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누가 총성을 울리나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에서 교전 벌이는 타이·캄보디아…
베트남 괴뢰정권 출신 훈센의 ‘반타이 자극하기’의 승리
등록 2008-10-31 14:03 수정 2020-05-03 04:25

캄보디아 서북부 밀림의 당렉 산맥은 타이와 국경을 이룬다.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프놈펜이 함락된 뒤 민주캄푸치아혁명군(크메르루주)은 타이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베트남에 대항한 게릴라 전쟁을 벌였다. 중국과 미국, 타이의 지원으로 크메르루주는 서부 지역을 해방구로 만들 수 있었다. 민주캄푸치아 총리인 폴포트는 배후에 타이 국경을 두고 남쪽으로는 깎아지른 벼랑을 이루고 있는 당렉산을 거점으로 삼았다. 당렉산의 크메르루주는 타목의 쿠데타와 폴포트에 대한 인민재판과 연금, 사망 등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995년 정부군에 투항할 때까지 버텼다.

타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캄보디아 서북부 당렉 산맥 밀림 속에 자리한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지난 7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지만, 갈등의 역사는 그 직후 사원의 평안을 앗아가고 말았다. 정도원 제공

타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캄보디아 서북부 당렉 산맥 밀림 속에 자리한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지난 7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지만, 갈등의 역사는 그 직후 사원의 평안을 앗아가고 말았다. 정도원 제공

세계문화유산 속에서의 싸움

캄보디아 현대사에서 가장 최근의 역사적 상흔인 바로 그 당렉산의 절벽 위에는 ‘프라삿 프레아 비헤아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앙코르 시대의 사원 하나가 1천 년의 세월 동안 묵묵히 비단처럼 펼쳐진 밀림을 내려다보고 있다. 서쪽으로는 버마, 동쪽으로는 베트남에 이르렀던 크메르 제국의 융성기인 앙코르 시대의 사원이다. 지난 7월8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캄보디아의 신청을 받아들여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2008년 총선을 20여 일 앞두고 있던 캄보디아의 집권당인 인민당으로서는 호재였다. 이로써 캄보디아는 2개의 세계문화유산을 갖게 됐다. 이미 3개의 세계문화유산과 덤으로 2개의 세계자연유산을 갖고 있는 이웃나라인 타이가 이를 시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풀리지 않았다. 7월15일 타이는 이 지역으로 특수부대 병력을 급파했고, 캄보디아 또한 수비병력을 증원해 비상한 군사적 대치가 시작됐다. 10월에 들어 3일과 15일 양국 병사들 간의 교전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서가 아니라 적대적 국경 분쟁지역의 하나로 등재됨으로써 국제적 관심을 모았다.

모든 국경분쟁이 그렇듯이 이 무력충돌을 동반한 분쟁 또한 고대 사원 하나의 영유권을 두고 벌인 다툼에 그치지는 않는다. 지리적 분쟁의 원인이야 프랑스 제국주의와 타이가 씨를 뿌렸다. 1867년 프랑스는 캄보디아 서부의 바탐방과 시엠리아프에 대한 권리를 타이에 양도했지만, 1906년에 국경조약으로 되찾았다(같은 시기인 1909년 타이는 영국과의 조약으로 현재의 말레이시아 북부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 그러나 타이는 1940년 이 지역에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군과 벌인 국지전에서 승리했다. 타이 최초의 군부독재자인 피분은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불과 6개월 만에 방콕에 거대한 오벨리스크 전승 기념탑(아눗사와리차이사모라품)을 세워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는 데에 타이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일본에 협력했다. 1953년 캄보디아의 독립 뒤 타이는 다시 이 지역을 무력으로 장악해 영유권을 주장했다. 1953년 분쟁은 캄보디아의 제소를 받아들인 국제사법재판소가 1962년 캄보디아에 영유권이 있음을 판결하면서 일단락됐다.

그러나 2008년의 국경분쟁은 1996년 캄보디아의 훈센 쿠데타에 직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가깝게는 타이의 민주주의인민연대(PAD)의 반정부 투쟁으로 촉발된 것이다. 당렉산 절벽 위의 고대 앙코르 사원을 나와 분쟁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보자.

