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사이클론 나르기스 그후…버마 군부는 현지 민간구호팀을 구속하고 세계 지원의 손길은 턱없이 부족하고
▣ 랑군·초욱탄(버마)·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오늘 아침 우리의 혁명을 봤죠? 사진도 찍었고요?”
버마(현 미얀마) 랑군(현 양곤) 시내 민족민주동맹(NLD) 당사 한켠에서 눈매 고운 청년이 진지하게 입을 연다. 지난 6월19일 아웅산 수치의 63번째 생일을 맞아 ‘정치범 자녀 지원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던 사무실 안에서 카메라를 든 우리는 눈이 맞았고 말을 텄다. 혁명? 그 거창한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지 몇 초간 골몰했던 머리는 금세 오전에 있었던 작은 시위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게 무슨 혁명이냐?’고 되물을 수 없었던 건 지금 이 땅이 버마이기 때문이다.
100명가량이 모인 혁명
5명 이상이 모일 수 없는 나라에서 그날 오전 100명가량이, 심지어 옥외에서 결집했다. 조금씩 차도로 발을 옮기기까지 했다. 사방에서 내리쬐는 ‘특별 지부’(사복요원)의 눈길 탓에 본의 아니게 이들을 찾아내려 눈알을 굴리게 되는 버마지만, 그 아침만큼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 당사 건너편에 상주하며 ‘적들’의 움직임을 뚫어져라 감시하는 사복요원들은 물론 더 많은 정보요원들이 매우 티나게 배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스완아센’(‘권력을 지닌 자들’이라는 뜻) 같은 정부 행동대원들까지 6대의 트럭을 타고 출동해 시위대와 충돌했다. 시위와 생일잔치를 망치러 온 그들은 10여 명의 시위대를 잡아갔다. 승려 1명, 비구니 1명도 사라졌다. 10년 만에 처음 발생한 NLD 본부 앞 탄압이었다.
불안감과 초조함이 뒤엉킨 결연한 눈빛의 한 청년이 다시 힘껏 용기를 냈다. ‘종잇장 피켓’을 치켜들고 카메라 앞에 선 청년은 약 1분간 ‘침묵 시위’를 한 뒤 당사 안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청년의 피켓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나르기스 피해 주민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그들의 상황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하고 처참하답니다.”
8개월 만에 다시 찾은 랑군. 외신 잡지들이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몰고 온 재앙을 다룬 기사 부분만 찢겨진 채 팔리는 검열도, ‘군정의 주둥이’로 불리는 가 한국의 독재자들처럼 나무 심기를 즐기는 장군들의 사진을 1면에 모신 것도, 그리고 민망한 선전 문구가 가득한 것도 여전했다. 물론 문구 몇 줄이 잠시 새롭긴 하다. ‘(나르기스 피해 주민들을 위해) 누구라도 자유롭게 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군정은 ‘누구라도 자유롭게’라는 이 말을 스스로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5월 한 달 시끄러웠던 ‘외국인 입국 금지’ ‘비자 발급 거부’와 같은 구호활동 제약이 6월 들어서는 버마의 민간구호팀들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방치한데다 외국 구호단체들도 좀처럼 가닿지 못하는 최대 피해지역 이라와디 삼각주의 ‘위험지대’로 달려갔던 현지 민간구호팀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라와디를 오가며 구호활동을 펼친 코미디언, 영화배우, 가수, 사업가, 학생, 간호사, 실업자 등 자발적인 시민들은 랑군 주재 영국 대사관의 한 외교관 말마따나 “나르기스 구호활동의 진정한 영웅들”이다. 그러나 버마 군부는 지금 이들의 활동마저 방해하고 있다.
