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자유주의 정당의 연정 실패로… 새 예산안도 보류 중
▣ 브뤼셀(벨기에)=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회담에 참석하는 게 참 쑥스럽다.” 지난 12월13일 포르투갈에서 열린 리스본 유럽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기 베르호프스타트 벨기에 총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왜 ‘리스본 조약’ 서명식 참석이 쑥스러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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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망과 왈룬으로 분리된 민족주의
벨기에에서는 총선이 끝난 지 6개월이 훨씬 지났지만 12월20일 현재까지 새 정부가 구성되지 못하고 있다. 무려 190여 일이다. 플라망기독당이 제1당이 되면서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던 이브 레테름 총재는 12월1일 국왕 알베르 2세에게 조각 책임자 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연정 협상이 실패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에게 주어진 총리 기회를 던져버린 것만 연정 협상 이후 벌써 두 번째다. 첫 번째 협상 실패 때는 다시 기회를 주었지만, 두 번이나 실패한 그에게 다시 총리 자리가 돌아갈 가능성은 이제 거의 없다.
연정 협상은 벨기에의 플라망(네덜란드어), 왈룬(프랑스어) 양 지역을 대표하는 네 정당 간에 진행됐다. 선거에서 승리한 플라망기독당, 플라망자유당, 왈룬자유당(개혁당), 왈룬기독당이 그들이었다. 왈룬사회당은 제2당으로 선전했지만 의석수가 크게 줄어 참패한 선거였다. 따라서 민족주의 정당과 자유주의 정당이 연합하는 우파 대연합의 탄생이 예약된 셈이었다. 하지만 기대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조각 책임자 사퇴 전날 벌인 최후 담판에서, 양 지역의 자치권을 확대하자는 레테름의 주장은 플라망자유당과 왈룬자유당에는 받아들여졌지만, 같은 민족주의 이념을 가진 왈룬기독당에는 거절당했다.
이념적으로 두 지역의 ‘기독당’은 똑같이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정당들이다. 하지만 플라망기독당은 플라망인들을, 왈룬기독당은 왈룬인들을 대변할 뿐이었다. 플라망기독당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대폭 지방정부로 이양하고 헌법도 고치자고 주장했지만, 왈룬기독당은 이는 곧 국가 해체를 의미한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플라망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한 왈룬으로서는 연방정부 권한 약화는 곧 지방 보조금의 감소와 정치력의 약화, 더 나아가 양 지역의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시장자유화’를 정치 이념으로 삼은 두 지역의 ‘자유당’은 연대가 가능했지만, 민족주의 기치를 내건 ‘기독당’은 그렇지가 못했다
새 정부 구성이 차일피일 늦춰지는 바람에 전 집권당인 플라망자유당의 베르호프스타트 총리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과도 내각을 이끌고 있다. 새로운 정책 입안은 엄두도 못 내고 있고, 심지어 새해 예산도 편성하지 못하고 있다. 총선에서 패배한 총리여서 역할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리스본 조약’ 서명을 앞두고 그가 “참 쑥스럽다”고 한 것은 신임 총리가 해야 할 중대사를 과도 총리가 한다는 데 대한 심적 부담감의 표현이었던 게다.
이런 정치 혼란이 계속되자 벨기에 사회는 크게 동요하고 있다. 해외에서 발행되는 ‘벨기에 펀드’에는 위험부담 금리가 가산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12월15일 생필품 인상에 반대해 거리에서 대규모 노동자 집회가 열렸다. 12월 들어 주말이면 계속되는 철도 파업도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있다. 왈룬 지역 방송 〈RTBF〉는 12월13일 이라는 ‘분단’ 상황을 가정한 풍자 방송을 내보냈다. 지난 2006년 12월, 벨기에가 플라망권과 왈룬권으로 분단되고 국왕이 망명길에 올랐다는 예고되지 않은 ‘풍자뉴스’를 내보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데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일부 왈룬인들은 플라망인들의 자치권 확대가 곧 지방 교부금을 매개로 왈룬인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분노하고 있다. 자존심 구기는 자치권 확대보다는 아예 나라를 쪼개 왈룬을 프랑스에 합치자는 강경한 여론까지 조금씩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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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뒤에도 벨기에가 존재할까
물론 전체 여론은 벨기에를 그대로 이끌고 가자는 쪽이다. 12월17일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왈룬인들의 88%, 브뤼셀인들의 87%, 플라망인들의 72%가 벨기에 해체에 반대한다고 답해 당장 벨기에가 없어질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20년 뒤에도 벨기에가 존재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응답한 사람이 지역을 불문하고 50%를 밑돌았다. 왈룬과 프랑스의 합병 논의는 그만큼 이번 사태가 심각함을 보여준다.
등 벨기에 왈룬권 신문들은 분석가들의 입을 빌려 몇 가지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재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선거에서 브뤼셀 지역의 일부 선거구 편입 문제가 헌법소원에 걸려 있어 쉽지 않다. 새 선거를 치르려면 이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하는데 단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새 정부가 구성되기도 전에 전 총리가 재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크다. 선거 결과 불복이나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베르호프스타트 총리가 현 내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르면 2008년 4월, 늦으면 2009년 6월의 지방선거(유럽의회 선거 포함)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 방법이 현실성이 가장 가장 높다. 레테름 기독당 총재가 ‘조각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난 이틀 뒤인 12월3일, 국왕 알베르 2세가 베르호프스타트 총리를 새 ‘조각 중재자’로 내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조각 중재자는 여러 정치인들의 견해를 물어 조각 책임자를 정하는 자리인데, 현재로서는 그 자신이 조각 책임자로 추천될 가능성이 높다. 비록 선거에서는 패배한 구 여당의 총리지만, 그의 개인적 인기는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12월 둘쨋주 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베르호프스타트 총리는 왈룬과 플라망을 막론하고 지지율 36~48%를 기록해 골고루 1위에 올랐다. 지난 총선에서 플라망자유당의 참패는 총리에 대한 신뢰 추락이라기보다는 8년 집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피로감’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반면 제1당의 총재이자 강력한 총리 후보감이었던 레테름은 왈룬과 브뤼셀에서는 아예 총리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고, 플라망 지역에서만 46%의 지지율을 기록했을 뿐이다.
2003년 무지개 내각 만든 괴력의 소유자
분석가들은 왈룬기독당을 제외하고, 제1당인 플라망기독당, 플라망자유당, 왈룬자유당 등 세 정당이 연정 협상을 다시 시작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하원 의석수가 과반수에서 턱없이 부족해 사회당이나 환경당 등이 합류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런 연정도 실현 가능성은 반반이다. 정치적 색깔이 정반대인 기독당과 사회당, 자유당과 환경당이 과연 한 배를 탈 수 있을지, 원내 제4당을 대표하는 총리가 얼마나 추진력이 있을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재로서는 베르호프스타트 총리에 대한 기대는 크다. 지난 2003년, 7개 정당을 연정에 끌어모아 무지개 내각을 출범시켰던 그의 괴력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편, 현 벨기에의 무정부 상태는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랜 무정부 기간으로 남을 전망이다. 유럽에서 선거 뒤 가장 오랫동안 무정부를 기록한 것은 지난 1977년 네덜란드에서 사회당과 기독민주당의 갈등으로 정부가 구성되지 못했던 208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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