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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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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민족주의, 미소짓다

등록 2007-06-29 00:00 수정 2020-05-03 04:25

6월10일 총선으로 자유당을 누르고 제1당이 된 ‘블람스 기독당’의 정체는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유럽 정치를 들여다보면 이 나라에 있는 정당이 저 나라에도 있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말하자면 극우당, 자유당, 기독당, 사회당, 녹색당 등은 유럽 어느 나라를 가나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정당들이다. ‘민주당’이라는 이름은 거의 모든 정당 이념에 포함되기 때문에 정당의 이념을 차별화하는 데는 별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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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실업률·성장률 우수했지만…

이들은 유럽의회에도 국경을 초월해 이념별로 뭉친다. 하지만 그 구분이 다소 애매한 경우도 있다. 특히 자유당과 기독당의 이념 구분이 모호하다. 짐작건대 두 정당 모두 중도 우파이거나 보수적이겠거니 하는 정도의 감만 올 뿐 무슨 차이가 있는지 구분은 쉽지가 않다. 기독교 문화가 정치이념으로 흡수되지 않은 우리로선 특히 기독당의 존재가 생소하다. 하지만 기독당은 유럽에서 매우 흔한 정당이다. 벨기에뿐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아일랜드 등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 있다. 영국에서는 보수당이 가장 유사하다.

지난 6월10일 벨기에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의회에 진출한 정당이 11개나 되는 이번 선거에선 ‘블람스 기독당’(CD&V)이 30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됐다. 지난 2003년 선거와 비교해볼 때 하원(전체 150석) 중 자유당 계열은 49석에서 41석으로 줄었으나, 기독당 계열은 30석에서 40석으로 의석이 늘어났다. 보통 우파 정당이라 하면 자유당·기독당·극우당 등을 치니, 이번 선거에서 벨기에 우파가 얻은 의석은 19석에서 23석으로 4석 늘린 극우당까지 합쳐 모두 104석이나 된다. 혹자는 “이제 벨기에에는 완전히 우파 정부가 들어서겠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우파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사회당이나 녹색당이 추구하는 정치 지향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점에서는 맞는 말이다. 다만 같은 우파라 해도 ‘자유당’에서 ‘기독당’으로의 정권 교체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고 한 번쯤 의문을 가질 수는 있다.

먼저 그동안 집권했던 ‘자유당’의 ‘정체’에 대한 물음부터 해야 한다. 벨기에의 경우, 자유당 이념을 가진 정당은 플라망권의 ‘블람스 자유민주당’(VLD)과 왈룬권의 ‘개혁운동’(MR)이다. 자유당의 정치 이념은 자유시장 원칙에 있다. 경제관이 정치관으로 파생된 경우다. 소득세를 줄이고 시장을 활성화해 실업자를 줄이고 성장을 높이겠다는 게 주된 이념이다. 실제로 벨기에 경제는 자유당 집권 뒤 호조를 보였다. 지난 2005년에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5%였던 것이 2006년에는 3.0%로 높아졌고, 올해도 2.9% 선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실업률은 8.4%에서 8.2%로, 다시 올해는 7.4%까지 내려갈 것으로 예상된다. 인플레이션도 매년 2.5%, 2.3%로 낮아졌고, 올해는 1.3%까지 떨어질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모두 유럽 평균보다 ‘우수한 성적’이다.

기독당, “왈룬과 플라망은 갈라서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당’은 어떤가? 벨기에 기독당은 지역에 따라 플라망권의 ‘블람스 기독당’과 왈룬권의 ‘인도주의 민주센터’(CDH)로 나뉜다. 그러나 우파라 해도 자유당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즉, 경제보다는 사회와 문화에 그 무게를 둔다. 민족적·사회적·문화적 동질감을 찾는 데 이념의 지향이 있다. 낙태 반대와 동성애 금지처럼 보수성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지향성은 총선을 승리로 이끈 ‘블람스 기독당’의 이브 레테름(46) 총재의 언행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언어와 역사가 다른 왈룬과 플라망이 서로 갈라서야 한다고 믿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벨기에 건국 176주년 기념행사에서 “왕, 축구, 맥주 말고 벨기에가 하나라는 증거가 무엇인가?”라고 연방제를 폄하하는 발언을 해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지난여름에는 프랑스 일간 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코폰(프랑스어 사용자)들은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 네덜란드어를 못한다”고 말해 프랑스어권 주민을 자극하기도 했다. 또 플라망 의회 연설에선 “나는 왕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왕정을 폐지하고, 자치독립을 주장하는 플라망권의 입장을 강력하게 대변하기도 했다. 이런 발언들은 이번 선거에서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플라망인들에게 큰 인기몰이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선거에 나서면서 블람스 기독당이 내건 슬로건은 ‘현대화 구조 개혁’이었다. 지금도 벨기에 지방 정부는 공공사업, 운송, 농업, 환경 분야 등에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레테름 총재는 이를 더 넓혀 노동, 사법, 보건 업무까지 지방정부가 일임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헌법 개정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독립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지 기반인 플라망의 자율권을 더 확보하겠다는 계산에서다. 그의 지방 분권화 전략은 역설적으로 사회 배분에는 소홀할 가능성이 많다. 그동안 벨기에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플라망권이 가난한 왈룬권에 경제적 지원을 많이 해왔는데, 이제는 지방 분권이라는 명목으로 사회보장은 지역별로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정책을 추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제 쪽은 어떨까? 그는 “벨기에의 노동복지 정책은 실업자들에게 일할 의욕을 주지 않는다. 정부 투자도 실업 급여보다는 재훈련 사업 등 고용을 촉진하는 쪽으로 바꿀 것”이라며 강력한 실업정책 개혁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 바 있다. 실업률도, 경제구조도 플라망권보다 약세인 왈룬에는 당장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레테름 총재의 경제개혁은 시장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자유당과 맥이 닿지만, 개방과 확대로 경제를 활성화한다기보다는 재활과 훈련으로 경제·사회 구조를 바꾸어 부유층의 부담을 덜겠다는 점에서 방법상 차이가 있다. EU와의 관계에서는 친EU적이었던 베르호프스타트 전 총리를 대부분 따를 것으로 예측된다. 다만 터키의 EU 가입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표면적으로는 정세가 불안한 중동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터키에 대한 강한 반감 때문인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이는 그의 우파적 기질이 문화적 동질성과 민족주의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른 당과 연합하면 공약 저항받을 듯

이번 선거는 지난 몇 년간 확장된 벨기에의 민족주의, 분리·독립 운동 강화의 연장선상에서 치러졌다. 경제가 살아나고,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고, 통합을 외쳤던 베르호프스타트였지만 민족주의 물결은 견뎌내지를 못했다. 그러나 벨기에 정치의 미래가 레테름 총재의 뜻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블람스 민주당’이 제1당은 됐지만, 그 지지율은 전체의 31%밖에 안 된다.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마음 맞는 정당과 연정을 구성해야 한다. 안정적인 내각을 위해서는 자유당이나 사회당 등과 협력해야 하는데, 이런 가운데 레테름 총재의 공약은 많은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베르호프스타트 전 총재의 자유당이 사회당과 연정을 하면서 그 이념이 중화되고 깎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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