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독립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은 ‘나크바’(대재앙)로 기억하는 1948년이 시작이었다. 1956년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을 때도, 이스라엘군은 영국과 프랑스의 측면 지원을 받아 가자로 탱크를 몰아갔다. 1967년 ‘6일 전쟁’은 무려 38년에 걸친 군사점령으로 이어졌다. 점령이 끝난 지 3년 반여, 2008년 12월27일 이스라엘군이 다시 가자를 때려대기 시작했다. 작전명 ‘캐스트 레드’는 100년 팔레스타인 수난사에서 기실 네 번째 ‘가자 전쟁’인 게다. 가자의 아픔은 역사가 깊다.
긴 아픔의 역사는 비극의 대물림으로 이어졌다. 팔레스타인 난민 3세인 미 언론인 라일라 알아리안이 지난 1월2일 진보적 시사주간지 인터넷판에 소개한 가족사는 그 서글픈 전형이다. 그의 사연을 들여다보자.
“2008년 12월28일 아침, 친구 ‘사파’가 미니홈피에 올린 글을 봤다. 할아버지가 사는 동네에 이스라엘군이 공습을 퍼부었다는 게다. 사파는 가자시티 인구 밀집 지역인 아스쿨라에 사는 할아버지의 이웃이다. 인근 대학가에도 미사일이 날아들어, 귀갓길에 버스를 기다리던 젊은이 7명이 목숨을 잃었단다. 침공 시작 직후부터 할아버지와 통화하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잠시 기다리라’는 기계음만 되풀이된다. 최악의 상황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알아리안은 “할아버지는 반세기 중동 각지를 떠돌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려온 분”이라고 적었다. 1933년생인 그의 할아버지는 5살 무렵 부모를 잃고 누나들 손에서 자랐단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쫓겨난 몇십만 명이 난민이 돼 가자의 해안가로 몰렸다. 유엔이 내미는 식량에만 의지해 살아갈 순 없었다. 고향땅을 떠나야 했다. 이산의 아픔,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는 팔레스타인 자파 출신의 난민인 할머니와 1958년 (쿠웨이트에서) 결혼했다. 외증조부는 이스라엘 민병대의 손에 희생된 팔레스타인 경찰 출신이었다. 할아버지는 사우디로 옮겨가 학교에서 아랍어를 가르쳤다. …고향땅을 떠나온 건 할아버지에게 두고두고 고통이었다.”
아랍 국가 4곳을 전전했지만 팔레스타인 난민 출신에겐 국적을 주지 않았다. 잠시 스쳐가는 ‘경유지’였을 뿐이다. 언제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알아리안의 할아버지는 근검절약해 가자지구 해변가에 한 뙈기 땅도 장만했다. 그 무렵 전쟁 소식이 전해졌다.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이다. 가자로 진격해온 이스라엘군은 주둔지를 만들고 아예 눌러앉았다. 전쟁 이전에 가자지구에 거주하지 않았던 이들은 ‘귀환’할 수 없다는 결정도 일방적으로 발표됐다. ‘가자를 영원히 잃는 건 아닐까.’ 알아리안의 할아버지는 무너져내렸다.
1975년 이집트에 살던 그의 할아버지는 미국행을 선택했다. 의학도를 꿈꾸던 명민한 아들 ‘사미’ 때문이었다. 당시 안와르 사다트 정권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교육 기회를 제한해, 난민 젊은이들이 전문교육을 받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17살에 미국 땅을 밟은 사미는 의학 대신 컴퓨터공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86년 사우스플로리다대학 교수가 됐다. 알아드리안은 그의 맏딸이다.
가족의 비극은 미국 땅에서도 이어졌다. 교수가 된 사미 알아리안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당국의 눈총을 샀다. 미 전역을 돌며 팔레스타인 돕기 모금운동을 벌였고, 이스라엘에 경도된 미국의 대외정책을 강력 비판한 탓이다. 인권운동가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는 사이 미 연방수사국(FBI)은 전담요원까지 붙여 그를 감시했다. ‘위험인물’로 본 게다. 9·11 동시테러는 아랍계 미국인에겐 ‘재앙’이었다. 급기야 2003년 2월20일 미 법무부는 사미 알아리안을 테러조직인 ‘팔레스타인이슬람지하드’(PIJ)의 지도자란 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명민한 아들은 테러조직 지도자 혐의정황 이외의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재판 과정에서 FBI가 그를 10여 년 동안 미행·도청해온 사실도 드러났다. 1심 배심원단은 혐의 사실 대부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지만, 소용없었다. 새로운 재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는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처음 체포된 지 6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는 가택연금 상태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씌워진 가장 최근의 혐의는 ‘법정모독’이란다. 다른 아랍계 미국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라는 당국의 요구를 거부한 탓이다.
“할아버지는 5년 전 가족들의 만류에도 귀향을 선택했다. 가자로 돌아간 할아버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평생 골초로 살아온 분이 담배를 끊었고, 바깥 출입도 즐기기 시작했다. 정원과 화초 돌보기에도 열심을 냈다. 오랜 세월 꿈꿔온 대로 허브차를 마시고, 무화과를 따 먹었다.” 하지만 2006년 하마스의 선거 승리로 알아리안 노인의 삶은 다시 한번 반전을 맞았다. 이스라엘의 가혹한 봉쇄가 시작되면서 생필품 부족 사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지병인 당료약마저 구하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노인은 떠나지 못하고 고향땅을 지켰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일흔여섯, 남은 삶의 무대는 가자일 수밖에 없었던 게다. 라일라 알아리안은 이렇게 썼다.
“어머니께 물었다. ‘할아버지는 빠져나올 수 있을 때, 왜 가자를 떠나지 않으셨냐’고. ‘봉쇄가 시작되기 전, 삶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기 전, 아니 공습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왜 탈출하지 않으셨냐’고.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땅이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할아버지는 언제나 향수병에 시달리셨다’고. ‘가자는 할아버지의 부모님이 묻힌 곳이며, 할아버지도 그곳에서 생을 다하고 싶으신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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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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