신호탄은 지난 6월4일 유명한 코미디언 자르가나를 구속한 사건이다. 400여 명의 구호팀을 조직해 동료 연예인들과 물자를 실어날랐던 그는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 끔찍한 현실을 알렸고, 더 많은 기부금과 물자를 모으는 수완도 발휘했다. 그러나 그 인터뷰 때문에 자르가나는 구속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열흘 뒤, 연예인 구호팀의 또 다른 ‘주동자’ 조 텟 웨이(스포츠지 기자 출신)도 구속됐다. 이들의 동료 초우 자(55·가명)는 “잠시 구호활동을 중단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더 많은 구호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구속을 피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우리가 가져간 쌀도 뺏긴 적이 있다. 군인들도 배가 고프니까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 나라 정부는 너무나 잔인하다. 살아남은 주민조차 싹쓸이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런 ‘나르기스형 분노’는 어렵잖게 접할 수 있었다.
민간구호팀을 탄압하는 이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날리고 사원으로 대피한 이들에게 어떻게 귀향을 강요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NLD 구호팀장 온 차잉(65)은 ‘강제 귀향’을 비판했다. 그게 바로 군정의 ‘천성’이라고 말을 받은 또 다른 구호팀장 우 치원(65)은 열흘간 구호활동을 마치고 지난 6월13일 이라와디의 라푸타 지역에서 막 돌아왔다고 했다. “5월10일과 11일 이라와디의 몰라뮌군 타운십의 초우답 사원에 피신하고 있던 주민 3천~4천 명이 강제로 귀향을 당했다. 비상식량으로 한두 공기 정도의 쌀을 받았을 뿐이다.”
현장에서 활동했던 국내외 구호요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라와디 현지에선 여전히 주검 처리조차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썩어가는 주검이 곧바로 전염병 창궐로 이어지는 건 아니어서, 산 자들을 돌보느라 죽은 자들은 구호작업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분위기 탓이다. ‘국경 없는 의사회’(MSF) 대변인 줄리는 “가족과 이웃의 주검이 보이는 데서 생활하는 건 살아남은 이들에겐 크나큰 심리적 고통이며 재난 순간을 연상시키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런데 군부는 주검 매장 봉사활동을 하는 이들까지 붙잡아갔다. 지난 6월14일 ‘주검매장그룹’에서 활동하는 학생 7명이 나흘간의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라와디의 피야퐁 타운십에서 구속됐다.
군부는 왜 현지 민간구호팀을 탄압하는 걸까? 랑군에선 크게 두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첫째, 군부의 각종 제약 때문에 구호활동을 직접 하지 못하는 국제 구호단체와 시민·사회단체가 버마인 민간구호팀에 구호품을 전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이 두드러질수록 민심 이반 우려도 커지게 마련이다. 군부의 1차 목표가 이들의 ‘자금줄’을 차단하는 데 집중되는 이유다. 둘째, 민간구호팀의 왕성한 활동은 버마에서 씨가 마른 시민사회의 새로운 불씨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의 입을 통해 처참한 현장 상황이 외부로 전해질 수도 있다. 헌신적으로 피해주민 구호활동을 벌이는 이들을 숱하게 붙잡아 가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버마인 활동가들조차 현장 활동을 접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여러 통로를 통해 어렵사리 확보한 이라와디행 취재길도 막혀버렸다. 하는 수 없이 랑군 주변 지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라와디 삼각주에 비하면 피해가 훨씬 적은 지역이지만, 그래서인지 정부든 구호단체든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주민은 단 두 가정뿐이었다. 지붕이 날아가 50달러나 들여 수리했다는 랑군 주민 소우 테(29·가명)는 “지방정부 쪽에서 받은 구호품이라곤 쌀 두 공기가 전부”라고 말했다. 실업자인 그는 부인이 벌어오는 월 30달러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역시 나르기스로 지붕을 날려버렸다는 치치(32·가명)는 “조그만 감자 12알을 구호품이라고 가지고 왔더라”며 “그게 정부가 내민 구호품의 전부”라고 헛헛하게 웃었다.
