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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세계의 풍경] ‘짬뽕’ 문자메시지에 대략난감

보급율 130.6% 싱가포르, 영어 방언 ‘싱글리시’로 그들은 왜 ‘키아시’를 날리는가
등록 2008-08-22 00:00 수정 2020-05-03 04:25

▣ 싱가포르=글·사진 최은주 전문위원flowerpig130@hanmail.net



‘상상 불허!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 우린 어떻게 약속을 하고 또 만났을까?’
내 손 안의 세상, 휴대전화가 지구촌을 바꾸고 있다. 다문화에 기반한 변종 문자 메시지가 날아다니는가 하면,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대규모 시위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휴대전화가 만들어가는 커뮤니케이션의 신세계, 지구촌 곳곳의 다양한 휴대전화 문화를 해외 전문위원들의 생생한 현장 취재로 살펴본다. 편집자



“슈다라?”(Shuda la·다 끝마쳤어?)
“하우 어바웃 2데이 에스티시?”(How about 2day STC·오늘 주식은 어때?)
“볼레라, 토몰로?”(boleh lah, tomolo·내일 할 수 있겠어, 없겠어?)
중국 상하이 출신 장우엔(26)은 직장 상사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해독’하느라 진땀을 빼곤 한다. 그는 지난해 싱가포르의 ‘데이비드 융 앤드 코팩’(David Yeung & Co Pac)이라는 회계법인에서 일을 시작했다. 모국어인 중국어는 기본이고 영어도 잘하지만, “동료나 직장 상사가 보낸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고 토로했다. 왜 그럴까?

‘싱글리시’(Singlish) 때문이다. 싱글리시란 말레이어·만다린어가 뒤섞인 싱가포르 지역의 영어 방언이다. 장우엔의 상사가 보낸 문자 메시지 중 ‘슈다라’ ‘볼레라’ 등은 말레이어에서 파생된 단어다. 그는 “영어 단어를 축약해 문자를 보내도 이해를 잘 못하겠는데, 싱글리시 단어를 줄여 문자로 보내면 이해가 너무 안 돼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휴대전화에 6개 이상 언어 내장

장우엔의 ‘당혹감’에도 아랑곳없이, 싱글리시 문자 메시지는 싱가포르의 휴대전화 문화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왜 이런 ‘짬뽕 문자’ 휴대전화 문화가 형성된 걸까? 싱가포르는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중국인과 말레이인(14%), 인도인(9%), 기타 인종(2%)으로 구성된 ‘다인종·다문화’ 사회다. 게다가 많은 외국인들이 싱가포르를 방문하면서 싱가포르의 문화적 다양성을 더욱 촉진해왔다. 싱가포르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 5월 한 달에만 싱가포르를 방문한 외국인은 82만8천 명에 이른다. 이는 이웃 국가인 말레이시아를 찾은 방문자 5만2천 명보다 약 16.6배나 많고, 싱가포르 전체 인구의 20%에 육박하는 엄청난 수치다. 다양한 인종의 언어가 뒤섞인 혼성어가 문자 메시지로 표현되는 이유다.

이런 인종적 다양성을 고려해, 싱가포르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휴대전화에는 영어·중국어·말레이어·타밀어는 기본이고 베트남어·타이어 등 6개 이상의 언어가 내장돼 있다. 그래서 다양한 언어로 해외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게 싱가포르에서는 흔한 일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는 오거스티나 사디킨(27)은 “말레이시아에 있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말레이어로 거의 매일 문자를 보낸다”며 “자주 국제 문자를 보내지만 한 달에 문자 사용료는 3달러(약 2천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싱가포르 사회가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도 친절하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휴대전화 번호를 건네기도 한다. 싱가포르국립대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샤오홍창(23)에게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친구가 많다. 비결은 간단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거리낌 없이 휴대전화 번호를 주고받아 꾸준히 연락한 덕분”이라는 게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있기에 더 조심하고, 지켜야 할 것도 많다. 싱가포르 변호사인 제이 리(30)는 “자신과 피부색·종교·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실수로 상처주는 말을 할 수도 있고, 싸움이 일어나기도 쉽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문자 메시지를 잘못 보내면 실수가 증거로 남을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 신중히 작성해 보낸다”고 말했다.

