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전문위원 부부가 뛰어든 세상…‘산후조리’라고는 모르는 벨기에에서 보름이나 앞당겨 둘째아이 낳기
외국 여행길엔 아파도 병원 가기가 겁난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설명하기도 쉽지 않고, 현지 의료진의 진단과 처방도 미덥지 않은 탓이다. 하물며 ‘두 목숨을 건다’는 출산이랴. 벨기에 브뤼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도종윤 전문위원의 부인 김은영씨가 최근 딸을 낳았다. 낯선 땅, 물선 나라에서 도 위원 부부가 전해온 좌충우돌 출산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 브뤼셀(벨기에)=글 김은영
▣ 사진 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출산일이 앞당겨졌어!”
툭 던진 한마디에 대륙 반대쪽 전화선 너머에서 친정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뭐? 예정일은 한참 남았잖아. 어떻게 출산일이 지 맘대로 당겨져?” 그렇다. 예정일보다 무려 보름이나 출산이 빨라졌다. 그것도 담당의사 출근 날짜에 맞춰서!
지난 2004년, 첫아이를 낳았다. 이번과 마찬가지로 벨기에 땅에서. 혹시 “벨기에가 어디 있는 나라인데 거기까지 가서 애를 낳았어?”라고 묻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좀더 다정한 독자라면 “외국에서 아기 낳으면 말도 안 통하고 산후조리도 어려울 텐데 어떻게 했어?”라고 물을 테고. 더 현실적인 독자라면 대뜸 “그럼, 아기 국적은 어떻게 되는 거야?”라고 물을 게다. 자, 이제 그 대답을 들려드리겠다.
병원에는 돈 내지 않아요
2002년 처음 이곳에 왔다. 유학생으로, 남편과 함께 신접살림을 차린 곳이 수도 브뤼셀의 한 대학교 앞이었다. 2년쯤 알콩달콩 둘이만 살다가 첫째를 낳았고, 첫째와의 터울, 그리고 방학 기간에 출산해야 한다는 점 등을 고려해 2008년 초를 목표로 둘째를 가졌다.
출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벨기에의 의료체계를 잠시 설명해둬야겠다. 벨기에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사람은 외국인을 포함해 모두 ‘SIS 카드’라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건강보험증 같은 것인데, 카드 한 장에 개인 신상이 모두 입력된다. 이 카드가 없으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원칙적으로 병원에 갈 수도 없다. 한 가지 우리나라와 다른 것이라면 벨기에에는 의료보험 조합이 여러 개가 있다. 사업 범위도 넓어서, 노인연금·여행보험·육아 보조금 지급 등 다양한 업무를 취급한다. 보험료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의료비 청구 방법은 우리나라와 많이 다르다. 종합병원에 갈 경우, 외래진료는 물론이고 입원 환자도 병원을 나설 때까지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진료비 청구서는 보통 퇴원 한두 달 뒤 집으로 날아온다. 의료비를 우리나라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진료비는 비싼 대신 치료비와 수술비 등은 오히려 저렴한 편이다. ‘준비운동’이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출산 얘기를 시작한다.
# 마지막 정기검진일 담당의사가 “첫아이 때 조금 힘들었으니 태아가 더 크기 전에 낳자”고 한다. 맙소사! 예정일까지는 무려 3주나 남았다. 한국의 친정 어머니는 2주 뒤에나 산바라지하러 오실 예정인데. 초음파로 재본 태아의 몸무게는 2.7kg. 아무리 딸(25주째에 성별을 알려준다)이라도 좀 작다. “별로 안 크잖아요?” 그러자 의사 왈, “3kg이 넘으면 제왕절개를 고려해야 할지도 몰라요.”
첫째도 바로 이 의사가 받아냈다. 아이가 커서 집게로 끄집어낸 경험 때문에 이러는 모양이다. 하지만 첫째도 몸무게가 3.08kg밖에 안 됐다. 서양 아기들이 보통 3kg 이내에서 출산되다 보니, 이곳 의사들에겐 3kg만 넘어가도 우량아로 보이는 모양이다. 어쩌겠나. 의사 말대로 해야지. 담당의가 분만실로 출근하는 날에 맞춰 출산일을 잡았다.
