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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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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좌파의 새 이름, 가르시아

등록 2001-04-24 00:00 수정 2020-05-02 04:21

페루대선 톨레도 위협하는 ‘빛나는 2위’… 후지모리에 대한 실망감으로 좌파 정책 기대 확산

4월8일 치러진 페루대선 1차전의 진정한 승자는 누구일까. 알레한드로 톨레도(55) 후보인가. 득표율로만 보면 톨레도가 1위다. 그러나 50%를 못 넘기고 득표율 1, 2위 후보끼리 붙는 2차전까지 가게 됐다.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일본으로 도망간 지 5개월 만에 치러진 대선 1차전의 실제적인 승자는 전직 대통령 알란 가르시아(51) 후보로 꼽힌다. 대선 유세 기간중 줄곧 지지율 2위를 달리던 국민단합당(UN)의 여자 변호사 로우르데스 플로레스(41) 후보를 가까스로 제친 가르시아에겐 ‘부활’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말 그대로 ‘빛나는 2위’다. 지난 10년간 가르시아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가르시아 정권은 미 공화당이 망쳤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1985∼90년은 시간대마다 올라가는 천문학적 인플레, 긴 식량배급줄, 극좌 테러리스트들의 폭탄테러, 해외채무의 일방적 동결선언 등 긍정적인 것보다는 정책실패와 악몽으로 기억된다. 92년 후지모리 정권이 군부를 동원해 의회기능을 정지하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가르시아를 부패혐의로 체포할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콜롬비아로 망명을 떠났었다. 그런 가르시아가 9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지난 1월 돌아왔을 때 재기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귀국에 때를 맞춰 대선출마를 밝힐 때도 그저 구정치인의 ‘직업적인 호기심’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정치평론가들의 예상을 깼다. 오는 5월27일 또는 6월3일에 치러질 페루대선 2차전에서 과연 가르시아는 톨레도를 누를 것인가.

알레한드로 톨레도는 페루 민주화에 나름대로 커다란 지분을 지닌 인물이다. 2000년 봄 대선에서 야당 연합후보로 출마,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3선 고지를 막으려 했다. 공정한 투개표가 이뤄졌다면 지금 대통령궁에 들어가 있을 정치인이다. 후지모리의 석연치 않은 3선 후유증으로 페루가 정치위기에 휩싸였던 지난해 8월, 리마 현지에서 필자와 만났던 톨레도는 “진정한 승자는 바로 나 톨레도”라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그에게 동정적인 국제여론에 힙입어 톨레도는 촐로(인디오) 바람을 일으키며 후지모리 10년 권력아성에 줄기차게 도전했다. 결과론이지만, 도전 6개월 만에 후지모리 정권의 몰락에 기여했다. 톨레도는 후지모리 정권을 몰아낸 1등 공신이란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아 마땅하다. 톨레도의 입장에서 보면, 가르시아는 민주화에 한 일이 없다. 자신이 힘들여 이룩한 페루 민주화 마당에 가르시아가 숟가락 하나 얹으려 한다는 불편한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가르시아로선 할말이 없지 않다. 그에게는 정치헌금과 관련된 뇌물수수 혐의가 따라다녀 귀국길이 어려웠다. 후지모리 정권에 대항하고 싶어도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대법원에서 부패혐의에 대한 무혐의 판결이 내려진 것은 올 1월이었다. 가르시아는 한마디로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의 재임기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엇갈린다. 85년 좌파 성향의 그가 36살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희망의 정치인’으로 불렸다. ‘남미의 케네디’란 이름도 얻었다. 서민가계를 살리고 경기부양책을 추진했던 그는 그러나 국고가 바닥나는 상황에 부딪혀야 했다. 가르시아의 은행 국유화 계획과 수출액의 10% 한도 안에서 외채를 갚는다는 조건부 상환 선언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과의 관계단절을 가져왔다. “좌파 성향의 가르시아 정권을 망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당시 레이건-부시로 이어지는 미 공화당 정권의 정책이었다”는 게 페루 가톨릭대 하비에르 이구이니 경제학 교수를 비롯한 페루 지식인들의 대체적인 진단이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휴먼 세계화’