타이 여배우의 말을 이용하다

1991년 파리평화협정으로 캄보디아 내전은 멈추었다. 크메르루주와 베트남, 괴뢰정권 등이 참여한 협정에 따라 치러진 1993년의 총선은 크메르루주가 보이코트한 가운데 왕당파인 민족주의연합전선 ‘푼신펙’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괴뢰정권을 계승한 인민당(CPP)의 훈센은 무력을 기반으로 푼신펙을 위협해 연정을 구성했다. 푼신펙의 라나리드가 1총리를, 훈센이 2총리를 맡는 기괴한 동거가 시작됐지만, 1997년 쿠데타로 붕괴되고 훈센 군부독재가 성립됐다. 이듬해인 1998년 총선은 공포 분위기 속에 부정선거로 치러져 인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훈센의 철권통치 아래 극심한 부정부패, 정치테러, 빈부격차의 심화 속에 민심은 내연했다. 2003년 선거에서 훈센의 인민당은 무력과 금력을 앞세워 전형적인 부정선거로 승리할 수 있었지만 정통성과 도덕성의 결여에 시달렸다.

1

1

2003년 1월18일 프놈펜의 작은 일간지가 타이의 한 여배우가 “캄보디아가 앙코르와트를 훔쳤다”고 말했다는 사실무근의 기사를 실었을 때 훈센은 주저 없이 이를 이용했다. 일국의 총리가 이웃나라의 한낱 여배우를 공개적으로 맹렬히 비난하며 ‘반타이 정서’를 고무하는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타이 푸미폰 국왕의 초상을 불태우는 대대적인 반타이 시위가 벌어졌고, 급기야 1월29일 프놈펜의 타이 대사관이 ‘폭도들’의 난입으로 불타올랐다. 타이 기업들도 같은 수난을 당했다. 프놈펜의 타이인들에 대한 린치도 자행됐다. 습격받은 타이 기업 중 하나는 당시 타이 총리이던 탁신 친나왓의 회사였다. 프놈펜에서 격렬한 반타이 시위가 계속되면서 타이인들의 캄보디아 탈출이 줄을 이었으며, 방콕에서는 반캄보디아 군중시위가 벌어졌다.

결과적으로는 조작된 보도를 빌미로 크메르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해 반타이 폭동으로까지 발전시킨 훈센의 책동은 캄보디아인들 사이에 만연한 반베트남·반훈센 정서를 희석시켰다는 평가를 얻었다. 캄보디아인에게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캄보디아의 영토를 침탈해온 존재였다. 1979년 침공 이후 베트남이 세운 괴뢰정권에서 외상과 총리를 역임했고, 그 유산을 온전하게 승계한 훈센에게는 자신의 이력이 아킬레스건이었다. 마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이력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도무지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도록 한 오욕의 뿌리였다. 2003년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반타이 폭동으로 캄보디아인들은 이제 증오해야 할 이웃나라를 하나에서 둘로 늘려야 했지만, 괴뢰정권 총리 출신의 훈센은 앙코르와 크메르 민족주의 수호자라는 이미지 조작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2003년의 뒤를 이은 2008년의 분쟁은 프놈펜에서 프레아 비헤아르로 무대를 옮겼다. 이번엔 주도권이 타이에 있었다.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두고 벌어진 분쟁을 조약과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뒤적여 해결하려는 시도는 공허할 뿐이다. 영유권의 뿌리를 그런 식으로 찾으려 한다면 사원 하나가 아니라 시엠리아프와 바탐방을 포함한 캄보디아의 서북부 지역 전체와 말레이시아 북부까지 수렁에 빠져버린다. 이 때문에 분쟁이 촉발된 원인을 찾으려면 역사책이나 국제법을 뒤져서는 고작해야 안개 속을 헤매다 돌부리에 차이게 될 뿐이다.