의사소통 수단보다 게임기구

사업가 클라렌스 차이(40)는 “솔직히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인종이 있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살려면 상대방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싱가포르 사람들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고, 100% 자유가 허용되지 않아요. 안 그러면 혼란에 빠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일까. 싱가포르에선 휴대전화 에티켓도 엄격한 편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사우스웨일스대에서 유학 중인 스튜어트 찬(25)은 “처음 오스트레일리아로 유학 갔을 때, 휴대전화 예절이 싱가포르와 달라서 많이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지하철 안에서도 큰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시끄러운 휴대전화 벨소리를 진동형으로 바꾸지 않는다”며 “이는 싱가포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는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기보다 주로 게임을 한다. 외국인에겐 특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싱가포르 폴리테크닉학교가 15~27살 싱가포르 학생 2025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2007년 12월 펴낸 ‘싱가포르 청년들의 구매 성향’ 보고서를 보면, 응답자의 59.6%가 휴대전화를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하기보다는 게임, 카메라, MP3 등 다른 용도로 즐기는 것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또 조사 대상자의 80%가 휴대전화를 하루 평균 2.5시간씩 사용하고, 휴대전화가 없으면 극심한 상실감과 불안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휴대전화 사용이 싱가포르 사람들의 취미이자 놀이가 된 것이다.

이처럼 휴대전화가 싱가포르의 엔터테인먼트 문화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뭘까?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인구도 자원도 부족하다. 외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반면 대내적으론 자유가 통제돼 있다. 그래서 한국처럼 휴대전화를 이용해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는 일 따위는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일상은 답답하고, 삶은 지루하다. 이런 싱가포르인들에게 휴대전화가 작은 위안거리를 제공해주는 셈이다. 지난 4월 말 현재 싱가포르의 휴대전화 보급률이 인구 대비 130.6%,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전체 인구 458만여 명보다 141만여 명 많은 599만4천여 명에 이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정보기술(IT) 강국’인 한국의 휴대전화 보급률은 92.2%에 ‘불과’하다.

죽을까봐 두려워…

‘키아수’(Kiasu·잃을까봐 두려워), ‘키아시’(Kiasi·죽을까봐 두려워).

싱가포르 사람들이 즐겨 보내는 대표적인 싱글리시 문자 메시지다. 겉으로는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는 싱가포르에 사는 그들이 뭐가 그리도 겁나고 두려운 걸까? 개방적인 듯 조심스럽고, 다양한 듯 제한된 싱가포르의 휴대전화 문화에서 그 대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싶다.



신제품 보급이 느린 독일

휴대폰은 꺼두시면 좋습니다




▣ 본(독일)= 글·사진 최영미 전문위원 dop80@hanmail.net

지난 6월 한 달을 뜨겁게 달군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8)를 앞두고 독일에서 새로운 휴대전화가 출시됐다. 이름하여 ‘TV-Handy’. 한국의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폰’과 마찬가지로 들고 다니며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휴대전화다. 출시 시점에 맞춰 ‘휴대전화로 텔레비전을 별도의 추가 사용료 없이 시청할 수 있다’는 광고(사진)가 거리 곳곳에 내걸렸고, 축구 열기가 한창이던 지난 6월 내내 ‘TV-Handy’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한국에선 이미 몇 년 전에 출시돼 대중화한 서비스가 첨단기술을 주도하는 독일에서는 이제야 소비자에게 선보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왜 그럴까?
이유는 뜻밖에도 간단하다. 독일의 한 이동통신 업체 관계자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독일은 신기술·신제품의 파급 속도가 언제나 느리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신제품보다는 기존에 쓰던 제품이 “손에 익어 쓰기 편하다”고 말한다. 독일인 특유의 몸에 밴 절약습관도 한몫을 한다. 해서 독일에서는 아직도 구형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또 한국의 지하철에선 사람들이 휴대전화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문자 메시지를 전송하고 게임을 즐기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띄지만, 독일에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이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책이나 신문을 보는 ‘전통적인 풍경’이 여전하단 얘기다.
독일에서도 휴대전화의 주 이용 고객은 젊은 층이다. 이동통신 업체들은 이들을 겨냥해 학생요금제·무료통화제 등 다양한 요금제를 들고 나와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10대와 20대에게 휴대전화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이 됐다. 끊임없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대는 모습도 한국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독일에선 아직까지도 지하로 들어가면 휴대전화 사용이 불가능하다. 대학의 도서관 등에는 전파 차단 장치를 설치해 휴대전화 사용이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어놓기도 했다. 한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광고 카피처럼, ‘잠시 휴대전화를 꺼두셔도 좋다’는 말은 독일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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