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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에 쿠웨이트인이 없다

등록 2007-07-13 00:00 수정 2020-05-03 04:25

50℃ 넘는 땡볕 피해 긴 여름휴가 떠나는 걸프 지역 국민들, 인근 아랍국가들은 반짝 호황

▣ 암만(요르단)=글·사진 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불볕더위를 피해 탈출하라!’ 지금 걸프 연안 국가들은 ‘엑소더스’ 중이다.

한여름을 맞이한 걸프 지역의 각 공항은 휴가를 떠나는 피서객들로 넘쳐난다. 공항은 물론 국경까지 인산인해를 이룬다. 공항보다 더 번잡한 곳은 국경이다. 공항보다 국경을 통해 엑소더스를 감행하는 이들은 전체 해외 여행자 중 평균 85∼90%에 이른다. 현지인들이 빠져나간 뒤 걸프 지역 국가들의 대도시 중심부는 한산해진다. 국민의 절반 정도가 해외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쿠웨이트의 출입국 현황을 보면 80만여 명 정도가 휴가를 위해 해외로 나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500만 명 이상이 해외로 나갈 것으로 추산되고, 아랍에미리트 등도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걸프 지역에서 빚어지고 있는 엑소더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상 속의 진풍경이다. 피서를 위해 떠나는 엑소더스가 빚어내는 사회·경제적 분위기를 들여다보자.

웬만한 기업체·정부기관 휴가 기간은 3개월

일단 걸프 지역의 여름철은 무척 덥다. 더위도 급수가 있다. 불볕더위와 무더위가 있다. 습하지 않은 걸프 지역의 날씨는 그야말로 불가마, 불볕더위이다. 온도계는 50℃ 이하에 꽉 묶여 있지만, 실제 느끼는 온도는 이를 훌쩍 뛰어넘는다. 둘째, 국내에서 딱히 할 일이 없다. 냉방이 완비된 쇼핑몰 나들이 정도를 즐길 수 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그렇다고 국내에 있는 바닷가로 피서를 가는 것도 엄두를 낼 수 없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는데 화상 입기 십상이다. 그래서 심심하다.

‘탈출’을 감행한 걸프 지역 아랍인들의 목표는 생각하며 보는 관광보다는 레저이다. 날씨도 시원하고 볼거리도 많고 쉴 만한 곳도 가득한 나라 요르단을 찾거나, 볼거리도 넉넉하고 무엇보다 즐길 것이 많은 이집트 등이 1차 행선지다. 쿠웨이트인들은 요르단을,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은 이집트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면 동남아시아나 유럽을 향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통계 자료를 보면, 9·11 동시테러 이전까지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의 최고의 피서지는 미국이었다. 여름 휴가철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난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의 90%가 미국을 선택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9·11 이후 미국 비자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돼버린 탓이다. 최근엔 말레이시아 등 ‘유럽 분위기가 묻어나는 동남아시아’를 찾아가는 비율이 늘고 있다.

이 더운 계절에 요르단 암만은 걸프 지역에 비해 10∼15℃ 정도의 온도차를 보여준다. 이집트나 시리아, 레바논 모두가 문명과 문화유산으로 넘쳐난다. 이들 나라는 걸프 지역 아랍인들에게 매력적이다. 언어장벽도 없고, 물가도 자국보다 싸다. 긴 여름밤 잠 못 이루는 계절에 시간을 보내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걸프 지역의 웬만한 기업체나 정부기관은 연평균 휴가 기간이 3개월 정도이다. 1년에 일주일 안팎의 휴가가 주어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휴가 기간이다. 그 긴 기간 공무원이 자리를 비우면 업무가 마비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그러나 “담당자가 자리에 없어도 일이 굴러갈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비돼 있다”는 게 정부 쪽 설명이다. 쿠웨이트의 경우 공무원이나 종교계 등 주요 기관의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60% 이상이 다른 아랍국가 출신들이다. 이들은 쿠웨이트 국민들이 휴가를 떠나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역 신문마다 여행 관련 상품

