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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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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634년

등록 2008-04-25 00:00 수정 2020-05-03 04:25

IPS가 추정한 ‘흑인이 백인 소득수준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 킹 목사 서거 40주년 ‘약속의 땅’은 아직 먼 곳에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에반 에스카리아는 1990년 쫓기듯 이라크를 떠나야 했다. 그의 나이 9살 때의 일이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19시간을 걸어 터키 국경을 넘었다. 그의 가족은 천신만고 끝에 미국 샌디에이고에 정착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비디어대여점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미국 국적을 따는 가장 쉬운 길

지난 4월12일 오전 이제 미 해병대원이 된 에스카리아는 그의 가족이 탈출을 감행해야 했던 이라크에서, 그것도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별장으로 사용했던 미군 기지에서 ‘미국 시민’으로서 선서를 했다. 는 4월13일치에서 에스카리아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내 이름이 호명됐을 때, 눈을 들 수 없었다.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드디어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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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바그다드의 옛 ‘알파우 대통령궁’에선 미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 시민권 수여식이 열렸다. 에스카리아는 이 행사를 통해 새롭게 미국 시민권자가 된 71개국 출신 259명의 미군 병사 가운데 한 명이다. 독재자를 피해 떠나야 했던 고향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는 미군이 됐고, 그 땅에 돌아와서야 미국 국민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독한 역설이다. 는 “에스카리아가 어릴 적 살던 동네는 시민권 수여식이 열린 옛 알파우궁에서 차량으로 불과 20분 남짓 떨어져 있다”고 전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모두는 인종·문화적 다양성이야말로 미국의 장점임을 상기해준다. 여러분은 이미 미국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한,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을 지켜내겠다고 나선 전사들이다.”

기념사에 나선 로이드 제임스 오스틴 장군(미 육군 중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카펠라풍으로 미 국가가 울려퍼졌고, 이어 조지 부시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를 담은 영상물이 상영됐다.

“미국인이 된 것이 자랑스럽다!” 외침과 함께 이윽고 병사들의 이름이 호명됐고, 시민권 증서와 고이 접은 성조기가 일일이 병사들 손에 쥐어졌다. 수단 출신의 미아콜 마욤(35) 상병은 와 한 인터뷰에서 “2001년 말 내전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며 “미국에 도착한 뒤 단 한 번도 내가 난민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성조기를 소중히 품에 안은 그는 “미국은 내 목숨을 구했다”며 “내일 죽더라도 옳은 일을 했다는 생각에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것처럼 말했다.

합법적으로 미국 땅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 미국 국적을 따내는 가장 빠른 길은 뭘까? 바로 군에 입대하는 게다. 에스카리아와 마욤이 미국인이 된 지 이틀이 지난 4월14일 미 국토안보부에 딸린 시민권·이민국(USCIS)은 짤막한 보도자료를 내놨다. 자료는 첫 문장부터 “미 이민·국적법(INA)의 특별조항에 따라 미군에 복무하는 현역 장병이나 전역자들은 미 시민권 신청자격을 갖추게 된다”며 “시민권·이민국은 군 장병과 최근 전역한 이들에 대한 시민권 획득 절차를 대폭 간소화했다”고 강조했다. 시민권 ‘신청자격’은 “좋은 품성, 영어 사용 능력, 미 정부와 역사에 대한 이해, 그리고 미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맹세”면 족하단다.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미군 병사의 ‘국적’은 무려 140여 가지에 이른다. 숨진 ‘외국인 병사’들 중 일부는 죽어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뤘다. 사후에 미 시민권을 추서할 수 있도록 규정한 이민·국적법 조항에 따른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부시 미 대통령은 2002년 7월 미군에 입대한 병사들의 시민권 획득 절차 간소화를 뼈대로 하는 대통령령을 내렸다. 만성적인 모병난에 시달리던 미군 당국엔 그야말로 ‘천군만마’였을 게다.