90년 가르시아가 물러날 때는 7000%의 인플레와 빵, 설탕 등 생필품을 사려는 기다란 줄에 줄서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 돼버렸다. 페루경제의 불안은 ‘빛나는 길’ 같은 극좌 게릴라운동의 성장을 낳았다. 국가예산의 40%를 차지하던 국방비를 줄이고 인사개혁을 통해 군부의 힘을 빼려던 가르시아는 말기에는 군과 경찰에 의존하게 됐고, 은밀히 미 CIA와 내통해오던 군부는 가르시아 축출을 꿈꾸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가르시아 집권말기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4월8일 대선 1차전에서 보여준 선전은 10년 전의 ‘정치적 사망선고’를 뒤집는 결과다. 가르시아는 그의 이미지를 3개월 남짓한 사이에 믿을 수 있는 정치인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가르시아의 비판자들은 “그가 2위를 한 것은 유권자들의 얕은 기억력 때문”이라 말한다. 그러나 많은 정치평론가들은 전임 후지모리 정권의 부패와 기존 정치권에 환멸을 느껴온 유권자들에게 가르시아가 호소력 있게 다가섰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카리스마가 있고 대중연설에 능한 가르시아는 고용창출, 임금인상, 농업은행 창설을 통한 저리융자 등을 약속했다. 그는 미국과 서유럽 자본에 페루 기간산업을 팔아넘긴 후지모리의 개방정책을 강도높게 비판, 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가르시아의 선전은 페루 국민들이 후지모리 정권에 느낀 실망감의 반사이익이기도 하다. 후지모리 정권은 입만 열면 “우리는 전임 가르시아 정권 시절의 천문학적 물가를 잡았고, 테러리스트들을 잡았다”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후지모리는 독재와 부패를 저질러왔고 페루경제의 빗장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결과는 비싼 전기전화료 청구서가 상징한다. 후지모리가 선전해온 ‘경제 기적’을 뒷받침해주던 경제발전 지표도 거짓임이 드러났다. 후지모리가 도입한 경제발전 모델에 대한 회의, 무엇보다 가르시아의 실정이 후지모리에 의해 과대포장됐다는 인식은 페루 국민들이 가르시아에게 표를 던진 배경이다. 가르시아는 내년에 페루가 갚아야 할 외채 21억달러를 17억달러로 줄여 갚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미국과 서유럽 일부 국가가 중심이 되어 세계경제를 재편하는 이른바 세계화(globalization)에 반대한다. 그 대신 ‘휴먼(human) 세계화’를 주장한다. 그러려면 단순히 시장경제논리에 국민을 내맡길 게 아니라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경제에 대한 그의 뿌리깊은 불신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러면서 톨레도를 “후지모리와 다를 바 없는 시장경제주의자”로 몰아붙인다.

가르시아의 등장은 이제는 거의 소멸한 남미좌파의 부활을 뜻한다. 가르시아는 미국 등 투자가들에게는 혐오와 놀라움의 대상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 중남미 국가지도자들에게 “우리 모두 연대해 외채상환을 제한하자”고 호소한 바 있다. 그는 페루은행을 국유화하려 했다. 가르시아의 집권은 남미를 지배하고 있는 시장경제바람에 대한 역풍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대선 1차전 결과 톨레도와 가르시아의 대선 2차전이 불가피한 것으로 나타나자, 4월9일 리마 주식시장은 2% 떨어졌다. 이는 후지모리의 부패 스캔들이 불거진 지난해 가을 이래 최대의 낙폭이었다. 모건 스탠리 같은 투자금융회사들은 “톨레도와 가르시아의 2차전이 접전을 벌이면 벌일수록 투자자본의 이탈 속도가 빠를 것”이라 분석한다. 대선 2차전에서 가르시아의 승리가 예상되는 시점부터 페루 채권시장이 곤두박질 칠 것으로 보고 있다. 남미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따라서 가르시아가 안고 있는 숙제다. 그는 페루주재 미국 대사 존 해밀턴과의 조찬회동에서 “외국투자가들이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했다. 요점은 “외국투자가들이 나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언론을 통해 전달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는 ‘안정된 경제’를 강조한다. 그의 재임 기간에 있었던 여러 변혁적인 조치에 대한 기억과 그로 인한 국민들의 불안감을 지우겠다는 태세다. 가르시아는 자신의 실정을 인정하면서 “그로부터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다. 유권자들에게 좀더 성숙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지지율 앞서는 톨레도의 불안

지금까지의 지지율로만 보면 톨레도가 여전히 앞선다. 페루 최초의 인디오(촐로)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톨레도에겐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그 자신은 부인하지만 사생아인 딸을 버렸다는 혐의, 그리고 몬테시노스에게 납치돼 복용했다는 마약 시비다. 이는 2차전에서도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듯하다. 톨레도의 조직적이지 못하고 방만한 경제공약도 가르시아로선 득표에 도움이 되고 있다. 톨레도는 빠른 경제성장과 고용안정을 약속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청사진이 없다는 평가다. 게다가 가르시아는 달변가다. 일단 그의 논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그의 지지자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가르시아는 톨레도에게 거듭 “우리 토론하자”고 하지만, 톨레도는 피하고 있다. 귀국 석달 만에 대선 1차전을 치르며 가르시아의 공세는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페루정치의 휘발성을 고려할 때 톨레도가 외국투자가들의 희망대로 가르시아를 누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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