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공무원들이 임기가 끝나기 전에 다시 그 직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하는 쪽으로 공화국의 헌법을 바꿔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강화하는 데 동의하십니까?”
국민투표서 찬성 55%
인터넷 대안매체 〈IPS뉴스〉는 지난 2월15일 베네수엘라 전역의 1만1422개 투표소에 설치된 전자투표용 스크린에 올라온 문구가 모두 ‘73단어’였다고 전했다. 1676만여 유권자 가운데 70.33%가 이 질문에 답을 했다. ‘시’(찬성)이라고 답한 이들은 전체의 54.85%로 절반을 넘었다. 찬성과 반대의 표차는 약 100만 표에 이르렀다. 이로써 1999년 개정된 베네수엘라 헌법 가운데 △주지사(160조) △자치의회 의원(162조) △시장(174조) △국회의원(192조) △대통령(230조)의 임기를 한 차례 연임만 가능하도록 제한하는 5개 조문이 바뀌었다. 연임 제한 규정으로 2013년 2월 물러나야 했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3선 도전도 가능해졌다.
“미래로 가는 문이 활짝 열렸다.” 투표 결과가 공식 발표된 직후 수도 카라카스의 미라플로레스(대통령궁)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 차베스 대통령은 이렇게 외쳤다. “국민의 승리이자, 혁명의 승리”라고도 했다. 이어 “신께서 다른 선택을 하시거나 국민이 다른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이 병사(차베스 대통령)는 2012년 대선에 기꺼이 출마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만 10년을 넘긴 베네수엘라의 ‘정치 실험’이 새 단계로 들어선 순간이다.
처음부터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차베스 대통령은 지난 2007년 12월에도 연임 제한을 풀기 위한 헌법 개정에 나선 바 있다. 당시엔 이와 함께 각종 사회개혁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포함해 모두 69개 조문에 이르는 방대한 개헌 작업이었다. 하지만 55%에 그친 낮은 투표율 속에 찬성과 반대가 각각 51 대 49로 갈리면서 개헌 시도가 무산됐다. 이번에도 지난 1월 말까지만 해도 여론조사 결과는 ‘박빙’으로 나왔다. 차베스 대통령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장기 집권에 대한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차베스 대통령은 “내가 없는 베네수엘라를 상상해보라”고 유권자의 표심을 자극했다. 집권당 안에서 그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이 없는 것을 우회적으로 부각시킨 게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실시된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 ‘차베스 이후’의 베네수엘라에서 ‘제5공화국운동’(MVR)이 정권을 연장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MVR은 당시 선거에서 17개 주를 휩쓰는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미란다·술리아 등 2개 거대주와 관광 중심지인 누에바에스파르타, 유전지대인 술리아 등 주요 거점 5개 주를 고스란히 야권에 넘겨줬다. 수도 카라카스 시장에도 야권 후보인 안토니오 레데스마가 당선됐다. ‘차베스 없는 베네수엘라’에 대한 우려가 연임 제한을 푸는 개헌 찬성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대안 부재론 먹혀들어“사실상 종신 집권이 가능해졌다.” 개헌에 대한 나라 안팎의 비판이 거세다. “민주적인 제도를 이용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했다”는 주장도 넘쳐난다. ‘선거를 통한 좌파 독재’란 게다. 그런가?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2009년 1월)과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2008년 9월) 등 이웃한 ‘좌파’ 정부의 대통령들도 개헌을 통해 정권 연장 가능성을 열기는 했다. 하지만 남미의 대표적 ‘친미 국가’인 콜롬비아의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도 개헌을 통한 집권 연장에 골몰해 있다. 장기 집권에 대한 비판이야 충분히 가능하지만, 딱히 ‘좌파’만 탓할 건 아니란 얘기다.
이미 “차베스 대통령이 95살이 되는 2049년까지 집권할 수도 있을 것”이란 주장이 농담처럼 떠돌고 있다. 현실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차베스 대통령은 집권 초기 자신이 그리는 ‘사회주의 베네수엘라’를 만들어내는 데 적어도 20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 임기는 6년이다. 2012년 대선에서 그가 3선에 성공한다면, 2019년까지 미라플로레스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꼭 20년 집권하게 되는 게다. 지난 2월2일로 집권 10년을 맞았으니, 이제 겨우 반환점을 돈 셈인가?
차베스 대통령 집권 이후 베네수엘라 빈곤층이 전체 인구의 51%에서 28%까지 줄었다는 점은 유엔에 딸린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 연안국가 경제위원회’(ECLAC)도 인정하는 바다. 미 싱크탱크 남아메리카문제연구위원회(COHA)는 2월16일 내놓은 자료에서 차베스 대통령이 주도한 ‘볼리바리안 혁명’의 지난 10년의 성과를 이렇게 정리했다.
“정유업계 국유화와 유가 폭등이 맞물리면서 재정수입이 급격히 늘었고, 이를 ‘사회적 사명’이란 이름으로 투자해 의료·교육·직업교육 서비스가 대폭 확대됐다. 문맹은 거의 사라졌고, 취학률도 차베스 대통령 임기 중 2배 이상 올랐다. ‘사회안정기금’을 통해 퇴직·연금·휴가 등에 대한 지원이 대폭 늘었다. 주당 44시간 노동시간은 36시간으로 줄었고, 초과근무도 강요할 수 없게 됐다. 최저임금도 월 286달러로, 남미 최고 수준까지 높여놨다.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베네수엘라 인구 1명당 사회복지 예산 지출은 3배 이상 늘었다.”
물론 ‘한계’도 명확하다. 세계 제7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는 전체 수출액의 80~90%가 정유산업에 의존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재정 수입의 절반가량을 차지할 만큼 높은 원유 의존도가 차베스 정권 아래서도 바뀌지 않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 집권 직전인 1998년 당시 8달러에 불과했던 베네수엘라산 원유는 지난해 한때 127달러까지 치솟았지만, 하반기 들어 폭락세가 이어지면서 현재 배럴당 40달러 선까지 떨어진 상태다. 이에 따라 지난해 베네수엘라 경제는 전년 대비 3%포인트 떨어진 5.5% 성장하는 데 그쳤다. 유가 폭락세가 이어진다면, 올해는 ‘제로 성장’까지 곤두박질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살인적 인플레에 강력범죄 기승물가상승률은 남아메리카에서 최악의 수준이다. 연평균 30%대를 넘어섰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강력범죄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베네수엘라 센트랄대학에 딸린 ‘평화인권센터’가 최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수도 카라카스에선 모두 2710건의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하루 평균 7건꼴이다. 미국과의 관계도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는 상태까지 치달아 있다. 지난해 9월엔 카라카스 주재 미 대사가 ‘쿠데타 모의’ 혐의로 추방되기도 했다. 문제는 두 나라가 상호의존적이란 점이다. 베네수엘라는 원유 수출량의 6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고, 미국은 원유 수입분의 11%를 베네수엘라에 의존하고 있다. ‘부시의 미국’과 벌였던 극한 대결을 ‘오바마의 미국’과도 이어가는 건 분명 부담스러울 터다.
차베스 대통령의 현 임기는 2013년 2월 끝이 난다. 차기 대선까지는 4년의 세월이 남아 있다. 3선 도전이 가능해졌다고, 세 번째 당선까지 보장된 건 아니다. 개헌으로 ‘장기 집권’으로 가는 문은 열렸다. 그뿐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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