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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말로만 평화 넘치네

등록 2007-12-07 00:00 수정 2020-05-03 04:25

구속력 없는 공동성명 발표에 그친 중동평화회의… 회담 기간에도 이스라엘군은 14차례 군사작전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은 곧 땅과 사람의 문제다. 아랍인들이 대대로 살아온 땅에 1948년 외세를 등에 업은 유대인들이 나라를 세우면서 비극은 싹텄다. 새롭게 들어선 유대인의 나라는 아랍족의 일부를 추방했고, 60년이 지난 지금껏 수많은 이들이 주변 국가에서 난민으로 떠돌고 있다. 한편 그 땅에 남겨진 이들은 ‘2등 시민’으로 전락했거나, 자기 땅에서 유배된 채 끝없는 점령에 시달리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난민 귀환권’이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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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14년간 되풀이된 상황 재연

‘난민 귀환권’은 두 가지를 뜻한다. 첫째, 남의 나라를 전전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향이다. 둘째, 현재 이스라엘이 장악한 땅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거주권 보장이다. 이는 국제사회도 일찍이 1949년 유엔 총회 결의안 194호를 통해 인정한 바다. 이스라엘은 지금껏 이를 철저히 외면해왔다.

지난 11월27일 미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에서 오랜만에 중동평화회의가 열렸다. 지난 2000년 빌 클린턴 행정부가 미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마련한 회담 이후 처음이니, 미 국무부가 “중동 평화를 위한 8년여 만의 진지한 모색”이라 말하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 결과가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게 문제일 뿐이다.

시리아·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각국에서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50여 국가와 국제단체가 참가한 아나폴리스 회의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연출’하고 공동으로 ‘주연’한 ‘작품’이다. 임기를 1년여 남겨둔 지금도 여전히 이라크에 발목이 잡혀 있는 부시 대통령으로선 ‘역사에 남을 만한 일’ 하나쯤 만들고 싶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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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와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이끈 양쪽 대표단은 부시 미 대통령의 후원과 이번 회의 참가국들의 지지 아래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와 안전 속에 공존하는 ‘2국가 해법’을 목표로, 우리는 기존 합의에 명시된 핵심 사항들을 포함한 모든 현안을 해결하는 평화협정을 타결하기 위한 양자협상을 즉시 개시하기로 한다. 우리는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협상을 펼쳐 2008년 말 이전에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기로 한다.”

회의에 앞서 온갖 팡파르가 울려퍼졌지만, 막상 그 끝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공동성명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성명의 문구와 내용은 흐릿했고, 구체적인 행동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회담에 참가한 다른 나라들은 아무런 역할도 떠맡지 않았고, 협상의 유일한 중재자는 미국이 자임했다. 오슬로에서 시작해 지난 14년간 되풀이된 상황과 한 치도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부시 행정부는 “성공작”이라며 흐뭇한 얼굴을 하기에 바빴다.

지속적인 유대인 정착촌 확장

“공동성명은 이스라엘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했다. 법적 구속력을 갖춘 문서 대신 의향서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내용이란 것도 △예루살렘의 지위 △500만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 △국경선 획정 등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아랍 권위지인 주간 은 최신호에서 “아나폴리스 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이 패자가 될 것이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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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대통령이 공동성명을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요르단강 서안 지역 유대인 정착촌의 지도자인 사울 골드스타인의 얼굴에선 미소가 번졌다. 극우 성향의 골드스타인은 이스라엘 방송 과 한 인터뷰에서 올메르트 총리의 ‘성과’를 치켜세우며 “아나폴리스 회의는 큰 성과가 있었으며, 이제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서 정착촌 건설을 더욱 확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아나폴리스 회담을 앞두고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지속적으로 유대인 정착촌을 확장해왔다. 지난 9월에도 이스라엘은 약 110ha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아 ‘E-1’이라 불리는 3500가구 규모의 대규모 정착촌 건설에 나선 바 있다. 회담은 별 내용 없이 끝났으니,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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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징후는 이미 짙어지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 부시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유대 민족의 조국”이라고 불렀다. 이건 웬 말인가? 팔레스타인 난민은 쫓겨난 땅으로 돌아갈 생각을 말라는 얘기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지금껏 그 땅에서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아바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압둘라 자치의회 정무위원장조차 과 한 인터뷰에서 “재앙을 부르는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또 다른 징후는 더 직접적이다. 부시 대통령과 올메르트 총리는 이번 회의를 전후로 아바스 대통령에게 “가자지구 통제권을 회복해 이스라엘로 포탄이 날아드는 상황을 끝내야 한다”는 점을 되풀이해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또 무엇을 의미할까? 회담 직후 이스라엘 언론에선 ‘가자지구 전면 공세 임박설’이 끊임없이 새나오고 있다는 점이 실마리가 돼준다.

“에후드 바라크 국방장관이 아나폴리스 회의를 마친 뒤 귀국하면, 가자지구에 대한 전면 공세를 준비할 가능성이 높다.” 는 11월28일치에서 이스라엘 군 당국자의 말을 따 “아나폴리스 회의에 앞서 비난 여론을 의식해 공세를 자제해왔지만, 이젠 가자지구에 들어가 하마스를 타격할 기회가 왔다”며 “이스라엘군의 대규모 공세로 하마스가 약해지면, 아바스 대통령과 파타당 정부가 가자지구를 재장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이 더욱 심각한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다.

“최악의 경우에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한 가지만은 언제나 넘쳐났다. ‘평화’를 말하는 회의와 회담, 선언과 합의 말이다.” 가자지구에 사는 공무원 유세프 디압(35)은 인터넷 매체 와 한 인터뷰에서 “아나폴리스 회의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라며 “그저 그간 되풀이해온 평화회담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역사적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원칙’만 강조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가자지구에 대한 전면 공세 가능성도

‘평화회의’를 전후로 일주일 동안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군이 벌인 ‘작전’을 들여다보면, 디압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이스라엘군의 인권유린 사례를 추적·기록하는 팔레스타인인권센터(PCHR)는 최신 주례보고서(11월22~28일)에서 이렇게 적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모두 11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또 4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28명이 다쳤다. 이스라엘군은 요르단강 서안에서 열두 차례, 가자지구에서 두 차례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와 군사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30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서안에서, 12명이 가자지구에서 각각 체포됐다. 가자지구 북부 베이트 하눈에선 이스라엘군이 민간인 가옥 1채를 파괴하고 7㎢가량의 농토를 갈아엎었다.”

‘전쟁’은 평화를, ‘경제 제재’는 외교를 뜻하는 세상이다. ‘평화회의’가 격렬한 전투와 참혹한 분열을 불러온데도 놀랄 일은 아닌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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