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젊은층 유권자 참여율이 최대 변수실제 이란의 인구 분포를 살펴보면 이런 분석은 설득력을 얻는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펴낸 을 보면, 이란 국민의 평균연령은 27살로, 37.7살인 우리나라에 비해 10살 이상 젊다. 6600만여 인구 가운데 3분의 2, 유권자의 3분의 1이 1979년 혁명 이후 세대란다. 전문가들은 전통적인 이란 보수층 유권자를 ‘1200만에서 15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3천만 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한다면 개혁파 쪽에 승산이 있다는 얘기다. 실제 개혁파인 하타미 전 대통령이 압도적으로 당선된 1997년 대선에선 투표율이 80%에 육박한 반면, 보수파인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당선으로 이어진 2005년 대선의 투표율은 60%대에 불과했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든든한 배후여야 할 보수층도 선거를 앞두고 흔들리고 있다. 유력한 개혁파 후보가 2명이나 나온 것도 전례를 찾기 어렵지만, 현직 보수파 대통령에 맞선 유력한 보수 후보가 등장한 것도 곱씹어볼 만하다. 온건 보수파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은 아예 내놓고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에게 서한을 보내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을 비판했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와 자신을 포함한 기성 보수 진영을 부패 세력으로 비판한 탓이다.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은 서한에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주장이 “무책임한 거짓으로 일관돼 있다”며 “더구나 이런 거짓 주장으로 최고지도자까지 노리고 있다”며 구체적인 ‘조처’를 호소했다.
시아파 이슬람 신학의 ‘고향’인 이란 남서부 성지 콤의 고위 성직자 14명도 6월9일 이와 관련해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시했다. 이들은 따로 성명을 내어 “텔레비전 토론 현장에 없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이슬람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꼬집었다. 〈AP통신〉은 6월10일 이란 정치평론가 사예드 레일라즈의 말을 따 “수많은 고위인사에게 부패 혐의를 들씌움으로써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사실상 아야톨라 하메네이를 포함한 이란 통치권력 전반의 청렴도에 의문을 제기한 셈이 됐다”고 지적했다. 2005년 대선이 보수파의 단결로 승패가 갈렸다면, 이번 대선은 보수파의 분열이 관건이 될 것이란 전망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최초 민간인 대통령, 재선 못한 첫 대통령?그럼에도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건재’하다. 지난 4년 임기 동안 그는 각 부처 장관을 대동하고 이란 전역 30개 주를 적어도 두 차례씩 직접 둘러봤다. 선거공약을 실행에 옮긴 게다. 방문지마다 현지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직접 듣고, 즉석 국무회의를 열어 지역 현안을 풀기 위한 각종 행정명령을 하달했다. 야권에선 “고유가에 편승해 선심성 정책으로 예산을 낭비했다”고 비판하지만, 수혜를 입은 지역 주민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이슬람 공화국 24년 만에 처음으로 성직자 출신이 아닌 ‘민간인 대통령’이다. 지난 4년 세월, 경제는 파탄났고 외교는 침몰했다. 그가 패배한다면 1981년 대선 이후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하지 못한 현직 대통령으로 기록될 터다. 이래저래 ‘혁명적’인 상황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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