타이인을 선동한 것은 PAD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대해서라면 캄보디아가 신청서를 제출할 무렵 타이는 이 지역이 국경 분쟁지역임을 강조하고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예심이 확정되고 본심으로 넘겨진 것은 2007년 7월이었다. 2006년 9월 쿠데타 뒤 총선이 실시된 2007년 12월까지 타이는 군정통치 아래 있었다. 세계문화유산 따위에 관심을 둘 때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2008년 8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이를 확정했을 때 들고 일어서 타이인들을 선동한 세력은 일편단심 푸미폰 국왕과 군부에 기대고 있는 PAD였다. PAD는 엉뚱하게 탁신계의 현 정권을 영토를 빼앗긴 무능하고 파렴치한 정권으로 매도하고 나섰다. 2003년 프놈펜의 반타이 폭동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정권 타도의 도구로 재활용한 것이다.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된 7월 이래 PAD는 틈만 나면 이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현 정권을 비난할 거리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PAD는 반캄보디아 선동으로 푸미폰 국왕의 초상화를 불태운 2003년 프놈펜의 폭동을 환기시킬수록 왕정주의의 깃발을 더욱 높이 치켜들 수 있다. 어이없게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불거진 반캄보디아 정서에 타이군은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여 국경으로 병력을 보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훈센도 핏대를 올렸다. 10월의 무력충돌에 대해 훈센은 “이 싸움은 죽고 사는 문제”라는 과격한 용어를 구사하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캄보디아 북부 안롱벵으로 가는 길에선 오랜 내전의 상흔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민주캄푸치아혁명군의 공세로 파괴된 정부군의 탱크가 안롱벵 외곽에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다. 유재현

캄보디아 북부 안롱벵으로 가는 길에선 오랜 내전의 상흔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민주캄푸치아혁명군의 공세로 파괴된 정부군의 탱크가 안롱벵 외곽에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다. 유재현

2005년 10월 훈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이 꾸준히 요구해왔던 국경조약에 서명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국경을 확정짓는 조약이었다. 훈센은 이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캄보디아인들의 역사적 정서에서는 매국노나 다를 바 없는 인물로 낙인찍혔지만, 베트남 괴뢰정권 출신의 훈센으로서는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훈센이 캄보디아의 또 다른 이웃나라인 타이에 대해 줄곧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우고 호전적 발언을 내뱉는 이유는 자신에게 덧씌워진 친베트남이라는, 캄보디아인에게는 매국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독재권력의 부재한 정통성을 호도하기 위해서다.

군사적으로 캄보디아는 타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약소국이다. 한때 크메르루주 게릴라였으며 베트남의 캄푸치아구국전선 장교였던 훈센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1950년대부터 미국의 전폭적인 군사지원을 받아가며 성장한 30만 병력의 타이군과 그 군사력을 능가할 나라는 동남아시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하물며 녹슨 AK47 소총을 어깨에 메고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서북부의 캄보디아 정부군이 타이군의 무력을 막아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군사적으로 훈센이 믿고 있는 유일한 보루는 역시 동남아시아 최강의 군사 국가 중 하나인 베트남이다. 타이도 그걸 알고 있다. 타이가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크메르루주를 지원한 것은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훈센의 치졸한 불장난이 종국엔 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턱없이 높일 가능성이 있다는 걸 시사한다.

훈센과 왕정주의자의 민족주의

분쟁의 씨앗은 독재정권 유지에 눈먼 훈센이 민족주의를 빌미로 삼아 뿌렸고, 군부를 포함한 타이 왕정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내걸고 이를 이용하는 와중에 턱없이 심화되고 있다.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에는 전쟁의 피비린내가 가신 지 고작 17년 만에 다시 총성이 울려퍼지고 지뢰가 터지고 있다. 현대 세계사에서 어떤 지역보다 전쟁이 깊은 상흔을 남겼던 인도차이나의 한구석에 전쟁 도발을 불사하는 야만의 불장난이 벌어지고 있다. 총성을 울리는 자는 누구인가.

방콕(타이)·안롱웽·프놈펜(캄보디아)=글·사진 유재현 소설가 hyoooo@hanmail.net

*‘유재현의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는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