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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혁명의 기억] 쟁반 나르는 혁명가

등록 2008-04-25 00:00 수정 2020-05-03 04:25

밀림을 호령하던 여전사를 식당에서 만나다… 1970년대 격정의 시대를 지나온 혁명 전사 부부의 오늘

▣ 마나과(니카라과)=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s@yahoo.co.kr

마르타 베로테란(54)과는 우연히 만났다.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 중심가의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이하 산디니스타) 본부 앞에서 옛 전우 모임을 하려고 모여 있던 ‘은퇴한 게릴라’들을 취재하고 있을 때다. 일행 중 누군가 “최고의 여성 산디니스타 전사”라면서 그를 소개했다. 여린 몸매에 안경을 올려쓴 커다란 눈, 선한 웃음을 흘리는 그의 모습에서 ‘왕년의 열혈 혁명전사’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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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

다시 만날 기약을 하고서 헤어졌지만, 인터뷰 기회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도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딸과 함께 식당을 꾸리고 있었다. 젊은 시절 치열한 무장투쟁의 한가운데 섰던 그다. 한가롭게 식당에서 음식이나 나르는 게 어색하진 않을까? 아니란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란다. 밀림을 호령할 때도 비슷했을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면서 넓지 않은 식당 안의 모든 테이블이 허기진 회사원들로 가득 찼다. 모두들 정신없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사람의 물결이 잦아들면서, 식당 한편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한참이나 얘기를 나눈 뒤, 그는 천천히 뒤뜰로 나갔다. 긴 세월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망고나무가 선량했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진 커다란 망고 서너 개를 주워든 베로테란은 종이에 곱게 싸서 “맛이나 보라”며 건넨다. 고향 땅 누이를 닮았다.

산디니스타는 1961년 카를로스 폰세카, 실비오 마요르가, 토마스 보르헤 등이 설립한 ‘민족해방전선’(FLN)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30년대 미국에 맞서 니카라과 민족해방 투쟁을 이끌었던 아우구스토 체사르 산디노를 따른다는 뜻에서 창설 2년여 만에 ‘산디니스타’란 이름을 더했다. 가난한 농민과 젊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다진 산디니스타는 1970년 초반부터 제한적인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미국을 등에 업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독재정권의 위기는 ‘탐욕’이 불렀다. 1972년 12월 마나과 일대를 뒤흔든 강력한 지진으로 40만 인구 가운데 1만여 명이 숨지는 참극이 빚어졌다. 마나과 도심의 80%가 반파 또는 완파됐고, 25만여 명의 이재민이 났다. 인도적 재난을 목도한 국제사회는 원조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소모사 정권은 이를 ‘기회’로 여겼다. 세계 각국이 보내온 재건자금은 정권의 주머니로 직행했고, 원조물품은 군부의 배를 채웠다. 부패한 군부정권은 심지어 군대를 동원해 무너진 상업지역을 약탈하기도 했다. 소모사 정권을 지지했던 부유층까지 고개를 돌린 이유다. 산디니스타는 무장투쟁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1979년 7월 마침내 마나과에 입성해 ‘니카라과 혁명’을 세계에 알린다.

스페인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던 베로테란도 그 격정의 시대에 자연스레 ‘혁명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산디니스타 혁명군의 일원이 된 그는 전투가 한창 치열하던 1970년대 말 코스타리카 국경 부근에서 전선을 누볐고, 마나과를 비롯해 니카라과 전역을 뛰어다니며 ‘연락책’으로 혁명운동을 조직했다. 문학도 출신답게 산디니스타 혁명전사들의 활동을 소개하는 월간지 를 발간해 각지의 ‘전선’으로 배포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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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콘트라 중심에 오사마 빈 라덴이”