랑군 시내에서 약 30km 떨어진 초욱탄 지역. 버스로 꼭 두 시간이 걸렸다. 도로와 가까운 곳에 사는 ‘부유층’들은 강가 쪽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을 인부로 고용해 자기 돈으로 집수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로에서 1~2km 정도만 들어가도 상황이 사뭇 달랐다. 빚을 얻어 무너진 집을 수리하는 이들은 그나마 나은 축이고, 많은 주민들이 무너진 잔해에서 자재를 건지고 대나무와 야자수 잎을 구해 허술했던 옛 집 그대로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긴급상황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밍밍 네트웨(52·가명)처럼 천막 재료를 지붕 위에 대강 얹어놓은 경우도 있다. 조부모 세대부터 80년 넘게 살아온 집이 무너졌다는 그는 도로 근처 부잣집으로 일용직을 나간 남편을 포함해 일곱 식구가 모두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일곱 명이 벌어오는 총수입은 하루 평균 3천차트(3달러 미만)다. “처음에는 설마했다. 정부가 조금은 도와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기대를 버렸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시 랑군 시내. 빈민 거주지에 속하는 북다공 타운십 주민 민 르윈(46·가명)의 죽음이 기막혔다. 나르기스가 지붕을 통째로 날려버린 집에서 버티던 그는 작은 폭풍을 동반한 우기의 날씨에 닷새 만에 감기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 환자였다. 부인과 사별한 뒤 항구에서 일용 노동자로 일하며 4명의 자녀를 키워온 민 르윈은 4명의 자녀와 함께 사촌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HIV에 감염된 채 태어난 네 살배기 막내를 포함한 그의 자녀들은 고아로 남아 있다. 6월21일 현재 아이들은 여전히 수리가 되지 않은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현지 구호활동가 웨이 몽(23·가명)은 “이런 가정이 너무나 많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광폭한 바람과 빗줄기를 뿌려댄 지 두 달여. 국제사회와 언론·구호단체의 관심도 사그라지는 지금, 버마 피해 주민들에 대한 긴급구호를 끝내도 좋은 걸까? 지난 5월20일부터 일찌감치 ‘긴급상황 종료, 이제부턴 재건’이라고 선포해버려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던 버마 군부의 황당한 자신감은 논외로 치자. 현지에서 활동하는 ‘국경 없는 의사회’ 쪽은 “주민들이 필요한 식량을 얻지 못하는 한 ‘긴급구호’ 상황은 여전하다”고 말했고, 유니세프의 자프랭 초드리는 단호하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월드비전 쪽은 “긴급구호에서 재건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지만, 여전히 긴급한 상황들이 있다”고 밝혔다. 입국사증(비자)을 얻지 못해 구호인력 파견을 못한 채 버마 내부 조직을 통해 구호활동을 펴고 있는 세계적 구호단체 옥스팸 쪽은 “대부분의 자연재해 지역에선 통상 한 달이 지나면 재건 단계에 들어서는 게 일반적”이라며 “하지만 버마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평가했다.
유엔은 군부의 덫에 걸려
버마는 고통받고 있었다.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남기고 간 ‘천재’도 그렇지만, 군부의 폐쇄정책과 구호 방해 책동이란 ‘인재’가 더 뼈아프다. ‘군부’란 장벽이 있긴 했지만, 국제 구호기관들의 활동 역시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구호요원에 대한 비자 발급이 시작된 뒤에도 기대만큼 전폭적인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랑군 외곽 등 비교적 접근이 쉬운 지역에서도 구호의 손길은 재난 규모에 비해 턱없이 작았다.
유엔은 ‘군부의 덫’에 걸려 있다. 군부의 비자 발급 거부로 발이 묶인 기자들에게 “유엔,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버마 정부의 3자 협력이 중요하다”는 브리핑만 되풀이하는 ‘방콕 유엔’이나, “버마 정부의 동의 없이 피해 규모를 밝힐 수 없으며, 여전히 추산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랑군 유엔’ 모두 군부와의 협력 이란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버마 민주화 진영도 ‘덫’에 걸려 있긴 마찬가지다. 오랜 세월 국제사회 지원에 의존해온 탓에, ‘자기 운동력’은 어느새 사라진 터다. 유엔과 국제사회에 비판의 날을 세우면서도, 여전히 자기 생존을 그들에 의존해야 하는 딱한 처지인 게다. 버마의 내일이 오늘과 같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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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안에선 전화 인터뷰도 쉽지 않다. 통화 성공 확률이 대략 열 번에 한 번꼴인 사람들이 많다. 간신히 성공한 툰 민 아웅(40)과의 통화도 마찬가지였다. 도청을 하는지 ‘지~지~’거리는 잡음이 여지없이 목소리를 좀먹는다. 기를 쓰고 참아가며 인터뷰를 이어간 건 그만큼 그가 바깥세상에 할 말이 많다는 증거일 게다.