오후 4시 이전에 낳아야 하는데…
# 출산 당일 오전 10시. 대기실에서 3시간을 기다린 끝에 분만실에 들어왔다. 내가 선택한 분만 방법은 무통분만. 첫째를 낳을 때 택했던 방법이다. 척추 주변에 주사를 놓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다소 고민하기도 했지만, 출산 때 아프지도 않고 후유증도 별로 없어 다시 한 번 택했다. 분만실 한쪽 벽엔 커다란 유리창이 있어 브뤼셀 시내가 한눈에 내다보인다. 다른 쪽엔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수중분만 욕조가 있다. 조산사의 안내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남편이 입원에 필요한 짐을 잔뜩 챙겨들고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섰다.
이어 마취과 의사가 들어와 등허리에 무통분만 주삿바늘을 꽂고, 조산사가 손목 혈관에 촉진제를 놓았다. 등에 주삿바늘을 꽂을 때엔 ‘척추를 잘못 건드려 못 걷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비명이 절로 나왔다. 비명 소리에 내 손을 잡아주고 보듬어주고 다정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준 사람은 남편이 아닌 조산사. 경험 많은 그는 긴장한 우리 부부에게 농담도 건네고, 내가 더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침대 위치를 조정해주는 등 많은 것들을 챙겨줬다.
오후 3시. 한 시간마다 확인하던 의사가 “아기가 곧 나올 것 같다”고 말한다. 이제 슬슬 분만 준비를 하잔다. 코를 골며 옆에서 자던 남편도 부산스레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3시 반. ‘4시 이전에 낳아야 되는데….’ 벨기에 시간으로 오후 4시면 한국에서는 다음날 0시다. 첫아이는 한국 시각으로 0시를 넘겨 낳은 탓에 벨기에 서류에 찍힌 생일과 한국 서류상의 생일이 다르다.
드디어 담당의사가 들어왔다. 분만에 참여하는 의사는 담당의사, 보조의사, 조산사, 마취과 의사 2명, 소아과 의사 등 모두 6명이다. 의사의 신호에 따라 배에 두 번 힘을 주자 아기가 나왔다. 아기는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내 품에 바로 안겼다. 품에 안기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고는 나와 눈을 맞추는 모습에 “너무 예뻐!”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아기와 첫 대면이 끝난 뒤 의사의 손으로 돌아간 아기의 탯줄은 아빠가 잘랐다. 이어 소아과 의사가 이런저런 검사를 한다. 키 48cm, 몸무게 2.76kg. 정상 판정을 받고, 곧이어 수유.
태어나자마자 산모와 함께 지내
저녁 7시. 정상 분만이라면 보통 4~5일 입원한다. 입원실은 2인실로 택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신생아라 해도 늘 산모와 함께 자고 먹는다. 목욕도 산모가 시켜야 하고, 밤에 보챌 때도 산모가 돌봐야 한다. 초보 엄마라면 다소 힘들겠지만, 늘 아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랄 수 있겠다. 오늘 출산을 했다는 현지인과 함께 방을 쓰게 됐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역시 체력이 대단하다! 그는 입원실에 들어서자마사 냉장고에서 막 꺼낸 차가운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창문도 살포시 열어놓는다. ‘산후풍’의 무서움은 전혀 신경 안 쓰는 눈치다. 잠시 뒤 저녁식사가 들어왔다. 손바닥만한 스테이크 한 덩어리와 삶은 채소 조금. 속으로 “애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뜨끈한 국물이 아쉽다. 엄마가 있었으면….
# 출산 다음날 간호사가 들어와 어서 샤워를 하란다. 잠시 머뭇거리자 간호사는 “샤워를 해야 세균감염을 막을 수 있다”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아침식사는? 식빵 세 조각과 블랙커피. 찬바람 부는 병실, 푹신한 침대, 샤워, 게다가 블랙커피까지. 산후에 금기시하는 일들을 아기 낳은 지 하루 만에 다 경험해버렸다.
내가 보건대, 서양 사람들에게 ‘산후조리’라는 개념은 아예 없는 것 같다. 방을 함께 쓴 산모는 아기를 낳은 다음날 바로 짧은 치마에 화장까지 하고, 찬 음료수를 마시고, 맨발로 병실을 걸어다녔다. 그야말로 ‘온몸에 바람 들어갈 짓’은 모두 다 한 게다. 아기도 온몸을 꽁꽁 싸놓는 우리와는 달리 그냥 편하게 눕혀둔다. 햇볕을 많이 못 보는 기후 때문인지, 시간 날 때마다 창가에 눕혀 일광욕을 시키는 것도 다른 점이다.
