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3월6일 낮 12시6분께 미 국무부 청사에서 정례 언론 브리핑이 시작됐다. 당시 뉴욕을 전격 방문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 사이에 한창이던 북핵 협상에 대한 질문으로 문을 연 이날 브리핑은 곧 두 번째 주제로 옮겨갔다. 미국의 유엔 인권이사회 참여 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숀 매코맥 대변인은 이렇게 답했다.
“지구촌 차원에서 인권이 신장돼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유엔총회나 안보리 차원에선 인권신장 노력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인권이사회엔 참여하지 않겠다. 지금까지의 활동에 비춰 인권이사회는 신뢰할 만한 기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권이사회는 그동안 쿠바나 버마(미얀마), 북한 등 실질적인 (인권침해) 우려가 있는 나라는 간과한 채 이스라엘 문제에만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춰왔고….” 매코맥 대변인은 이어 “인권이사회가 ‘시야’를 넓혀 부여된 사명대로 신뢰할 만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다리겠다”고 덧붙였다.
그로부터 1년 만인 2008년 3월26일 유엔 인권이사회는 18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꾸리고, △주거권 △식량권 △원주민 인권 △어린이 매매·성착취 금지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인권 현황을 조사할 특별보고관을 임명했다. 군사독재 치하의 버마와 점령 아래 놓인 팔레스타인의 인권 상황 조사를 위한 특별보고관을 각각 선임했다. 말하자면 ‘시야’를 넓힌 셈인데, 그럼에도 미국은 지금껏 인권이사회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유는 당시 인권이사회에서 이츠하크 유엔 주재 이스라엘 대사가 한 발언에서 쉽게 확인된다.
“(팔레스타인 인권 특별보고관 임명은) 좋게 말해 불필요하고, 나쁘게 말해 악의적이다. …184명의 후보자 가운데 인권이사회가 선택한 인물은 최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나치의 집단학살에 견주는 게 무책임한 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글을 내놓은 바 있다. 공공연히 반복해서 이런 관점을 밝혀온 인사에게서 독립적이고, 공평하며, 객관적인 보고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문제의 ‘인물’은 국제법 전문가인 리처드 포크 미 프린스턴대 명예교수다. 미 동부 명문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을, 예일대와 하버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포크 교수는 저명한 국제법 전문가이자, 열정적인 사회운동가로 평생을 살아왔다.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이후 핵군축 운동에도 뛰어들었고, 2003년 이라크 침공이 국제법 위반임을 역설하는 노작을 펴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유대계 미국인’이다.
이스라엘은 애당초 유엔 특별보고관의 현장조사조차 허용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럼에도 포크 교수는 지난해 6월 학술회의 참가를 위해 팔레스타인을 찾은 길에 요르단강 서안으로 달려갔다. 이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보고서를 이사회에 제출했다. 이스라엘은 입국금지령으로 엄포를 놨지만, 그는 선선히 물러서지 않았다. 지난해 12월9일 그는 가자지구의 인도적 재난 상황을 우려하는 ‘침묵은 선택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놨다. 18개월에 걸친 봉쇄로 가자 주민들의 삶을 극한으로 몰아간 이스라엘의 행태는 ‘집단학살’을 금지한 국제인권법에 반하는 ‘전쟁범죄’란 게다. 그리고 서둘러 이스라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임박한 파국’을 예감이라도 했던 걸까?
지상군 투입 이후 어린이 사망자 늘어2008년 12월14일 포크 교수가 일행과 함께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당국은 경고한 대로 그의 입국을 불허했다. ‘하마스의 테러를 정당화했다’는 게 이유였다. 는 당시 이스라엘 외교부 당국자의 말을 따 “모든 국가는 특정인의 입국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당국은 포크 교수와 유엔 인권이사회 관계자를 30시간여 구금한 끝에 추방했다. 그로부터 12일 뒤 이스라엘은 “모든 국가는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할 권리가 있다”며 가자지구를 무력 침공했다. 그리고….
가자의 죽음이 기어이 네 자리 숫자를 넘어섰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1월15일 팔레스타인 보건부(MoH)의 자료 내용을 따 “1월14일 현재까지 가자 주민 1013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가운데 322명은 어린이, 76명은 여성이었다”고 전했다. OCHA는 이어 “이날까지 부상자는 모두 4560명, 이 가운데 어린이와 여성은 각각 1600명과 678명에 이른다”며 “지난 1월3일 이스라엘 지상군 병력 투입 이후 어린이 사망자가 이전에 비해 3배 이상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포크 교수가 아니어도, 이스라엘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고발은 도처에서 넘처나고 있다. 이스라엘인권정보센터(B’TSELEM)는 1월13일 긴급 보도자료를 내어 “이스라엘군이 폭격을 피해 백기를 흔들며 대피하던 여성을 포함한 민간인을 사살했다는 증언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가자 남동부 쿠자아 마을 주민 문니르 샤피크 알나자르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아침나절에 라위야 알나자르(50)는 백기를 흔들며 집 밖으로 나왔다. 나머지 식구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갑자기 총격이 시작됐고, 알나자르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가족이나 구조요원 모두 그의 곁에 가서 상태를 살필 수 없었다. 그는 쓰러진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다. …오후 들어 이스라엘군은 스피커까지 동원해 주민들에게 집에서 나와 마을 한가운데 있는 학교로 가라고 했다. 30명가량이 백기를 흔들며 집에서 걸어나왔다. 20m쯤 걸어갔을 무렵, 총격이 시작됐다. 3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여러 명이 총상을 입었다.” 〈BBC방송〉 등 외신들도 앞다퉈 이런 내용을 보도했지만, 이스라엘군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1907년 체결된 제4차 헤이그협정 제56조는 “종교·자선·교육·예술·과학과 관련된 시설을 점령·파괴하거나 의도적으로 손상을 입혀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시 민간인 보호와 관련해 1949년 체결된 제4차 제네바협약 제33조는 ‘집단학살’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겨냥한 것”이라며 가자의 대학과 의료시설, 이슬람 사원에 대한 공습과 포격을 공공연히 지속해왔다. 적신월사 구조요원조차 공격의 표적이 돼 스러졌다. 1월2일엔 북부 자발리야의 유엔학교에 피신해 있던 가자 주민 43명이, 1월5일엔 가자시티 외곽 제이툰 마을에선 사이무니 집안 일가족 30명이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영국 는 1월9일치에서 나바네템 필레이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의 말을 따 “전쟁범죄의 모든 요건을 갖춘 사건”이라고 전한 바 있다.
세계여, 침묵의 카르텔을 깨라하긴, 무차별적인 극한 폭력 자체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가자지구에서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한 결의안 제1860호를 통과시킨 1월8일 이후만 따져도 200명 이상이 숨지고, 1300여 명이 추가로 다쳤다.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안보리 결의안조차 무시당하는 마당에, 명색뿐인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권고의견은 쓸모없다. 이스라엘이 ‘로마협약’에 가입하지 않았으니, 국제형사재판소(ICC)도 무용지물이다. 미국이 원군으로 버티고 있는 한, 특별전범재판소 설치도 난망한 일이다. 해법은 없는 걸까?
1998년 ‘인류’의 이름으로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던 스페인의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에게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침묵의 카르텔을 깨야 한다. 세계 각국이 적극 나서 전범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반인도적 범죄’는 반드시 처벌된다는 지난 세월의 교훈을 되살리는 게, 이스라엘을 스스로에게서 구해내는 길이다. 그래서 새삼 뼈아프다. 유엔 인권위가 1월12일 이스라엘의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표결에 부쳤을 때, 한국 정부는 맥없이 기권표를 던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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