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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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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혁명인가 미완의 혁명인가

등록 2008-06-27 00:00 수정 2020-05-03 04:25

1979년 소모사군과 혁명군이 벌인 마지막 전투의 전선 ‘판아메리카고속도로’, 현재는 빈과 부의 경계로

▣ 에스텔리(니카라과)=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gmail.com

[니카라과 혁명의 기억]

“경찰은 콧수염과 구레나룻를 기르거나 머리가 긴 사람을 거리에서 발견하면 무조건 발포를 했다. 짧은 머리와 깨끗이 면도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소모사 쪽 사람이고,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에 제대로 몸단장을 하지 않은 이들은 무조건 ‘산사람들’로 단정했던 게다.”

믿기지 않던 소모사의 항복 선언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에서 약 150km 떨어진 에스텔리, 소모사 정권에 맞서 가장 격정적으로 싸웠던 그곳에서 ‘혁명의 시대’를 들었다. 그곳 라틴아메리카대학에서 만난 심리학 교수 후안 토레즈(44)는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로 싸웠다고 했다. 11년 세월을 꼬박 산디니스타 혁명군의 일원으로 소모사군과 콘트라 반군에 맞서 전선을 누볐다. 그는 “니카라과 전역에서 소모사군에 맞서 항전했지만, 특히 에스텔리에서 벌인 소모사군과의 마지막 전투는 소모사 정권을 붕괴시키는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회상했다. 토레즈 교수와 함께 에스텔리 중심가를 돌면서 ‘마지막 전투’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갔다.

1979년 6월29일, 800여 명의 산디니스타 전사들이 산에서 내려왔다. 에스텔리 시내에서 소모사군과 사흘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산디니스타 혁명군이 에스텔리 중심가를 점령하자, 소모사 군대는 고속도로 부근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는 동과 서로 ‘분단’됐다. ‘판아메리카고속도로’의 동쪽은 소모사 군대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중심가와 서쪽은 모두 산디니스타 혁명군이 장악했다. 전투에서 밀린 소모사군은 전투기까지 동원해 에스텔리 중심가를 유린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소모사 병사들을 향해 M-16 소총으로 사격하면서 전투를 벌인 거리는 불과 30m도 되지 않았다. 30m 떨어진 곳에는 탱크를 앞세운 30여 명 정도의 소모사 군인들이 총을 장전한 채 누군가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고, 맞은편에서도 마찬가지로 수백 명의 산디니스타 군인들이 총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사거리를 건너 뛰어간 일이 있다. 하늘에서는 소모사 공군의 전투기가 기관총을 뿜어냈고 심지어는 폭탄까지 떨어뜨렸다.”

30년째 도로는 “무초 폴보”

그해 7월10일부터가 고비였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약 100m 떨어진 거리에서 팽팽한 대치를 계속했다. 닷새 동안 거리에 쓰러져 잠시 눈을 붙이는 게 고작이었고, 총격전과 소강 상태가 되풀이됐다. 결국 닷새가 지나자 모든 게 판가름났다. 소모사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왔다. 전투 중이던 소모사 병사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만 항복 선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소모사 정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군대는 힘없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병력이나 화력 면에서 월등했던 소모사군에 맞서던 산디니스타 게릴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소모사군이 완전히 물러난 7월16일부터 해방된 에스텔리의 교회 앞 광장에는 게릴라 전사들과 시민들이 한 덩어리가 돼 축제를 벌였다. 에스텔리가 해방됐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수도인 마나과에서는 소모사군이 결사적인 방어전을 벌이면서 퇴각하고 있었다. 에스텔리가 해방됐다는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전국은 곧 축제의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마나과가 해방된 것은 에스텔리가 해방된 지 사흘 뒤인 7월19일이었다. 당시 혁명에 참가했던 민중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산디니스타 혁명과 반콘트라 전쟁이 끝난 지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니카라과 민중의 삶을 직접 보기 위해 에스텔리 일대를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중남미 전역을 관통하는 ‘판아메리칸고속도로’로 향했다. 고속도로 서쪽의 에스텔리는 중심가에 속하는 곳으로 비교적 반듯한 주택들이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건너자마자 삶의 풍경은 180도 달라졌다. 허름한 집들 사이로 하수도가 설치되지 않아 그대로 노출된 오물들이 악취를 풍기며 흐르고 있었다. 토레즈 교수는 “정화되지 않은 하수가 흐르는 탓에 모기와 파리가 극성이고, 말라리아도 창궐하고 있다”고 말했다.

혁명 직후 단행된 토지개혁 이후 농민들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가톨릭 교회에 딸린 농업지도단 일행의 새벽길에 끼어들었다. 온두라스 국경 부근 도시인 오코탈의 동쪽에 위치한 고립된 산악지역인 킬랄리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혁명이 일어난 지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도로는 여전히 포장되지 않은 상태였고, 고온건조한 기후로 가는 길 내내 마른 먼지가 휘날렸다. 산악지역으로 들어서니 도로를 포장하기 위해 대형 트럭들이 흙을 실어나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동행한 니카라과 사람들 입에서 “무초 폴보!”(먼지 엄청나군!)란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새벽에 출발해 한낮이 다 돼서야 킬랄리에 닿았다. 6시간여가 걸린 게다. 다시 그 지역의 농업전문가들을 트럭 짐칸에 태우고 ‘와나공동체’로 출발했다. 농업전문가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공동체들을 방문해 농민들에게 농업기술을 전수하고, 농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와나공동체에서는 관개수로를 개발해 농작물에 급수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었다.

