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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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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여섯, 이제야 고향 땅인데…


알아리안 가족에 겹치는 팔레스타인 수난사… 집중된 공습에도 할아버지가 가자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등록 2009-01-22 16:52 수정 2020-05-03 04:25

이스라엘이 ‘독립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은 ‘나크바’(대재앙)로 기억하는 1948년이 시작이었다. 1956년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을 때도, 이스라엘군은 영국과 프랑스의 측면 지원을 받아 가자로 탱크를 몰아갔다. 1967년 ‘6일 전쟁’은 무려 38년에 걸친 군사점령으로 이어졌다. 점령이 끝난 지 3년 반여, 2008년 12월27일 이스라엘군이 다시 가자를 때려대기 시작했다. 작전명 ‘캐스트 레드’는 100년 팔레스타인 수난사에서 기실 네 번째 ‘가자 전쟁’인 게다. 가자의 아픔은 역사가 깊다.

‘이것이 전쟁이다. 그래도 떠날 수 없다.’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폐허가 된 가자시티의 거리에서 한 팔레스타인 남성이 망연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REUTERS/ SUHAIB SALEM

‘이것이 전쟁이다. 그래도 떠날 수 없다.’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폐허가 된 가자시티의 거리에서 한 팔레스타인 남성이 망연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REUTERS/ SUHAIB SALEM

아랍4국 거쳐 미국으로… 고난의 디아스포라

긴 아픔의 역사는 비극의 대물림으로 이어졌다. 팔레스타인 난민 3세인 미 언론인 라일라 알아리안이 지난 1월2일 진보적 시사주간지 인터넷판에 소개한 가족사는 그 서글픈 전형이다. 그의 사연을 들여다보자.

“2008년 12월28일 아침, 친구 ‘사파’가 미니홈피에 올린 글을 봤다. 할아버지가 사는 동네에 이스라엘군이 공습을 퍼부었다는 게다. 사파는 가자시티 인구 밀집 지역인 아스쿨라에 사는 할아버지의 이웃이다. 인근 대학가에도 미사일이 날아들어, 귀갓길에 버스를 기다리던 젊은이 7명이 목숨을 잃었단다. 침공 시작 직후부터 할아버지와 통화하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잠시 기다리라’는 기계음만 되풀이된다. 최악의 상황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알아리안은 “할아버지는 반세기 중동 각지를 떠돌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려온 분”이라고 적었다. 1933년생인 그의 할아버지는 5살 무렵 부모를 잃고 누나들 손에서 자랐단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쫓겨난 몇십만 명이 난민이 돼 가자의 해안가로 몰렸다. 유엔이 내미는 식량에만 의지해 살아갈 순 없었다. 고향땅을 떠나야 했다. 이산의 아픔,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는 팔레스타인 자파 출신의 난민인 할머니와 1958년 (쿠웨이트에서) 결혼했다. 외증조부는 이스라엘 민병대의 손에 희생된 팔레스타인 경찰 출신이었다. 할아버지는 사우디로 옮겨가 학교에서 아랍어를 가르쳤다. …고향땅을 떠나온 건 할아버지에게 두고두고 고통이었다.”

아랍 국가 4곳을 전전했지만 팔레스타인 난민 출신에겐 국적을 주지 않았다. 잠시 스쳐가는 ‘경유지’였을 뿐이다. 언제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알아리안의 할아버지는 근검절약해 가자지구 해변가에 한 뙈기 땅도 장만했다. 그 무렵 전쟁 소식이 전해졌다.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이다. 가자로 진격해온 이스라엘군은 주둔지를 만들고 아예 눌러앉았다. 전쟁 이전에 가자지구에 거주하지 않았던 이들은 ‘귀환’할 수 없다는 결정도 일방적으로 발표됐다. ‘가자를 영원히 잃는 건 아닐까.’ 알아리안의 할아버지는 무너져내렸다.

1975년 이집트에 살던 그의 할아버지는 미국행을 선택했다. 의학도를 꿈꾸던 명민한 아들 ‘사미’ 때문이었다. 당시 안와르 사다트 정권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교육 기회를 제한해, 난민 젊은이들이 전문교육을 받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17살에 미국 땅을 밟은 사미는 의학 대신 컴퓨터공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86년 사우스플로리다대학 교수가 됐다. 알아드리안은 그의 맏딸이다.

가족의 비극은 미국 땅에서도 이어졌다. 교수가 된 사미 알아리안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당국의 눈총을 샀다. 미 전역을 돌며 팔레스타인 돕기 모금운동을 벌였고, 이스라엘에 경도된 미국의 대외정책을 강력 비판한 탓이다. 인권운동가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는 사이 미 연방수사국(FBI)은 전담요원까지 붙여 그를 감시했다. ‘위험인물’로 본 게다. 9·11 동시테러는 아랍계 미국인에겐 ‘재앙’이었다. 급기야 2003년 2월20일 미 법무부는 사미 알아리안을 테러조직인 ‘팔레스타인이슬람지하드’(PIJ)의 지도자란 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명민한 아들은 테러조직 지도자 혐의

정황 이외의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재판 과정에서 FBI가 그를 10여 년 동안 미행·도청해온 사실도 드러났다. 1심 배심원단은 혐의 사실 대부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지만, 소용없었다. 새로운 재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는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처음 체포된 지 6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는 가택연금 상태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씌워진 가장 최근의 혐의는 ‘법정모독’이란다. 다른 아랍계 미국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라는 당국의 요구를 거부한 탓이다.