긴 휴가 기간은 대부분 더운 여름철에 집중된다. 덕분에 여름철이면 걸프 국가에선 조금 과장해서 “현지인들을 쉽게 볼 수 없을 지경”이다. 휴가가 끝나는 8월 말 귀국 항공편 잡기는 하나의 전쟁이다. 우리의 귀성 차량 행렬이 빚어내는 혼잡 이상이다. 비행기 탑승 자리는 아예 없다. 쿠웨이트에 살고 있는 한 교민은 “8월 말에 쿠웨이트를 출발하는 항공편을 잡으려고 했는데 자리가 없어요. 하늘의 별 따기지요”라고 말했다. 쿠웨이트에서 오랜동안 사업을 해온 다른 교민도 “여름철에 쿠웨이트 사람 만나려면 요르단이나 이집트를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의 경우도 비슷하다.

휴가철이면 암만의 거리에선 성인 남성 1명 뒤에 검은 통옷으로 온몸을 감싼 여성들과 그 뒤를 따르는 아이들, 그 사이사이에 인도나 필리핀 등지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락없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등에서 온 돈 좀 있는 걸프 아랍 출신 관광객의 나들이 풍경이다. 걸프 지역 아랍인들의 엑소더스로 인해 여름철이면 인근 아랍국가들은 아연 성수기를 맞이한다. 대목을 기대하는 분위기는 지역 신문 지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먹는 광고와 여행 관련 상품 광고가 넘쳐난다. 평소의 4~5배 이상이다.

특히 여행상품 광고는 대부분의 주요 지역 신문에 매일 실린다. 전체 광고의 절반 이상이 여행상품과 관련됐다. 부동산 경기도 반짝 좋아진다. 집값이나 임대료는 상승하고 부동산 중개업소들도 호황이다. 가구상과 전자상가는 찾는 발걸음이 부쩍 늘어난다. 2~3개월 머무는 동안 사용할 가재도구를 챙기기 위해 걸프 지역 방문자들의 발걸음이 늘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번잡하기 그지없는 번화가는 더욱 복잡해진다. 자기 차를 직접 가져온 걸프 지역 방문자들의 서툰 운전도 도로 혼잡에 큰 ‘기여’를 한다.

“자기 나라에서 하지 못하는 걸 다 즐기고 싶어하는 것 같다.” 관광객을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위스키를 마시고, 나이트클럽을 아예 ‘일터’로 삼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탓이다. 주류 판매점들과 술집도 덩달아 호황이다. 여행사와 호텔, 임대 전문 숙박업소들도 환호성을 올린다. 여름철 한몫을 챙기려는 집주인들은 “싫으면 관두고”식으로 2~3개월 아파트나 빌라 임대료를 높게 올려 받기도 한다. 그렇게 가격을 올려 불러도 찾는 사우디아라비아나 걸프 아랍 방문자들이 줄을 선다. 바가지를 피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아예 집을 사두기도 한다. 적지 않은 걸프 지역 아랍인들이 요르단이나 다른 아랍국가에 ‘별장’으로 쓰는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이집트를 찾는 걸프 지역에서 온 방문자들은 다른 관광객들과는 관심사가 다르다. 카이로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마기드 라드완은 “(다른 지역) 관광객은 볼거리를 찾아다니는데, 이 사람들은 재밌는 것만 찾아다닌다”고 말했다. 반면 걸프 지역 관광객은 자신을 ‘봉’으로 여기는 악덕 상인들에 대한 불만을 호소한다. 사우디 젯다에서 온 사업가 칼리드 알하자지는 “이집트 사람들은 우리를 아무것도 모르는 돈만 쓰는 사람들로 몰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걸프 지역 관광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볼거리 대신 재밌는 것만 찾아다녀요”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여름을 통째로 휴가로 불태우는 걸프 지역 아랍인들에게는 이 말도 통하지 않는다. 올여름 요르단에선 200만 명, 이집트에선 150만 명의 걸프 지역 관광객을 기대하고 있다. 두 나라를 찾는 걸프 지역 관광객은 연간 관광객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로 인해 이렇게 여름철은 뜨겁다. 걸프 지역 아랍인들의 피서 비결은 ‘일단 집을 떠나는 것’이란 등식이 굳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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