40대로 접어든 툰 민 아웅은 이른바 ‘88세대’ 지도부 중 1명이다. 1988년 8월8일 항쟁 이후 감옥을 들락거리던 학생운동 지도부는 2006년 8월 ‘88세대’라는 이름 아래 다시 하나로 모였다. 이들이야말로 ‘연로한’ 민족민주동맹(NLD)의 지도력에 대비되는 버마 민주화 운동의 새로운 활력소다.
그러나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듯했다. 툰 민 아웅은 “현재 동지들 40명가량이 구속 상태고, 나를 포함해 밀라 테인, 소툰 등 책임 지도부와 14명의 ‘2차 지도부’가 지난해 8월 대규모 시위 이후 모두 숨어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지난 6월20일 오후 5시께부터 20여분 동안 진행됐다.
랑군에 있나.
=그렇다고 생각해라.
가장 어려운 점이 뭔가.
=너무 많다. 거처를 구하는 것과 서로 연락을 취하는 게 어렵다. 동지 1명이 연행될 때마다 이동을 해야 하고, 은신처 찾기도 더욱 어려워졌다. 휴대전화도 자주 바꿔야 한다. 그동안 휴대전화 3대를 이용했는데, 군부가 통화를 차단해버렸다.
가족과는 자주 연락하나.
=지난해 8월 이후 연락하지 못했다. 군부가 가족을 위협하고 감시하는 상황이라….
나르기스로 버마가 큰 재난에 빠져 있다. 피해 상황을 어떻게 보나.
=참혹하다. 중국 대지진과 비교해보라. 중국 정부는 즉각 모든 구호를 받아들여 생존자를 살려내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버마 군부는 사람 살리는 일 대신 현장 상황이 바깥으로 새나가는 걸 막는 데 더 애쓰고 있다. 민간 구호활동조차 방해하는 실정이다.
민간 구호팀 활동까지 막을 필요가 있을까.
=피해 주민들이 자신을 돕는 학생이나 예술가, 승려들을 군부보다 더 존중하고 신뢰하게 될 것 아니겠나.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독재정권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방문을 전후로 유엔-아세안-군부 간 협력 체계가 운영되고 있는데.
=유엔이 그동안 취해온 조처는 나뿐 아니라 우리 버마인 모두에게 큰 실망감만 안겨줬다. 유엔이 외교적 전술만 구사한다면 이 나라가 직면한 문제를 제대로 풀기 어렵다. 버마 군부는 끔찍한 집단이다. 유엔은 지금 군부에 이용당하고 있는 거다. 군부가 유엔과의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한 이 땅에서 실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진실은 더욱 은폐될 가능성이 높다. 반기문 총장에게 묻고 싶다. 왜 아웅산 수치 여사를 만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나? 나르기스가 몰고 온 재난은 앞으로 식량 위기와 정치적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반 총장은 수치 여사를 만나 이런 장기적 전망을 논의했어야 한다.
재난 와중에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도 치러졌다.
=거짓으로 점철된 투표였다. 이른바 ‘새 헌법’ 때문에 버마 국민들은 더욱 고통당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나.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유엔에 기대할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다수 버마 국민들은 민주적이고 인권을 존중하는 정부가 들어설 수 있도록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어떤 형태로든 조처를 취해주기 바라고 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섣불리 전망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엄청난 불의와 탄압이 이 땅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우리는 더 이상 핍박받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버마를 포함해 억압이 있는 곳에선 언제나 민중항쟁이 벌어졌다. 버마는 지금 경제·식량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군부가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민주화 세력이 언제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어느 순간 켜켜이 쌓인 민중의 분노가 거센 항쟁으로 이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우리도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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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군정은 ‘강제’ 전문이다. 강제 이주, 강제 귀향, 강제 노동, 강제 징집 그리고 강제 추방까지. 이 가운데 ‘강제 추방’을 직접 경험했다.
