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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즈미 타카시] 집단자살, 생존자를 찍어라

등록 2009-03-11 16:55 수정 2020-05-03 04:25

지난 2007년 3월, 일본 문부과학성이 고등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2차 대전 중 오키나와에서 발생한 ‘집단자결’ 사건에 대해 “일본군이 자결을 명하고, 이를 강제했다”고 쓴 7개 역사 교과서의 내용이 수정·삭제됐다. ‘악몽’에서 살아남아 역사를 증언했던 오키나와 노인들과 그 후손들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그해 9월29일 오키나와에서 열린 현민대회에는 성난 민심이 19만 인파가 돼 몰려들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모리즈미 다카시(58)가 그 속에 섞여 조용히 현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모리즈미 다카시(58)

다큐멘터리 사진가 모리즈미 다카시(58)

“현민대회를 취재하면서, 강제 집단자결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게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현장에서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문득 집단자결 현장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결국 찾아나서게 됐다. 일단 한발 내디디자, 빠져나갈 수 없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1월 세상에 나온 란 사진 증언집은 이렇게 시작됐다.

모리즈미는 ‘전장의 카메라맨’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에선 ‘열화우라늄탄 전문기자’로 부르기도 한다. 20대엔 ‘일본민주주의청년동맹’ 기관지인 에서 9년간 사진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일본 최대 출판기업 고단샤가 발행하는 주간 에 정기적으로 사진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는 “그 무렵 생계를 위해 초·중·고 운동회나 소풍 따위를 따라가 ‘앨범용 사진’을 찍는 ‘파견노동자’ 노릇도 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반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길로 들어선 그의 렌즈가 격렬한 반응을 보인 피사체는 언제나 ‘평화’였다. 어제와 오늘의 전쟁터를 자주 찾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91년 걸프전부터 코소보·보스니아 등 발칸전쟁, 그리고 이라크전쟁까지 열화우라늄탄 문제가 계속해서 불거졌다. 세계 유일의 ‘피폭국’인 일본의 사진가로서 취재에 상당한 의무감을 느꼈다. 해서 1994년부터는 아예 전세계 핵실험장과 피폭자 취재에 나섰다.”

당시 취재는 이란 사진집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는 “옛 소련 세미파라친스크에선 무려 40년이나 핵실험이 이뤄졌다. 아무것도 말 못하는 현지인들,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주고 싶었다”며 “마침 1995년은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 50주년이어서, 사진집에 대한 반응이 예상보다 좋았다”고 말했다. 이 사진집으로 그는 일약 유명 사진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사진으로 먹고사는 처지에서, 핵실험장이라든가 피폭자라든가 전쟁터 따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경쟁자가 별로 없어 더 열을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2001년 9·11 동시테러 뒤 미국이 ‘침공의 북소리’를 울리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석에 이끌리듯 이라크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전해달라’는 요구뿐이었다. 부탁을 안 해도 돕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을 통해 ‘특종 현장’도 여럿 포착해냈다. 사진가의 작업은 ‘만남’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교훈, 그때 깨달았단다. 그는 “진실이 가려진 곳에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면, 그리고 되풀이해 찾아가면 신뢰를 얻게 된다. 나중엔 ‘이 친구 또 왔다’며 좋아라 하고, 털어놔주고, 드러내준다.” 그가 이라크에서 기록한 현장은 일본은 물론 미국과 유럽을 돌며 전시됐고, 이란 사진집으로 묶여 나오기도 했다.

모리즈미의 최신 사진집을 펼쳤다. ‘집단자살’이란 참극의 역사를 증언하는 기록임에도, 그가 담아낸 생존자들의 표정은 뜻밖에도 환하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진이란 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찍을 수밖에 없다. 다만 과거의 어떤 것을 불러와 현재의 피사체와 어우러 표현하는 건 사진가의 몫이다. 어두운 과거의 경험을 들춰내기 위해, 살아남은 이들의 표정까지 어둡게 만들 필요는 없다. 이미 충분히 아파하지 않았나.”

도쿄=글·사진 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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