와나공동체 마을은 산디니스타 정권 아래서 개발된 프로젝트가 1990년 차모로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이어지면서 만들어졌다. 거대한 농업 후보지를 선정해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똑같은 모양의 집을 지어 분양해줬다. 집이라고 해봐야 콘크리트 기둥과 벽 위에 양철 지붕을 얹고 방만 구분해놓은 정도다. 에스텔리의 빈민가 집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네 차례에 걸쳐 모두 10년 동안 농지와 주택이 분배됐고, 도시에서 온 1천 명의 빈민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황무지는 농지로, 농지는 부농에게로

공동체가 시작된 지 18년이 지난 지금 황무지는 농지나 목축지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혁명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결과가 쉽게도 자리를 잡아갔다. 대부분의 농지가 다시 소수 부농에게 집중된 게다. 결국 이주해온 빈민들은 가까운 킬랄리에서 일자리를 구해 출퇴근을 하거나 아예 임금이 높은 코스타리카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견됐다.

레오니다스 테르세로(46)는 이곳에 이주해온 지 12년째다. 처음 이곳으로 이주해올 때는 농지를 직접 경작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분배받은 땅을 경작하려고 나섰지만 문제는 농자금이었다. 정부는 경제가 힘들다는 이유로 농자금 대출을 동결했고, 은행의 농자금 융자를 얻기도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농사는커녕 끼니조차 이어가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분배받았던 농지는 부농에게 헐값에 넘겼고, 부농의 농지에서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농업 노동자로 전락했다. 그는 “다섯 남매를 키우고 있으니, 일자리를 찾아 코스타리카로 가는 것도 힘든 지경”이라고 한숨을 토해냈다.

“토지개혁을 해서 땅을 분배하고, 형편없는 집이나마 무상으로 지급했다고 농사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애초 목적을 상실한 총체적 실패작이다.” 농업전문가들을 이끌고 온 시민단체 ‘카리타스’의 한 활동가는 “꾸준히 지원해서 이들이 정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지만 땅과 집만 지급했지 다른 보조적인 지원은 등한시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라고 흥분했다. 공동체 주민들이나 농업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계획만 거창하게 공포하고 구체적인 실천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산디니스타 쪽이나, 농촌개발은 모두 외국의 원조로 미루는 우파 정당들의 행태를 싸잡아 비판했다.

산디니스타의 혁명은 역사의 당위였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철저히 외면하고 3대에 걸쳐 43년간(1936~79년) 니카라과 전체의 부를 독점하고 전횡을 휘둘렀던 소모사 정권이 스스로 혁명을 부른 게다. 소모사 일가의 무자비한 독재는 40년 이상을 맹목적으로 지원해왔던 미국까지도 등을 돌리게 만들 정도였다. 1970년대 소모사 정권은 무장항쟁을 벌였던 산디니스타 게릴라들은 물론이고 민간인과 어린이, 노약자들까지 무차별로 학살했다. 인구 6만 명의 도시인 에스텔리에서만도 5천 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니카라과 전역에 걸쳐 희생된 이들은 5만 명을 헤아린다.

당시 소모사 일가는 국민총생산의 65%를 독점했을 정도로 니카라과는 ‘소모사 왕국’이었다. 이 밖에도 수도인 마나과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는 교육시설이나 의료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배우면 반항한다’고 믿었던 소모사 정권이 민중을 교육에서 철저히 소외시킨 결과, 당시의 문맹률은 거의 50%에 육박했다. 이 상황에서 혁명에 성공해 정권을 잡았지만, 산디니스타 정권은 10년 동안 콘트라군과의 전쟁에 모든 여력을 소진해버렸다.

정치적 야합으로 재집권했지만…

1984년 11월에 산디니스타 혁명 뒤 최초로 선거가 실시돼 63%의 지지율을 획득한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산디니스타 정권이 공식 수립됐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과 경제정책 실패, 만연한 부정부패는 혁명의 주역인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 급락으로 이어졌다. 산디니스타 내부에서도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분열을 거듭했고, 혁명세력은 계속 약해져갔다. 결국 1990년 실시된 선거에서 소모사에 의해 암살당한 야당 정치인이자 신문 사장 차모로의 부인인 비올레타 차모로가 오르테가 산디니스타 대표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비올레타 차모로는 20년간이나 지속되던 전쟁의 종식을 공약했다. 산디니스타는 1996년 선거에서 40%, 2001년엔 38%의 득표율을 올리며 거푸 야당으로 밀려났다. 2006년 대선에서 오르테가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그마저도 큰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다. 무원칙한 정치적 야합을 통해 집권에 성공했다는 비판이 산디니스타 진영 내부에서조차 거센 탓이다.

니카라과 혁명은 내년에 30주년을 맞는다. 이미 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정치 일선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니카라과는 여전히 산디니스타와 소모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혁명의 성과’에 대한 논란도 여전하다. 콜롬비아 하브리아나대학의 저명한 해방신학자인 알베르토 파라(72) 교수는 “니카라과 혁명은 실패작”이라고 잘라 말한다. “사회주의 체제로 가다가 포기하고 자본주의로 회귀한 것 자체가 실패”라는 게다. 반면 역시 해방신학파 신부이자 산디니스타 출신 국회의원을 지낸 어네스토 브라보(65) 신부는 “니카라과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혁명”이라며 “현 산디니스타 정부가 하는 일을 잘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혁명의 시작이 그랬듯, 그에 대한 평가 역시 가난한 민중의 삶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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