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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납치 문제’ 입장 바뀌나

등록 2007-09-21 00:00 수정 2020-05-03 04:25

차기 총리 후보 후쿠다·아소 모두 강경 노선에 비판적, 대북정책 변화 가능성 엿보여

▣ 이준규 평화네트워크 정책실장 minoritylee@hanmail.net

일본 정치가 요동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가 9월12일 기자회견을 통해 총리직 사임을 전격적으로 발표한 탓이다. 지난 7월 참의원 선거 참패 이후에도 꿋꿋이 버티던 아베 총리의 갑작스런 사임은 일본 내외에 충격을 던져줬다. 의회에서의 ‘소신표명 연설’(한국의 ‘시정연설’) 직후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런 이유로 아베 총리의 사임 발표 배경에 대한 많은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건강 문제, 탈세 의혹, 그리고 사생활 스캔들에 대한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동시에 비난도 빗발치고 있다. 은 9월13일치 사설에서 아베 총리가 정권을 “내던졌다”는 표현을 썼다. 보수 신문인 도 같은 날 사설에서 “극히 이례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사임”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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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정권을 “내던지다”

아베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사임의 직접적 이유는 ‘테러대책특별조치법’ 연장이 난관에 봉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법은 오는 11월1일 기한 만료를 앞두고 있어 정부 여당에서 연장을 추진해왔다. 아베 총리는 9월 초에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미국의 ‘대테러 전쟁’ 지원과 자위대의 급유활동 지속을 약속했었다. 당시 그는 수행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는 “민주당 등 야당의 이해를 얻기 위해 (총리)직을 걸고 임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기도 했다. 이를 위해 참의원 다수당인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 대표에게 당수회담을 제안했다. 그러나 일찌감치 테러대책특별조치법 연장 반대를 결정한 민주당은 회담 제안을 거절했다. 사실상 법안의 기한 연장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총리직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게 아베 총리의 해명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아베 총리의 주장에 불과하다. 사실 참의원 선거 패배 이후 아베 내각의 구심력은 제로 상태였다. 무엇보다 선거 참패의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아베 정권 인사들의 부패와 추문들이었다는 점에서 선거 이후 자민당 내외에서는 ‘총리 사퇴론’이 빗발쳤다. 야당뿐만 아니라, 자민당 내의 각 파벌에서도 ‘중의원 해산과 조기 총선’을 요구하는 주장들이 나오고, 자민당 의원총회 자리에서 아베 총리를 앞에 두고 ‘반아베파’ 의원들이 총리 사퇴를 촉구하는 발언을 하는 모습이 방송을 타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 8월27일 국면 전환을 노리고 단행한 내각 개편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새로운 것도, 특징적인 것도 없는 ‘정권연장용 내각’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히려 엔도 다케히코 신임 농수산상이 자신이 조합장으로 있던 농업공제조합에 부정한 방법으로 정부보조금을 지급한 사실이 드러나 사임했다. 내각 개편을 통한 국면 쇄신 시도가 역효과를 낳은 것이다. “원자폭탄 투하는 어쩔 수 없었다”는 발언으로 퇴진한 규마 후미오 방위상의 후임으로 고이케 유리코라는 여성을 내세워 전세 역전을 시도했던 것과 마찬가지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고이케 방위상은 참의원 선거 과정에서 ‘아베의 마돈나’ 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선거 직후에는 사무차관(정치인이 임명되는 부대신(副相)과는 달리 사무차관은 관료 중에서 임명) 인사 문제를 둘러싸고 방위성 관료들과 정면으로 충돌해 취임 2개월 만인 8월28일 방위성을 떠나가게 됐다. 고이케 방위상과 방위성 관료들 간의 충돌 소동은 선거 참패로 위축된 아베 총리의 정권 장악력 저하를 촉진시킨 ‘촉매제’ 역할을 했다.

결국 정권 장악력도, 정책 추진력도 현저히 떨어진 상황에서 ‘이대로 가다가는 당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다’는 자민당 내의 목소리가 아베 총리에게는 큰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8월 하순부터 아베 총리의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는 점도 이처럼 내외에서 궁지에 몰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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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리더십을 채우기는 역부족

‘최초의 전후세대 총리’로서 화려하게 취임했던 아베 총리의 전격적이지만 너무도 초라한 사임 이후, 일본 국내 정치의 향방은 크게 세 가지 정도를 예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자민당 내에서 총재를 새로 선출해 불안정한 정권연장 내각을 출범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기 총선을 하는 경우다.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총리를 선출하고, 그를 새로운 얼굴로 삼아 조기 총선을 치르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첫 번째와 세 번째의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민주당과 야당은 지금 당장 중의원 해산과 총선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참의원 선거에서의 약진과 아베 총리를 낙마시킨 여세를 몰아 정권 교체로까지 나아가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자민당은 자체 내에서 총재 선거를 통해 새로운 총리를 추대하는 일정을 진행하고 있다. 아베 총리 사임 직후만 해도 아소 다로 간사장을 지지하는 세력, 후쿠다 야스오 전 관방장관을 옹립하려는 세력, 고이즈미 전 총리를 재추대하려는 세력 등이 각각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지난 8월 개각에서 아소를 간사장에 임명한 것이 아베 총리였다는 사실은 아소 간사장이 정권 실패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한다. 여기에 고이즈미 전 총리마저 불출마 선언과 함께 후쿠다 전 관방장관을 지지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아소 간사장으로선 이중의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 시점에서 자민당의 당내 정치는 두 가지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째 누가 새로운 총리가 되더라도 리더십의 공백을 채우기는 역부족일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후쿠다와 아소 양자 모두 대중적 인기에서는 고이즈미 전 총리뿐만 아니라 아베 총리에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정권연장 내각’이 출범하더라도 불안정성을 극복하기는 힘들 것이다. 둘째 자민당 중진그룹, 특히 후쿠다 전 관방장관 지지세력들은 고이즈미, 아베 총리로 이어지는 강경 보수 노선에 비판적이다. 이는 역으로 아베 내각의 실패가 ‘일본 네오콘’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혔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일본 국내 정치 상황은 일본의 대외정책, 특히 대북정책에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아베 내각이 집착해왔던 ‘납치 문제 해결 없이 북-일 수교 없다’ ‘납치 문제 진전 없이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리스트에서 빼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는 원칙들이 그대로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자민당 내에서조차 아베 총리와 측근들이 외교무대에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또한 외교정책에서 자민당보다는 상대적으로 ‘합리적’ 접근을 취하는 민주당의 견제로 지금까지의 대북정책에 수정이 가해질 수도 있다.

야당 민주당이 강경으로 선회할 수도

물론 이런 내적 변수에 의한 대북정책 변화 폭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보수·상업 언론들이 일반 국민들 사이의 반북 감정을 동원하면서 민주당에 ‘책임 있는 야당의 역할’을 주문하고 나선다면, 온갖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결집해 있는 민주당이 태도를 ‘강경’으로 선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치권의 ‘보수 양당체제 고착화’와 ‘정치의 총체적 보수화’가 낳은 내적 한계라고 할 것이다. 일본의 대북정책 변화의 추동력은 외부로부터 올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일본인 납치 문제와 별도로 북-미 관계 진전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아베 내각은 테러대책특별조치법 연장을 ‘대미 카드’로 활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카드의 사용은 불가능하게 됐다. 즉, 유동적인 일본 국내 정치와 북-미 관계 및 남북 관계의 진전과 같은 외적 변수가 만난다면 일본의 대북정책이 크게 변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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