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어에 영어를 섞어 쓰는 요르단 젊은이들과 엘리트층, 상류층의 과시적 문화
▣ 암만=글·사진 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키이팍?”(어떻게 지내?)
“아나 파인!”(나 잘 지내!)
“아이 원더 슈 비시이르 이자….”(내가…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얄라, 바이!”(잘 가!)
“오케이, 하비이비!”(그래, 잘 가!)
메신저에서 영어 표기 줄임말 유행
아랍인들이 즐겨 찾는 스타벅스 등 카페는 물론 공공장소에서 자주 접하는 장면이다. 아랍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말로 대화하는 현지인들을 무시로 보게 된다. 반미 문화가 ‘대세’라고 외부에 알려진 아랍·이슬람 지역에 영어가 곳곳에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요르단, 레바논 그리고 걸프 지역에서 이같은 문화가 번져가고 있다. ‘아나’(아랍어로 ‘나’)는 ‘파인’(영어로 ‘좋다, 잘 지낸다’는 뜻)을 만나 새로운 언어 현상을 만들어냈다. 이를 ‘아라비지’(Arabizi) 또는 ‘아라베시’(Arabeshi)라고 부른다.
아라비지와 아라베시는 중동의 새로운 문화 코드이다. 아라비지는 아랍을 뜻하는 아랍어 ‘아라비’(또는 아랍)과 영어를 뜻하는 아랍어 ‘잉글리지’의 합성어다. 아라베시는 ‘잉글리지’ 대신 영어 ‘잉글리시’를 합성한 게다. 모두 아랍어와 영어를 섞어서 쓰는 새로운 언어 표현 방식을 일컫는다.
“아라비지 말할 줄 아세요?” 요즘 뜨고 있는 질문이다. 아라비지 현상을 보도한 일부 언론 매체들은 요르단 젊은이들과 엘리트층, 상류층의 과시형 문화라고 꼬집는다. 그러나 아라비지는 20년 묵은 이집트 영화에서도 등장하고, 걸프 지역이나 다른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다. 결국 아라비지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인터넷과 이동통신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더 강하게 유행을 타고 있다.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은 새로운 언어 현상의 탄생을 자극했다. 이 지역 국민의 절반 이상이 이동통신을 사용하고 있다. 아랍어 문자 메시지 서비스가 안 되던 시절 ,아라비지는 그 대안으로 출발했다. 아랍어 문자 메시지 서비스가 대세인 지금도 젊은 층은 아랍어를 영문 표기로 옮겨 보내곤 한다. 인터넷으로 메신저 등을 할 때 아랍어보다 영어 표기를 이용한 줄임말이 유행한다.
“당신은 아라비지입니까?” 새로운 언어 현상은 새로운 계층을 낳는다. 아라비지를 주로 사용하는 젊은 층은 아예 ‘아라비지’로 불리고 있다. 처음엔 외국, 특히 미국 물 먹은 부유층 젊은이들을 빗대는 호칭으로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 한때 주목받던 소비지향적이고 감각적인 문화 행태를 누리던 ‘오렌지족’과는 달랐다. 오히려 지적 개성을 강조하고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신세대에 더 가까운 집단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중동판 강남족이나 문화 귀족을 일컫는 말이 됐다.
처음에는 정부 관리나 전통 유력 가문이 중심이던 상류층이 이 범위에 속했다. 그렇지만 요즘은 외국 생활 경험이 있는 유학파와 이민자, 신흥 부유층도 합류하고 있다. 신흥 부유층은 이라크전쟁 이후 벌어진 땅값, 집값 폭등과 대규모 프로젝트 등으로 부를 축적했다. 전통 명문 가문 출신이든 신흥 부자이든 이들은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뭔가 다른 정체성를 표현하려 한다. 그중 하나가 이들만의 공용어로서 영어와 아라비지의 사용이다.
쇼핑몰, 아랍어 못해도 ‘노 프로블럼’
“어, 저 사람 아랍인 아닌가요? 그런데 왜 현지인끼리 음식을 주문하면서 아랍어가 아닌 영어를 쓰고 있죠?” 암만 도심의 명물 메카몰을 찾은 한 여행자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중동의 중상류층이 즐겨 찾는 장소에선 어디서나 아라비지가 넘쳐난다. 음식을 주문할 때는 물론이고 서로 대화를 나눌 때도 아라비지가 대세다. 특별한 공간의 공용어가 돼가고 있는 셈이다. 서구풍 분위기가 넘쳐나는 카페와 갤러리, 쇼핑몰이 대표적이다. 이런 곳에서는 아랍어를 못해도 그야말로 ‘노 프로블럼’이다.
아라비지가 급격히 확산되면서 일부 네티즌들은 최근 인터넷 댓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아니 아랍어가 얼마나 아름다운데 그것을 버리고 이상한 국적 불명의 말을 사용해야 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다.”(아이디 올라), “언어는 의사소통인데, 영어가 편해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아이디 무함마드 캅바니). 그렇지만 온라인 공간에선 아라비지 사용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네티즌들이 절대적으로 더 많다. 일상에서 아라비지 사용자들은 평범한 아랍인들에게는 거북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뭣 좀 있다고 폼 잡으려 애써 아라비지를 사용하는 것 아니냐? 재수 없다~!” 그래서 일부 보수적인 무슬림들은 아라비지 사용을 종교적 금기인 ‘하람’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아라비지 문화의 메카는 단연 요르단이다. 요르단의 강남족 아라비지들은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을 노린 영문판 매체도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들 매체는 현지 아랍어판의 영문 번역본이 아니다. 처음부터 독립된 영문 매체로 창간된 게다. 나아가 아랍어판 매체가 담지 못하는 터부들을 과감하게 다루는 ‘대안 매체’로 나설 조짐도 보이고 있다. 이 영문 매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웰빙’과 ‘품격’을 강조한다. 하나같이 ‘품격 있는 당신을 위한 잡지’를 지향하고 있다.
등 그 수도 계속 늘고 있다. 영문 잡지 의 편집장 에바 무사는 “영문판 잡지 시장은 암만 서부 지역 등에 살고 있는, 미국 문화나 서구 문화에 익숙한 요르단 중상류층을 겨냥한 것”이라며 “지역 이슈를 영어판으로 다루고, 세계 이슈를 지역 정서에 담아내는 것이 우리 목표”라고 말했다.
‘품격 있는 당신을 위한’ 영문판 잡지
아라비지는 신분과 계층을 넘어 아랍 세계의 새로운 문화 코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중상류층의 문화를 동경하는 또 다른 소비 계층에도 아라비지는 하나의 유행이 되고 있다. 대학가에서, 중·고등학교에서 아라비지가 점점 힘을 발휘하고 있다. 아라비지를 말하면 아라비지 계층이 되는 것일까? ‘강남 공화국’ 한국에서 ‘강남족을 위한 영문판 매체’가 없다는 게 기특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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