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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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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세계의 풍경] 대중 조직자, 역사의 기록자

등록 2008-08-22 00:00 수정 2020-05-03 04:25

영국 정유공장 봉쇄 시위의 불길을 당긴 것은 휴대전화, 21세기형 새로운 시위문화의 등장

▣ 런던(영국)=글·사진 이보영 전문위원 borongs@borongs.net

한국과 마찬가지로 최근 영국에서도 기름값 폭등으로 화물운송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기름값과 관련한 시위가 일어날 때마다 영국 언론이나 시민들은 2000년의 ‘악몽’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그와 동시에 연상되는 게 바로 ‘휴대전화’다. 중요한 순간마다 휴대전화가 그 ‘존재감’을 알리는 현상이 벌써 몇 년째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휴대전화는 대중을 조직하고 역사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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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뜻미지근했던 여론의 반응이…

지난 2000년 9월 초 기름값이 1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올랐을 때, 영국의 농민·트럭 운전기사·택시기사들은 분노로 끓어올랐다. 이들은 “기름값의 80%가 세금이며, 이같은 세율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강조했지만, 여론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얘기였던 탓이다. 하지만 이내 상황이 달라졌다. ‘농민행동’이란 급진적인 농민단체 회원 100여 명이 주요 정유공장 1~2곳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정유공장 봉쇄 시위는 시간이 갈수록 탄력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전역의 정유공장을 2천여 명의 성난 시위대가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정유공장 봉쇄 시위의 위력은 강력했다. 전국 병원에선 ‘적색경보’를 발령하고 응급실을 제한적으로 운영하는 한편 수술 일정을 줄줄이 취소했다. 유통 마비가 우려되면서 사재기가 번지고 일부 점포에선 아예 빵과 우유 등 생필품 판매를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버스회사는 운행을 감축했고, 학교들도 잇따라 휴교에 들어갈 정도였다. 말을 타고 출근하는 이들까지 나오기에 이를 정도로, 그야말로 전국이 마비되기 시작한 게다.

영국 농민연합 중앙위원이자 ‘농민행동’을 이끌던 리처드 해덕은 당시 〈BBC〉와 한 인터뷰에서 정유공장 봉쇄시위가 “마치 눈덩이가 불어나는 듯했다”고 말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유공장 봉쇄운동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그 일등 공신이 바로 휴대전화였다. 무수한 휴대전화가 만들어낸 ‘네트워크’는 21세기형 시위문화를 만들어내며, 영국 정부와 경찰의 진압작전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버렸다.

2005년 7월7일, 런던 지하철에서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했을 때도, 휴대전화는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현장을 생생하게 전한 것은 전문 언론인이 아니었다. 승객들이 연기가 자욱한 지하터널을 줄지어 빠져나오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애덤 스테이시라는 평범한 시민이 휴대전화로 촬영한 것이었다. 전세계 대부분의 언론이 스테이시의 블로그에서 이 동영상을 내려받아 보도했다. 그날 공영방송 〈BBC〉는 2만2천여 개 전자우편과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제보를 받았으며, 300여 건의 사진과 동영상 파일도 전해졌다. 이 가운데 50여 장의 사진은 첫 번째 폭탄이 터진 지 1시간 이내에 도착했단다.

해피하지 않은 ‘해피 슬래핑’

이후 중요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평범한 시민들이 찍은 사진과 동영상은 영국 언론의 중요한 정보 원천으로 자리를 잡았다. 〈BBC〉는 아예 ‘인터액티브 팀’을 만들어 밀려오는 평범한 시민들의 휴대전화 사진이나 동영상 제보를 처리하고 있다. 〈BBC〉는 요즘도 하루 평균 1만여 통의 전자우편과 문자 메시지, 일주일에 200여 장의 사진 제보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휴대전화가 ‘역사적 순간’만 기록하는 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아무나 골라 폭행하는 장면을 휴대전화로 찍어 인터넷에 올려 돌려보는 이른바 ‘해피 슬래핑’ 현상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2005년 초부터 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해피 슬래핑’은 갈수록 정도를 더해, 급기야 올 2월엔 폭행 장면을 휴대전화로 찍어 친구들과 돌려본 10대 소녀가 사상 처음으로 기소됐다. 문명의 ‘이기’는 곧잘 ‘흉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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