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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분노의 폭풍 속으로

등록 2008-01-04 00:00 수정 2020-05-03 04:25

부토 전 총리 암살 배후로 이슬람 세력 꼽히나 대통령 책임 피할 수 없어… 사임 압력 높아지면 비상사태 선포될지도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동방의 딸.’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는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2007년 봄 펴낸 그의 자서전 개정판도 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내가 삶을 선택한 게 아니라, 삶이 나를 선택했다”며 “파키스탄의 모든 아이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귀국할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는 2007년 10월18일 귀국했고, 불과 10주 남짓 만인 12월27일 기어이 괴한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향년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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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가문’ 두 남동생도 석연찮은 죽음

“이 자리에 오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다. 우리 조국 파키스탄이 위험에 빠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국민은 도탄에 빠져 있다. 파키스탄인민당은 이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걸까? 〈AP통신〉 등 외신들은 부토 전 총리가 암살되기 불과 몇 분 전 행한 마지막 정치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부토 전 총리가 스러진 펀자브주 라왈핀디는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일종의 위성도시다. 인구는 300만명에 불과하지만, 파키스탄 육군본부와 각급 정보기관이 본부를 두고 있다. 1960년대 이슬라마바드를 새 수도로 삼기 위한 공사가 한창일 땐 파키스탄의 임시 수도 노릇을 하기도 했다. 호락호락한 도시가 아니란 얘기다. 그럼에도 경찰복을 입은 암살범은 총을 든 채 버젓이 부토 전 총리가 탄 차량에 20m가량까지 근접해 살인을 저질렀다. 석연찮다. 사건을 더듬어보자.

파키스탄 일간 가 12월28일치에서 종합한 목격자의 증언을 보면, 부토 전 총리는 이날 라왈핀디 중심가 리아콰트 바그 광장에서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규모 선거유세를 치렀다. 행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임박한 파국의 조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연설을 마친 부토 전 총리는 방탄차량에 올랐고, 차는 천천히 광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흥분한 지지자들이 차량을 가로막고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차량의 선루프가 열리고, 부토 전 총리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상체를 드러냈다. 그는 주변을 가득 메운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때, 총성 두 발이 울렸다. 부토 전 총리는 이내 차량 안으로 사라졌다.

이어 몇 발의 총성이 더 울렸고, 허둥대던 암살자는 자폭을 선택했다.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면서 삽시간에 광장 주변이 무간지옥으로 변했다. 떨어져나간 살점과 잘려나간 팔다리가 피범벅이 된 채 널브러진 주검과 얽혀 살풍경을 연출했다. 인근 라왈핀디 종합병원으로 옮겨진 부토 전 총리는 목과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였다. 이날 오후 6시16분께 그는 숨쉬기를 멈췄다. 는 이날 자살폭탄 공격으로 “부토 전 총리 외에도 파키스탄인민당 간부 등 29명이 숨졌고, 100여 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파키스탄의 ‘부토’ 가문은 흔히 인도의 ‘네루’나 ‘간디’ 가문과 비견된다. 유력 정치인을 배출한 명문가이자, 비극적 죽음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부토 전 총리의 아버지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 역시 파키스탄 총리를 지냈다. 부토 전 총리가 정계에 입문한 것도 군사 쿠데타로 권좌에서 축출된 뒤 억울하게 처형된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함이었다. 그의 두 남동생 무르타자와 샤나와즈 역시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이다 석연찮은 죽음을 맞은 바 있다. 부토 전 총리의 아버지가 지아 울하크 군사정권의 손에 1979년 4월4일 처형된 라왈핀디 교도소는 그가 암살된 장소에서 불과 2km 남짓 떨어져 있다.

“아메리카의 가장 귀중한 자산 제거”