버마 내부를 취재할 때면 이따금 밤에 불을 켜놓고 자곤 한다. ‘취재의 자유’는 터럭만큼도 허용되지 않는다. ‘죄’를 좀 많이 지었다 싶은 날, 고백하건대 과대망상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밤에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그놈들 얼굴이라도 보려면….’ 다행히 ‘그들’이 찾아온 건 아침이었다.
지난 6월22일 일요일 아침 7시10분께. 그날 취재 약속을 아침 8시에 잡아놓은 탓에 막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호텔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찾아왔는데, 여권과 항공기 티켓을 가지고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다급히 중요한 취재 자료를 감춘 뒤 부스스한 표정으로 아래층에 내려갔다. ‘니니’라는 이름의 내무부 소속 ‘특별 지부’ 경관 한 명과 평범해 보이는 또 한 명의 남성이 와 있었다. 20분 뒤 2명의 경찰 간부가 올 예정이라며 ‘심문’을 시작했다.
“이름이 뭔가? 6월18일과 19일 어디 갔었나?”
6월19일 민족민주동맹(NLD) 본부 앞에서 벌어진 시위를 취재하면서 사방에 널린 사복요원들의 카메라에 적잖이 모습이 노출된 터다. 그 일로 당초 예정한 3주 일정을 앞당겨 출국할 것을 고려 중이었다. ‘요원’은 18일과 19일 두 차례 NLD 사무실을 방문했던 기록을 들이밀며 “어디 갔느냐, 왜 갔느냐”고 되풀이해 물었다. 한동안 윽박지르던 그는 “짐 싸서 내려오라. 당신은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고 선고하듯 말했다. 그나마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게 장시간 심문의 위험을 덜어줬을 터다. 부스스하게 내려왔으니 이 닦고 세수할 시간은 줬다. 짐 수색에 대비할 시간을 번 셈이다.
20여 분 뒤 2명의 경찰 간부가 나타났다. ‘예우 초 테’라는 25년 경력의 ‘바한 타운십’(NLD 본부가 위치한 구역) 담당형사는 전형적인 정보계 형사의 모습이었고, 다른 한 명은 관료처럼 보였다. 정복을 차려입은 경관 1명도 따라붙었다. ‘한 건 했다’는 기분이었는지 기세가 등등했다. 버텨야 했다.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겠다. 대사관 직원이 오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 이건 내 권리다!” 큰소리는 쳤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권력’은 알아도 ‘권리’는 모르는 게 이들이다. 다행히 아침 8시를 조금 넘겨 권재환 영사가 와줬다. 특별 지부가 오전 10시발 방콕행 타이항공편을 예약했고, 짐 수색이 시작됐다. 취재 자료가 담긴 4장의 CD를 빼앗겼다. 책과 CD, 그리고 사진 찾기에 혈안이 된 그들은 다행히 가장 안쪽에 있던 숨겨놓은 노트북 컴퓨터에 이르진 못했다. 이래저래 운이 좋았지 싶다.
공항 이민국 사무실. 특별 지부 요원들은 범죄자 다루듯 했다. 연방 사진도 찍어댔다. 여권에는 ‘추방자’라는 제법 큰 도장이 찍혔다. ‘이런, 여권을 또 바꿔야겠군!’ 버마에서 경험한 가장 끔찍한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공포와 무기력증”이라고 답할 게다. ‘강제 추방’은 그 절망의 음습한 기운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랑군발’ 기사의 마침표를 강제로 찍고, 방콕에 도착해 버마 친구들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허걱~! 추방된 날 오후 또 다른 ‘팀’이 내가 묵던 호텔을 ‘급습’했단다.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됐던 건지, 담당이 달랐던 건지는 알 수 없다. 건수 올리기에 혈안이 된 정보기관원들의 행태는 전세계가 엇비슷한 모양이다. 오전에 그나마 ‘점잖게’ 쫓겨난 게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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