# 출산 5일 뒤 드디어 퇴원이다. 원래 전날 퇴원하려 했는데, “아기한테 황달기가 있다”며 병원 쪽이 퇴원을 하루 늦췄다. 어제는 복잡한 수치를 들이대며 며칠 더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다행히 오늘은 괜찮아졌단다. 동양 아기들이 유난히 황달기가 많다는데, 아무래도 서양 아기들을 주로 다뤄본 벨기에 의사들이어서 낯설어한 게 아닐까 싶다.
퇴원할 때 챙겨야 할 것들이 있다. 신생아는 생후 한 달 뒤부터 어린이 성장을 관리해주는, 동네마다 있는 보건소(ONE)에 가서 정기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때 필요한 서류를 퇴원할 때 꼭 받아둬야 한다. 의료보험 조합에 제출할 서류도 중요한데, 조합에서는 출생신고를 하면 ‘SIS 카드’ 발급은 물론이고 소정의 출산 후원금을 준다. 출생 신고는 병원을 순회하는 구청 공무원에게 하면 되기 때문에 관청까지 번거롭게 갈 필요가 없다.
벨기에인일까, 한국인일까?
앞서 말한 대로 퇴원 때 병원비는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 환자가 퇴원할 때 돈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건 분명 큰 위안이다.
병원비가 얼마나 나왔을까 궁금해하는 독자도 있겠다. 집으로 날아온 청구서 내역을 간단히 소개한다. 입원비 423.24유로(환자 부담 112.53유로), 투약비 207.42유로(환자 부담 0유로), 의사 급여 757.41유로(환자 부담 32.03유로), 전화요금, 비누, 기저귀 값 등 기타 비용 88.93유로(전액 환자 부담). 총비용 1388.07유로(약 219만9799원) 중 환자 부담금은 233.49유로(약 37만원)이다. 청구 비용은 청구서 발급 뒤 15일 이내에 가까운 은행에 가서 내면 된다.
참, 끝으로 아기의 국적이 어딘지 궁금해하는 ‘현실파’ 독자의 궁금증도 해소해드린다. 벨기에에선 아기는 당연히 부모의 국적을 따른다. 이곳에서 출생신고는 합법적인 거주자임을 증명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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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인구통계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5~2010년 벨기에의 인구 1천 명당 출생률은 10.04명으로 추정된다. 조사 대상 195개국 중 168위였다. 프랑스나 노르웨이보다는 낮지만, 출산률이 저조하다는 우리나라(9.3명·179위)보다는 높다.
벨기에에서는 아기를 낳으면 먼저 동네마다 있는 보건소(ONE)에서 정기 검진을 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대로 양육되지 못하는 전쟁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만든 것이 시초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든 어린이가 신생아부터 12살까지 정기 검진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이곳에 가면 일단 심리 치료사가 부모와 면담을 한다. 양육에 어려움은 없는지를 물어보고, 경우에 따라선 출산 뒤 생길 수 있는 우울증 진단도 해준다. 이어 의사가 아기의 발육 상태를 확인하고 백신 접종 등을 해준다. 단, 이곳에서는 의료 행위는 하지 않기 때문에 질병이 있더라도 진찰은 하지 않고 가까운 소아과를 소개해준다.
기본적으로 벨기에의 사회보장제도는 외국인이라도 합법적인 체류자라면 벨기에인과 똑같은 대우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육아 보조금인데, 자영업자와 월급쟁이로 나뉘어 각기 다른 기관에 신청을 해야 한다. 자녀 1명당 월 74유로(약 11만7천원)부터 최고 220유로(약 34만8천원)까지 누진적으로 받을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출산 전후에 출산 장려금을 받는다.
생후 3개월부터 2살 반까지는 아기를 탁아소에 보낼 수 있다. 비용은 하루에 1유로(약 1600원)부터 20유로(약 3만1천원)까지 가계 수입에 따라 다르다. 물론 아이들이 받는 대우는 똑같다. 벨기에에서도 탁아소 부족은 사회적 고민거리다. 그래서 최소한 임신 6개월부터는 탁아소에 미리 등록을 해두어야 한다. 보통 한 반에 20명 정도의 아기들이 있고, 보모는 3명 정도가 따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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