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 없이 좋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왠지 싫은 사람이 있다. 싫은 사람은, 하다못해 밥을 많이 먹어도 밉상이다. 선입견임을 알면서도 고치기 쉽지 않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한번 싫어지면 바뀌기도 쉽지 않다. 그리고 ‘비호감’은, 대체로 시간이 갈수록 증폭된다. 이른바 ‘낙인 효과’다.
사회학에선 특정 부류의 사람에 대한 편견의 정도를 가늠할 때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 부류의 사람 자녀와 당신 자녀가 친구가 돼도 좋은가?’ ‘그 부류의 사람이 이웃에 이사와도 괜찮은가?’ ‘그 부류의 사람을 며느리(또는 사위)로 맞이할 수 있겠는가?’ 좀더 직접적으로 묻기도 한다. ‘그 부류의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겠는가?’ 쉽게 답을 하기 어려울 게다. 비슷한 질문을 지금 미국 사회가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
“테러리스트~!” “죽여라~!” 존 매케인 미 공화당 대선 후보 유세장에서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 후보 이름이 들먹여질 때, 몰려든 인파 사이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절규’다. ‘투표 제대로 하자. 백인에게 투표하자.’ ‘오사마(오바마를 빗댄 말)나 후세인(오바마 후보의 중간 이름)에게 투표하지 맙시다.’ 백인들이 몰려사는 한적한 동네 어귀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는 문구다. 민주당이 미 인권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내겐 꿈이 있습니다’란 연설을 한 지 꼭 45주년을 맞은 지난 8월28일 사상 처음으로 흑인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는 사실이 무색해진다. 그 후보의 당선이 유력한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10월17일 현재 대통령 선거일까지 남은 기간은 고작 열여드레. 미국 사회는 과연 흑인 대통령을 맞을 준비가 돼 있을까?
지난 9월20일 〈AP통신〉은 흥미로운 여론조사 결과를 내놨다. 통신이 스탠퍼드대학에 맡겨 8월27일부터 9월5일까지 미 전역에서 성인 남녀 2227명을 면접 조사한 내용을 분석한 게다. ‘오늘 대선이 치러진다면 어떤 후보를 지지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응답자의 40%가 민주당 오바마 후보를, 35%가 공화당 매케인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고 답했다. 갤럽을 포함한 대다수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당시 내놓은 여론 추이와 비슷했다.
이어 질문이 던져졌다. ‘오바마 후보가 당선되면 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다. 이런 사실이 오바마 후보에 대한 당신의 지지 의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전체 응답자의 9%가 ‘오바마 후보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고 답했다. ‘오바마 후보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응답도 9%로 동률을 이뤘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응답자 중 백인만 추려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는 응답은 6%에 그친 반면,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응답은 10%에 이르렀다. ‘인종 편견’이 오바마 후보의 잠재적 지지층 4%를 잠식할 수 있다는 방증이다.
인종차별주의자로 비춰질까 ‘부동층’〈AP통신〉은 “민주당 지지 성향의 백인 응답자와 지지 정당이 없다고 밝힌 백인 응답자들 가운데 3분의 1가량은 흑인에 대해 ‘게으르다’거나 ‘폭력적’이라는 등 부정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는 지난 2004년 대선 때처럼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면,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오바마 후보가 흑인이란 이유만으로 대선에서 패할 수 있다는 얘기”라고 전했다. 2004년 대선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과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득표율 차이는 불과 2.4%였다.
‘인종차별주의자 없는 인종차별.’ 는 10월5일치 기사에서 오바마 후보가 직면한 난관을 이렇게 표현했다. 신문은 “보수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어차피 민주당 후보에겐 표를 주지 않을 것”이라며 “오바마 후보에게 치명적인 것은 평소엔 인종평등을 말하며 흑인 대통령 탄생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말하는 (민주당 지지층) 백인 유권자들의 무의식적 차별”이라고 지적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백인 후보 지지 의사를 굳히고도, 인종차별주의자로 비춰질까 두려워 ‘부동층’ 행세를 하기도 한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실제로 백인 후보와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 후보가 출마한 선거에서, 미 백인 유권자들은 종종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선 흑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답하면서도 실제 투표장에 가서는 피부색이 같은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게다. 이른바 ‘브래들리 효과’다. 이 개념은 198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토머스 브래들리(1998년 사망) 전 로스앤젤레스 시장이 여론조사에서 줄곧 앞서고도 정작 선거에선 백인 후보에게 석패한 뒤 만들어졌다. 이후 흑인 후보가 출마한 주요 선거 때마다 브래들리 효과는 미 정가에서 적잖은 논쟁을 불렀다. 다가오는 대선에서도 브래들리 효과는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공화당 소속 여론조사 전문가 닐 뉴하우스는 10월12일 와 한 인터뷰에서 “브래들리 효과는 20여 년 전의 현상”이라며 “이젠 문제될 게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여론조사 기법이 발전해 숨겨진 브래들리 효과를 꼬집어낼 수 있게 된데다, 무엇보다 미국 사회에서 인종 편견이 옅어졌다는 게다.
‘역브래들리 효과’ 나타날 수도지난해 12월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이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당시 조사에서 “흑인 후보자에겐 절대 투표하지 않겠다”는 백인 응답자는 전체의 5%에 불과했다. 갤럽이 1989년 실시한 같은 여론조사에선 응답자의 19%가, 50년 전인 1958년 조사에선 58%가 각각 “흑인에겐 절대 표를 주지 않겠다”고 답한 바 있다.
심지어 ‘역브래들리 효과’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워싱턴주립대 앤서니 그린왈드·배서니 앨버트슨 교수 연구팀은 지난여름 민주당 대선 후보 당내 경선 과정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내놨다. 연구팀은 당시 보도자료에서 “뉴햄프셔·캘리포니아·매사추세츠 등 상대적으로 흑인 인구가 적은 3개 주에선 오바마 후보에 대한 지지 여론이 실제 득표율보다 과장돼 나타나는 등 브래들리 효과는 여전히 건재하다”면서도 “하지만 흑인 인구가 많은 사우스캐롤라이나·앨라배마·조지아주 등 3개 주에선 되레 오바마 후보에 대한 지지 여론보다 실제 득표율이 더 높게 나타나는 등 ‘역브래들리 효과’가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특히 흑인 인구가 적은 위스콘신주에서도 ‘역브래들리 효과’를 관찰할 수 있었다고 연구팀은 덧붙였다. 세월은 흘렀고, 세상도 바뀐 게다. 그런가?
“여론조사 결과가 틀리는 이유는 지지 후보를 거짓으로 말하는 응답자 때문이 아니라, 여론조사 참여 자체를 거부하는 응답자들 때문이다.” 앤드루 코허트 퓨리서치센터 회장은 최근 와 한 인터뷰에서 “여론조사 참여를 거부하는 이들 대부분이 인종 편견이 심한 부류들”이라며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일수록 여론조사 참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갤럽이 10월16일 내놓은 여론조사를 보면, 오바마 후보(49%)는 매케인 후보(43%)를 6%포인트 차로 앞서고 있다. 반면 지지 후보가 없다거나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밝힌 응답자는 전체의 8%로 나타났다. 11월4일 치러질 미 대선 결과를 예측하는 건 부질없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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