부토 전 총리를 겨냥한 암살 시도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8년여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그가 카라치 국제공항에 도착한 바로 그날, 환영인파를 뚫고 두 차례 잇따른 폭탄공격이 벌어져 15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첫 번째 시도에 실패한 암살범들은 두 번째 시도에선 총까지 동원해 ‘확인사살’을 했던 게다. 첫 번째 암살 위기를 넘겼을 때, 부토 전 총리는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기관 내부의 알카에다 추종세력의 소행”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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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는 파키스탄 안팎의 이슬람 무장세력에겐 ‘공적 1호’로 꼽혔다. 이유는 여럿이다. 우선 영국 옥스퍼드대와 미국 하버드대를 거친 그는 파키스탄의 대표적인 ‘친서방·친미’ 정치인이다. 그에게 ‘이교도’란 딱지가 붙은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10월 귀국을 전후로 부토 전 총리가 내놓은 일련의 발언도 이슬람 무장세력의 적개심을 높였을 게다. 그는 공공연히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했고, “과격 이슬람 세력과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또 파키스탄 서부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는 수천여 이슬람 종교학교(마드라사)를 ‘개혁’하겠다는 주장도 내놨다. 잘 알려진 대로 마드라사는 탈레반의 탄생지이자 이슬람 무장세력의 온상이다. 심지어 부토 전 총리는 “알카에다 등 이슬람 과격세력과 결탁한 군벌을 소탕하기 위해 서부 아프간 국경지역에서 미군의 군사작전도 허용할 수 있다”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현재로선 알카에다 등 이슬람 무장세력이 부토 전 총리의 죽음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줄기차게 부토 전 총리의 목숨을 노려왔다.” 브루스 리델 미 브루킹스연구소 남아시아 담당 선임연구원은 미 시사지 과 한 인터뷰에서 “알카에다가 직접 암살에 나서지 않았더라도, 이들과 결탁한 세력이 암살을 모의하고 실행에 옮겼을 것”이라며 “이들 조직은 거의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으며, 여성으로서 세속적 정치를 주창해온 부토 전 총리에 대한 혐오감을 공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자헤딘을 패퇴시키겠다고 공언했던 아메리카의 가장 귀중한 자산을 제거했다.” 리델 연구원의 지적을 확인이라도 하듯, 인터넷 매체 는 12월29일치에서 무스타파 아부 알야지드 알카에다 아프간 지부 대변인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알야지드는 이 매체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알카에다와 무자헤딘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이교도와 한패가 된 자들(무샤라프 대통령과 부토 전 총리)을 겨냥한 싸움에서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두게 됐다”며, 펀자브주에서 활동하는 반시아파 무장세력으로 알카에다의 명령을 받는 ‘라슈카르 에 잔그비’란 단체가 부토 전 총리 암살을 실행에 옮겼다고 주장했다.

귀국 전부터 암살 경고됐는데…

문제는 민심이다. 설령 부토 전 총리의 암살이 알카에다 소행으로 밝혀지더라도, 파키스탄에 조만간 안정이 찾아올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파키스탄인민당 지지자들은 이미 라호르에서, 카라치에서,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정부 관료의 집을 불태우고, 시위진압 경찰에 맞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약탈과 방화가 횡행하고 있다. 정부 고위관료의 집이 습격을 당하고 있다. 그들의 분노는 곧장 페르베즈 무샤라프 정권을 겨냥하고 있다. 는 12월27일치 인터넷판에서 한 인민당 지지자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부토 전 총리 암살은 알카에다의 짓도, 탈레반의 짓도 아니다. 부토 전 총리는 이미 귀국 전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란 점을 경고했지만,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를 웃어넘겼다. 파키스탄 국민은 부토 전 총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인민당뿐이 아니다. 제2야당인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N)을 이끌고 있는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는 12월27일 라왈핀디의 병원에 안치된 부토 전 총리의 주검 곁에 주저앉아 이렇게 목놓아 부르짖었다. “오늘은 파키스탄 역사상 가장 암담하고 우울한 날이다. 상상해서도 안 될 일이 그예 벌어지고 말았다.” 부토 전 총리의 최대 정적이던 샤리프 전 총리는 이 자리에서 1월 총선 불참과 무샤라프 대통령 즉각 사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분노의 폭동이 계속된다면, 부토 전 총리의 죽음에 대한 무샤라프 정권 책임론은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무샤라프 대통령이 부토 전 총리의 죽음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이 밝혀진대도, 파키스탄 국민은 사태를 미연에 막지 못한 책임이라도 물으려 할 것이다. 사임 압력이 커진다면 무샤라프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12월15일 “치안이 안정됐다”며 거둬들였던 국가비상사태를 다시 선포하는 것 정도다. 이럴 경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

