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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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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 중 1명, 이라크를 떠나다

등록 2007-04-27 00:00 수정 2020-05-03 04:24

하루에 차량폭탄 공격으로 200명 사망하는 아수라장, 떠나는 사람은 팔레스타인 난민 이래 최대 규모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미국 버지니아공과대학 총기난사 사건에 전세계의 눈과 귀가 쏠려 있던 4월18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도 비보가 날아들었다. 참극의 풍경은 분명 낯익은 것이었지만, 그 정도는 ‘바그다드발’임을 감안하더라도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이날 오후 바그다드 시내 네 곳에서 차량폭탄 공격이 이어지면서 무고한 시민 200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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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난사 사건과 같은 날…

시아파와 쿠르드족 주민들이 엉켜 사는 바그다드 서부 사드리야의 시장 어귀에선 이날 오후 4시5분께 차량폭탄이 터져 삽시간에 140명이 숨지고, 150여 명이 다쳤다. 목격자들은 과 한 인터뷰에서 “미니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산 채로 불에 타 목숨을 잃었지만, 폭발 직후 이들을 구해낼 수 없었다”며 “폭발로 떨어져나간 살점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울부짖는 여성들의 외침이 도처에 메아리쳤다”고 말했다.

지난 2월14일 바그다드 치안 확보 작전을 시작한 미군 당국은 그동안 “치안 상황이 나아지고 있고, 종파 간 유혈사태도 잦아들기 시작했다”고 강조해왔다. 4년여째 변치 않는 근거 없는 낙관론의 재탕이었다. 채소와 고기상이 밀집해 있는 사드리야 시장에선 지난 2월3일에도 강력한 자살 차량폭탄 공격이 벌어져 137명이 한꺼번에 숨진 바 있다. 4월18일 사건의 희생자 가운데는 2월의 폭발로 인해 무너져내린 시장을 복구하는 작업에 나선 건설노동자도 상당수 있었다.

사드리야 시장에서 폭탄 공격이 벌어지기 불과 30분 전엔 바그다드 외곽의 시아파 집단 거주 지역인 사드르 시티 들머리의 경찰 검문소에서 강력한 자살폭탄 공격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35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75명이 다쳤다. 또 다른 시아파 집단 거주지인 바그다드 중심부 카라다 지역에선 주차돼 있던 차량이 폭발하면서 10명이 숨지고, 15명이 다쳤다. 〈AP통신〉은 현지 경찰 당국자의 말을 따 “수니파를 겨냥한 시아파의 공세가 주춤한 사이, 시아파를 겨냥한 수니파의 유혈 공세가 불을 뿜고 있다”며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시아파가 보복에 나설 게 뻔하고, 그럴 경우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최악의 종파 간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전했다.

이날 잇따른 차량폭탄 공격은 누리 말리키 이라크 총리가 “올해 안에 이라크 전역에서 이라크 정부가 치안통제권을 넘겨받게 될 것”이라고 밝힌 뒤 불과 몇 시간 만에 터져나왔다. 10주차를 넘어선 미군 주도의 ‘바그다드 치안확보 작전’의 참담한 실패를 극명히 보여준 셈이다. 2만여 명의 미군 병력을 증강 투입하고도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미국 쪽에선 서서히 ‘참을성’을 잃어가는 분위기다. 사건 발생 이튿날인 4월19일 바그다드를 전격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이 “미국이 이라크에 무한정 역량을 쏟아부을 수는 없으며, 이라크 정부는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서둘러 실행에 옮기는 게 좋을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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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치안확보 작전’의 참담한 실패

미군의 공세와 함께 잠시 주춤했던 종파 간 핏빛 보복극도 이미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영국 는 4월20일치 기사에서 “두 달여 전 미국이 팡파르를 울리며 시작했던 치안확보 작전에도 불구하고 종파 간 보복 살해가 바그다드의 거리로 돌아왔다”며 “4월16~18일 사흘 동안 바그다드 시내에서만 고문당한 흔적이 있는 주검이 모두 67구나 발견됐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또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집 앞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주검을 치우는 것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수니파 집단 거주지이자 상업 중심지인 바그다드 동부 아다미야 지역에선 거리에 버려진 주검이 최근 여러 날 동안 방치돼 있기도 했다”고 전했다.

썩어가는 주검조차 치우지 못할 정도로 공포와 불안감이 지배하고 있는 땅, 종파 간 유혈 보복극이 날로 더해가는 도시를 견디다 못한 이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길을 나선다. 지난해 2월 사마라의 시아파 성지인 아스카리아 사원 폭파 사건 이후 종파 간 폭력사태가 불을 뿜으면서 급증하기 시작한 이라크 난민은 벌써 20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국경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이라크 각지를 떠돌고 있는 ‘실향민’도 190만 명에 이른다는 게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이하 유엔난민기구)의 지적이다. 이라크 인구가 약 26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점에 비춰, 적어도 이라크인 7명 가운데 1명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피난에 나섰다는 얘기가 된다.

유엔난민기구가 4월16~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라크 난민 관련 특별회의를 연 것은 뒤늦게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60여 개국에서 온 450여 명의 대표단은 이틀간의 회의를 통해 이라크 내부의 190만 명 실향민과 이웃나라로 탈출한 200만 명 난민, 특히 여성과 어린이 난민들에게 긴급한 인도주의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에 일단 공감을 표시했다. 이라크 정부 대표단도 자국 난민들의 의료·교육 서비스 제공과 각종 증빙서류 발급 지원을 위해 난민이 몰린 국가에 난민 전담 사무소를 설치하는 한편, 2500만달러 상당의 지원 프로그램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유엔난민기구는 현재 이라크 난민이 시리아에 120만 명, 요르단에 75만 명, 이란에 5만4천 명, 레바논에 4만 명, 터키에 1만 명가량 머물고 있다고 추정한다.

“이라크 난민사태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수많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난민으로 떠돌기 시작한 이래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최대 규모의 대량 난민사태다. 지금도 매달 5만 명에 이르는 이라크인들이 피난길에 오르고 있다.” 회의 폐막에 앞서 안토니오 구테레스 난민고등판무관은 “국제사회는 그간 이라크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상에만 집중한 나머지 인도적 재난이란 측면을 간과해왔다”며 “이라크 안팎에서 400만 명이 정든 삶의 터전을 잃고 매우 어려운 형편에 있다는 점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으며, 지금껏 우리 모두는 이들에게 사실상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유엔난민기구, 전담 사무소 설치

구테레스 고등판무관은 “유엔도 그동안 안전 문제로 이라크 내에서 인도주의적 지원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최근에 유엔과 협력단체들이 승인한 이라크 전략 계획안을 통해 이라크 내부에서 이뤄지는 지원활동을 더욱 활성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침공 첫 해인 지난 2003년 8월 바그다드 유엔 대표부를 겨냥한 폭탄 공격으로 브라질 출신의 세르지오 비에이라 대표를 포함해 22명의 직원이 희생된 이후 유엔난민기구의 이라크 지원활동은 이웃나라인 요르단에서 ‘원격’으로 이뤄졌다. 유엔난민기구는 이번 회의 폐막에 앞서 “조만간 바그다드에 상주할 대표를 임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매일이다시피 이어지는 유혈충돌과 자살폭탄 공격으로 피 흘리고 있는 이라크인들을 보듬어줄 한 줄기 햇살은 될 수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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