“할아버지는 5년 전 가족들의 만류에도 귀향을 선택했다. 가자로 돌아간 할아버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평생 골초로 살아온 분이 담배를 끊었고, 바깥 출입도 즐기기 시작했다. 정원과 화초 돌보기에도 열심을 냈다. 오랜 세월 꿈꿔온 대로 허브차를 마시고, 무화과를 따 먹었다.” 하지만 2006년 하마스의 선거 승리로 알아리안 노인의 삶은 다시 한번 반전을 맞았다. 이스라엘의 가혹한 봉쇄가 시작되면서 생필품 부족 사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지병인 당료약마저 구하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노인은 떠나지 못하고 고향땅을 지켰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일흔여섯, 남은 삶의 무대는 가자일 수밖에 없었던 게다. 라일라 알아리안은 이렇게 썼다.

“어머니께 물었다. ‘할아버지는 빠져나올 수 있을 때, 왜 가자를 떠나지 않으셨냐’고. ‘봉쇄가 시작되기 전, 삶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기 전, 아니 공습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왜 탈출하지 않으셨냐’고.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땅이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할아버지는 언제나 향수병에 시달리셨다’고. ‘가자는 할아버지의 부모님이 묻힌 곳이며, 할아버지도 그곳에서 생을 다하고 싶으신 것’이라고 말이다.”



합심한 친미 3국
공동전선, 하마스 탓하기


말은 바로 하자. 2007년 6월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분명 ‘쿠데타’였다. 하지만 그 주역은 마무드 아바스 자치정부 대통령 휘하의 파타당이었다. 2006년 2월 자치의회 선거에서 하마스는 파타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뒀지만,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시절부터 권력을 쥐어온 파타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급기야 가자의 파타 잔존세력은 이스마일 하니야 총리가 이끄는 하마스 정부에 맞서 총질을 해댔다. 하마스의 가자 장악은 파타의 쿠데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이뤄진 게다.
1년 반 전의 일을 새삼 들춰내는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 침공의 이유를 이렇게 둘러댄다. ‘하마스가 쿠데타로 가자를 장악한 이후 이스라엘을 겨냥한 로켓·미사일 발사가 급증했다.’ 따져보자. 파타가 가자를 장악하고 있을 때도 이스라엘을 겨냥한 로켓·미사일 공격은 불을 뿜었다. 하마스가 가자를 장악한 뒤에도 파타 계열 무장세력은 곧잘 가자에서 로켓과 미사일을 쏘아올렸다. 모든 책임을 하마스에 떠넘기는 건 명백히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된다.
그런데 아랍 각국이 이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제법 목소리까지 높이는 것은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요르단이다. 절묘하게도, 아랍의 ‘친미 3인방’으로 부를 만한 국가들이다. 공히 이스라엘과 ‘정상 관계’를 맺고 있는 세 나라는 그 면면도 엇비슷하다. 한국의 독재자 전두환과 비슷한 시기에 집권해 팔순을 넘긴 지금껏 철권을 휘두르고 있는 게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다. 리야드의 사우드 왕가는 21세기에도 무소불위 절대왕정이 가능함을 만천하에 증명해준다. 제법 입헌군주국을 자처하는 요르단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원 없이는 왕실의 경제조차 지탱할 수 없는 구조다. 여기서 하마스를 저어하는 공통의 이유가 도출된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최대 정적은 ‘무슬림형제단’이다. 하마스의 뿌리이기도 한 형제단은 지난 2005년 의회 선거에서 갖은 선거부정에도 88석(전체의 약 20%)을 얻으며 약진했다. 이후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공개 활동을 못하고 있지만, 부자 세습의 미망을 못 버리는 무바라크 대통령에겐 눈엣가시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9·11 동시테러 이후 자국 내 이슬람주의 세력의 발호로 비상이 걸렸고, 전체 인구의 4분의 3가량이 ‘팔레스타인계’로 알려진 요르단 역시 비슷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선거를 통한 이슬람주의 진영의 집권, 그 선례를 만들고 있는 가자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게다.
그래서다. ‘급진전’하고 있다는 이집트 주도의 휴전협상이 미덥지 않다. 이스라엘의 침공 직후 이집트 정부는 가자 남단 라파 국경을 꽁꽁 묶어놓고, “모든 비극은 하마스가 자초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휴전의 당사자로 하마스가 아닌 파타를 들먹이기도 했다. 요르단강 서안의 파타 정부 역시 싫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참극을 멈추는 것보다, 가자에서 파타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가자 침공 직후 아바스 대통령은 이스라엘 비난 성명보다 하마스 쪽에 거국정부 구성 제안을 먼저 내놨다. 허울뿐인 아랍민족주의, 그 ‘불편한 진실’의 현주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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