경찰 병력으로 시위대 진압이 버거워진다면, 결국 군이 동원될 게다. 하지만 군이 무샤라프 대통령의 편에 설 것인지는 이제 장담하기 어렵다. 무샤라프 대통령이 직접 선택한 후계자인 아슈파크 키야니 육군참모총장이 선선히 국민을 겨냥해 총부리를 겨눌까? 되레 군부가 무샤라프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고 나설 가능성은 없는가? 무샤라프 대통령의 실각은 파키스탄 정국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 것인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혼돈의 소용돌이로 지금 파키스탄이 빠져들고 있다. 파키스탄 일간 은 12월28일치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팽배한 극단주의를 되돌아보라

“(부토 전 총리의 암살에도) 냉정을 잃지 말자는 무샤라프 대통령의 호소는 귀담아들을 만하다. 다만 이번 사건을 통해 무샤라프 대통령도 스스로 되돌아볼 일이다. 1990년대엔 볼 수 없었던 위험과 극단주의적 관념이 파키스탄 사회에 얼마나 팽배해졌는지를 말이다. 무샤라프 정권이 미국과 손잡고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한 이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제 무샤라프 대통령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조처를 밟아나가야 한다.” 안타깝게도 무샤라프 대통령이 의 지적을 귀담아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부토 복귀의 복잡한 계산

미 행정부 18개월여 동안 정치적 노력, 부토는 무샤라프를 지원하는 ‘카드’

핵무장한 이슬람 국가의 거리에서 시위와 폭력, 방화와 약탈이 횡행하고 있다. 더구나 무대는 ‘테러와의 전쟁’의 최전선인 파키스탄이다. 대테러 전쟁과 이슬람권 민주화를 외교안보 정책의 두 축으로 삼은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상상하기조차 싫을 최악의 상황이다. 한데 이를 어쩐다? 부시 행정부가 ‘악몽’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는 흔히 ‘미스터 10%’로 불린다. 부토 전 총리가 1988~90년, 1993~96년 두 차례 총리직에 있을 때 각종 관급공사를 따낸 업체가 그에게 계약고의 10%를 소개비 명목을 떼였다는 소문 때문이다. 완강한 부인에도 부토 전 총리 주변에선 이런 부패 추문이 끊이지 않아왔다. 8년여 망명생활 동안에도 대중적 인기가 높긴 했지만, 그가 파키스탄 국민에게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부토 전 총리가 2007년 10월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던 건 미국의 ‘비밀스런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부토 전 총리의 정계 복귀를 위해 부시 행정부는 무려 18개월여 동안이나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는 12월28일 인터넷판에서 미 행정부 안팎의 말을 종합해 이렇게 전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대테러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세력인 무샤라프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토 전 총리를 개입시키는 것뿐이란 판단을 내린 데 따른 것”이라는 게 이 신문의 지적이다. 보도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다.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2006년 중반께다. 이 무렵 부토 전 총리와 무샤라프 대통령이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차관보를 통해 접촉하기 시작했다. 부토 전 총리와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2007년 1월과 7월 두 차례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대면협상도 벌였다. 당시만 해도 무샤라프 대통령은 부토 전 총리의 부패 혐의를 사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결정적 국면은 2007년 8월과 9월 부토 전 총리가 잇따라 미국을 방문하면서 마련됐다. 두 차례나 총리를 지냈지만 부토 전 총리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중요한 조직인 정보기관과 군부, 그리고 핵과학계를 통제하지 못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 세 조직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다. ‘무샤라프-부토 동거정부’ 카드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20007년 9월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부장관이 직접 이슬라마바드를 방문해 무샤라프 대통령을 설득했다. 는 “당시 네그로폰테 부장관은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미국의 변함없는 지원 약속과 함께 민주적 외피를 둘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며 “부토 전 총리가 그런 역할을 맡는 데 적임자임을 설득했다”고 전했다.
정치적 위기에 몰렸던 무샤라프 대통령은 결국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보장해달라’는 부토 전 총리의 요청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직접 나서 ‘보장’해줬다는 게 의 보도다. 부토 전 총리는 라이스 장관의 ‘확인 전화’를 받은 지 일주일 만인 10월18일 전격 귀국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계산’이 오산이었다는 점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9·11 동시테러 이후 지난 6년여 동안 부시 행정부는 무사랴프 정권에 무려 100억달러 상당의 각종 지원을 쏟아부었다. 부토 전 총리의 정계 복귀를 섣불리 추진한 것도 결국 무샤라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제 부토 전 총리의 암살로 무샤라프 대통령마저 최악의 위기로 몰리고 있다. ‘대테러 전쟁’이 기로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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