나아졌다는 교육에서도, 2087년에야…

시민권·이민국의 자료를 보면, 2001년 9월 테러와의 전쟁 개전 이래 군 복무를 통해 미 시민권을 거머쥔 이들은 지난 4월13일 현재까지 모두 3만7250명에 이른다. 같은 기간 사후 시민권 추서자만도 111명이나 된다. 현재 미군 장병 가운데 외국 국적자는 4만여 명에 이른다. 아메리칸드림을 기다리는 이들이다. 미국 시민권은 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저는 ‘약속의 땅’을 봤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그곳에 당도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이 말만은 꼭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약속의 땅’에 도착하고야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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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합중국의 헌법을 수호할 것을 맹세하니, 신이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지난 4월12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옛 알파우 대통령궁에서 열린 시민권 수여식에서 71개국 출신 259명의 병사들이 미국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다다른 걸까?(사진/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제공)

지난 1968년 4월 마틴 루서 킹 목사는 테네시주 멤피스의 한 모텔 발코니에서 흉탄에 맞아 비명에 가기 전날 대중연설에 나서 이렇게 말했다. 미 민간 싱크탱크인 정책연구소(IPS)는 최근 킹 목사 서거 40주년을 맞아 그가 말한 ‘약속의 땅’에 미국 사회가 얼마나 다가서 있는지를 따져본 18쪽짜리 짤막한 보고서를 내놨다. ‘40년 뒤: 실현되지 않은 아메리칸드림’이란 제목의 이 보고서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실태를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보고서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자.

지난 40년 동안 미 흑인의 상황이 가장 나아진 것은 교육 분야다. 명목상 인종 간 분리 교육이 사라진 게 한몫을 했을 터다. 킹 목사의 죽음 이후 25살 이상 흑인 성인 남녀의 고등학교 졸업 비율은 214%나 높아졌다. 보고서는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오는 2018년이면 흑인 성인 남녀 가운데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이들이 백인과 같은 비율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흑인 젊은이들의 대학 졸업률은 같은 기간 무려 400%나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68년 백인의 41%에 불과했던 흑인 대졸자 비율은 2008년 현재 백인의 61%까지 따라잡았다. 문제는 이런 추세가 유지되더라도 오는 2087년이 돼서야 흑인 대졸자 비율이 백인과 같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교육 수준은 조금 나아졌지만, 경제적 평등은 여전히 ‘현실’보다는 ‘꿈’의 영역이다. 보고서는 “지난 40년 동안 흑인이 백인과의 소득 격차를 줄여온 속도가 유지된다면, 흑인이 백인과 같은 평균소득 수준에 올라서기 위해선 무려 537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보고서는 이어 “인종 간 소득 격차 감소세가 둔화되기 시작한 1983년 이후의 추세가 유지된다면, 흑인이 백인의 소득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앞으로 634년이 걸릴 것”이란 암담한 전망을 내놨다.

이런 상황을 두고 토마스 샤피로 미 브렌다이스대 교수(사회학)는 지난 2003년 펴낸 이란 책에서 “흑인 가정이 백인 가정과 동일한 소득을 올리기 위해선 연평균 12주를 더 일해야 한다”고 표현한 바 있다. 흑인 가운데 집을 소유한 이들이 전체의 47%에 불과한 반면, 라틴계를 뺀 백인은 75%가 주택 소유자인 것도 이유가 있는 게다.

수감률 ‘106명당 1명’ 대 ‘15명당 1명’

백인에 비해 흑인이 수감생활을 할 확률이 높다는 점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지난 2월 퓨리서치센터가 내놓은 자료를 보면, 18살 이상 백인 남성은 106명당 1명꼴로 수감생활 경험이 있는 반면, 같은 연령대 흑인 남성은 15명에 1명꼴로 수감생활을 했다. 특히 20~34살 흑인 남성 가운데 수감생활 경험자는 무려 9명 가운데 1명꼴로 나타났다. 사회적 차별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한때 ‘국가적 안보위협’으로 비난받던 킹 목사는 사후 40년이 지난 지금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미 지난 1986년부터 매년 1월 셋째 월요일을 ‘킹 목사의 날’로 지정해, 연방 공휴일로 기리고 있는 터다. 하지만 킹 목사가 꿈꿨던 모든 인종이 차별 없이 평등한 ‘약속의 땅’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3만7250명의 에스카리아와 마욤들이 품은 아메리칸드림도 마찬가지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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