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구호단체 케어의 ‘기막힌 현실’ 고발, 식량 판매 자금으로 지원하는 정책이 현지 산업을 위협해</font>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미국은 현재 식량원조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다. 한 해 약 20억달러 상당의 식량을 세계 각지의 굶주린 이들에게 제공한다. 지구촌 식량원조의 절반가량을 매년 미국이 책임지고 있다. 지난 1954년 “농산물 수출시장 개발 및 확대”를 위해 시작된 미국의 식량원조 프로그램의 초기 수혜국 목록엔 ‘대한민국’도 끼어 있다. 미국의 식량원조 품목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 중 하나로 옥수수를 꼽을 수 있다.
미국 농민은 보조금으로 옥수수 재배
미국 농민들은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짓는다. 1973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절 옥수수 재배 농민에 대한 연방정부의 보조금 지급 제도가 시행된 이후, 중부 캔자스주와 아이오와주 등지에서 옥수수 농사가 대규모로 이뤄지고 있다. 영국 는 지난 5월17일치에서 “한 해 미 옥수수 재배 농가에 지급되는 보조금 총액만도 평균 50억~100억달러에 이른다”고 전했다. 막대한 보조금 제도는 옥수수 생산 과잉으로 이어진다. 얼마든지 생산해도 가격 보전이 이뤄지는 탓이다. 실제 미국산 옥수수 가격은 생산 단가의 절반가량에 불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물론 차액은 보조금으로 메워진다. 이런 과정에서 다시 이득을 챙기는 집단이 있다. 바로 싼값에 옥수수를 사들여 가공하는 거대 농업기업이다. 는 이를 두고 “옥수수 재배 농가에 대한 보조금은 사실상 거대 농업기업에 대한 보조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잉여생산물은 수출을 하든 원조를 하든 해외로 내보내야 한다. 해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20%가량은 이렇게 해외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이렇게 외국으로 나간 미국산 옥수수가 배고픈 이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 ‘순기능’보다, 빈곤의 악순환을 영속화하는 ‘역기능’이 더 높다는 지적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세계적인 구호단체 케어(CARE)가 최근 “미국의 잘못된 식량원조 정책 탓에 가난한 이들이 더욱 가난하게, 그래서 더욱 굶주리게 만드는 기막한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며 “미국 정부가 식량원조 관련 정책을 바꾸지 않는다면, 앞으로 미국의 식량원조 지원금을 받지 않겠다”고 비판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단체는 해마다 미국에서 약 4500만달러의 지원을 받고 있다.
현재 미국의 식량원조 절차는 대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우선 미국산 식량을 구입해, 대부분 미국 국적선으로 식량원조국으로 실어보낸다. 현지에 도착한 식량은 구호기관에 넘겨진다. 하지만 여기서 지켜야 할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지원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다. 즉, 미국산 농산물을 곧장 굶주린 이들에게 배급해주는 게 아니라, 일단 현지 시장에서 판매해 현금화한 뒤 이를 다시 구호물품 구입 자금으로 써야 한다는 얘기다. 이는 뭘 의미할까? 가 지난 8월16일 전한 케냐의 해바라기씨 기름 사례를 들여다보자.
농부인 월터 오티에노는 열두 자녀를 뒀다. 이 가운데 4명이 최근 몇 년 새 홍역으로 숨졌다. 영양실조에 허덕인 탓에 병마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오티에노는 지난해부터 빅토리아호 부근 말레라 계곡을 개간해 해바라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미국이 제공한 원조 식량을 팔아 구호자금을 마련한 CARE가 마련한 농민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를 입은 게다. CARE 쪽에선 오티에노를 비롯한 마을 농민들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구해 심고, 가꾸는 방법을 교육했다. 또 해바라기씨 기름을 생산하는 현지 업체와도 연결을 해줬다. 해바라기씨를 수확할 때쯤이면 오티에노의 삶이 나아질 수 있을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예상밖에 많았던 원조 식량의 효과
케어 쪽이 오티에노 등 케냐 농부들에게 지원한 프로그램은 미국이 원조 식량으로 내놓은 미국산 콩기름을 팔아 마련한 자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케냐 시장에 값싼 미국산 콩기름이 대량 유통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티에노가 생산한 해바라기씨로 기름을 만드는 업체에 미국산 콩기름은 경쟁상품이다. 수요가 많으면 가격이 오르지만, 공급이 넘치면 가격은 떨어진다. 값싼 미국산 콩기름이 시장에서 넘쳐나는 상황에서 해바라기씨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원료를 생산한 오티에노에게 피해가 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아프리카 남동부 말라위도 지난 2002년 식량사태를 겪으며 섣부르게 의지했던 식량원조가 가져온 파괴적 위력을 실감한 바 있다. 그해 흉년이 들면서 말라위에선 예년에 비해 식량 생산량이 60만t가량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국제사회는 즉각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원조량이 예상을 초과했다. 밀려든 원조 식량으로 말라위에선 식량 가격이 폭락했고, 1t당 250달러에 이르던 옥수수 값은 이듬해인 2003년 100달러까지 떨어졌다. 옥수수뿐 아니라 주식으로 꼽히는 카사바와 쌀값도 동반 폭락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난한 농민들이 감내해야 했다.
“더 이상의 식량원조는 없다.” 지난해 5월 심각한 가뭄 속에서도 에리트레아 정부가 국제 식량원조를 거부하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당시 에리트레아 정부는 긴급 구호가 필요한 자국민 수천 명을 제외하고는 식량 무료 배급을 중단시키는 한편, 식량 배급 활동을 벌여온 3개 국제 구호기관의 활동을 금지한 바 있다. 에리트레아 정부는 이즈음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내놓은 성명에서 “우리 국민이 식량원조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거나, 당연한 권리쯤으로 여기는 상황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13년여를 식량원조에 의지해오면서 ‘식량원조 의존증’이 문화로 자리잡는 것을 우려한 아페웨르키 이사이아스 정권의 결단이었다.
“미국산 원조 농산물을 구호자금으로 쓰기 위해 현금화하는 과정은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상황의 전형적인 사례다.” 나이로비 주재 록펠러재단 사무국장이자 농업경제학자인 피터 맷론은 와 한 인터뷰에서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미국의 국내 농업정책으로 인해 식량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굶주림을 뿌리 뽑기 위한 노력이 침해를 당하고 있다”며 “구호기관들은 미국의 원조정책으로 인해 원조 수혜국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면서도 여러 해 동안 이를 무시해왔다”고 비판했다. 케어의 결정이 관심을 끄는 이유다.
1천억달러를 쏟아부었음에도
지난 20년 동안 세계 각국이 빈곤국 식량원조에 쏟아부은 돈은 모두 1천억달러에 이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서 약 8억 명이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긴급구호를 제외한 식량원조는 ‘약’이 아니라 ‘독’이라는 분명한 현실 앞에, 산타클로스 행세를 하며 자기 잇속을 채워온 국제사회는 언제쯤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질 텐가. 굶주리는 인구는 해마다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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