인터뷰를 마저 마치기 위해 그날 저녁 그의 집을 찾았다. 그는 지하창고로 내려가서는 오래 묵은 짐짝 속에 보물처럼 고이 간직해뒀던 를 한 아름 들고 나왔다. ‘산’에서 편집해서 인쇄까지 했던 ‘역사적인’ 잡지다. 한쪽 한쪽 넘겨가며 사연을 전해주던 그는 스러져간 동지들이 떠올랐는지 잠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이란-콘트라 스캔들의 중심에 오사마 빈라덴이 있다.” 혁명 직후부터 온두라스와 코스타리카 등을 무대로 산디니스타 정부에 맞섰던 콘트라 반군과의 전투 얘기를 하던 참이었다. 베로테란이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1980년대 초반 미 중앙정보국(CIA)이 비밀리에 당시 ‘적성국가’였던 이란에 무기를 판매한 뒤 판매대금을 산디니스탄 혁명정부에 맞선 콘트라 반군을 조직하는 데 사용했던 일이 밝혀진 사건이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도덕성은 치명타를 입었다. 베로테란은 “빈라덴은 미국 쪽에서 3억달러를 지원받아 세계 전역에서 무기를 구입해 콘트라 반군에게 넘겨주는 중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는 쉽게 확인할 수 없지만, 1980년대 초반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빈라덴이 한때 CIA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혁명’은 그에게 어떤 ‘선물’을 가져다줬을까? 베로테란은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함께 싸웠던 칠레 출신의 혁명가 남편”이라고 말했다. 그의 남편 루이스 플로레스(58)가 곁에서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플로레스 역시 총을 들고 전선을 누비던 혁명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온순하고 평화로운 미소가 얼굴에 가득했다.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넘나들며 혁명의 시대에 바쳤다고는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선거를 통해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인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 시절 칠레 남부지역에서 학생운동가로 활동했던 플로레스는 1973년 9월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국경 넘어 아르헨티나로 향했다. 피노체트 일당은 쿠데타 직후 학생·노동운동가들과 사회주의 활동가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고문하고 살해했다. 희생자의 주검은 태평양에 버려졌다. 이른바 ‘더러운 전쟁’이었다.

칠레를 탈출해 아르헨티나에 머물던 플로레스는 몇 달 뒤 다시 멕시코로 도피했다. 그 뒤 몇 년간 그는 멕시코에서 사회주의 활동가들과 어울리며 ‘미래’를 기약했다. 회한이 왜 없겠는가? 그는 “그땐 하루하루 버텨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극우 군사정권이 철권을 휘두르던 시절이었다. 젊은 망명객의 일상이 녹록했을 리 없다.

엘살바도르에서 혁명을 이어가다 [%%IMAGE6%%]

그 무렵이었다. 니카라과에서 ‘봉화’가 솟아올랐다. 플로레스는 멕시코를 떠날 결심을 굳혔다. 혁명의 열기가 달궈지고 있는 니카라과로 가기 위해 멕시코에서 만난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산디니스타 혁명 대열에 자원했다. 칠레에서 군복무를 한 경험이 있던 그는 니카라과 전선에 배치되자마자 혁명군 교관으로 임명돼 전투교육을 맡게 됐다.

1970년대 말, 산디니스타 혁명군과 소모사 정권이 맞붙었던 곳은 주로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의 국경 일대였다. 북부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선과 남부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전선으로 나눠진 상태에서 플로레스는 남부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게릴라전이 한창이던 당시엔 교관이라고 해서 후방에 배치돼 교육활동만 할 수 없었다. 언제나 최전선에서, 어린 전사들과 함께 전투를 벌였다. 그는 “실전이 없어 비교적 한가한 시간에만 전투교육을 했다”고 말했다.

산디니스타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콘트라 반군이 거센 공세를 벌였고, 전쟁은 다시 시작됐다. 플로레스는 “미국은 니카라과 혁명이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산디니스타 정부를 가만두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니카라과 혁명의 영향력이 컸다는 방증일 게다. 혁명 성공 이후에도 미국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곧 중미 전체가 포연에 휩싸였다. 플로레스는 콘트라 반군과의 전투를 위해 엘살바도르로 거점을 옮겼다.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콘트라 반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고, 동시에 엘살바도르의 젊은이들을 교육해 산디니스타 혁명을 지원하게 하는 일을 했다. 혁명은 그렇게 계속됐다.

플로레스가 니카라과로 돌아온 건 1986년의 일이다. 귀국 뒤 군에서 전역한 그는 중앙정부 상무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잇따른 자연재해와 현실 사회주의권 몰락에 따른 원조 중단, 부패와 무능한 경제정책으로 혁명의 열기는 차츰 사그라지고 있었다. 미국은 콘트라 반군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계속하는 한편, 비올레타 차모로를 새로운 친미의 구심점으로 삼아 산디니스타를 압박했다.

국민과 한 약속대로 산디니스타는 1990년 2월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렀고, 결과는 패배였다. 친미 성향의 야권연합은 총선에서 51석을 얻어 39석을 얻은 데 그친 산디니스타를 압도했다. 대선에서도 야권연합을 이끈 차모로가 54.73%의 표를 얻어, 40.82% 득표에 그친 산디니스타의 다니엘 오르테가 후보를 꺾었다. 산디니스타는 순순히 정권을 내줬고, 16년을 기다린 끝에 지난 2006년 11월 마침내 재집권에 성공했다.

2006년 11월 마침내 재집권

불그스레 앳된 얼굴의 젊은이들은 어느새 쉰을 훌쩍 넘겼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혁명의 열기는 일상의 분주함에게 쉬이 자리를 내줬다. 베로테란은 식당 주인으로, 플로레스는 법률가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마나과의 한켠에서 그들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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