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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아랍어만으로 넉넉해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9·11 동시테러 이후 아랍 관광객 급속히 증가… 입원실에서 방송 볼 수 있는 병원도 성황

▣ 방콕=글·사진 김동문 전문위원yahiya@hanmail.net

‘싸왓디 캅.’(타이) ‘키이팍.’(페르시아만 지역) ‘이자이 약.’(이집트)

지난 3월 중순 방문한 타이의 거리에서 뜻밖에도 아랍 각국의 사투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수도 방콕 시내 한복판에서 타이어 인사에 더해 ‘안녕하세요’를 뜻하는 페르시아만 연안과 이집트 등 아랍 각국의 사투리가 어우러지고 있었다. 9·11 동시테러 이후 아랍인들 사이에서 불고 있다는 동남아 열풍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아랍어 인사

방콕 시내의 나나 플라자와 수쿰윗 3가가 만나는 주변 지역은 우리나라의 역 앞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호텔과 여인숙 등 숙박시설은 물론이고 쇼핑센터와 전통 상가, 상점, 식당과 주점, 카페 등이 넘쳐난다. 밤이면 각종 클럽들로 불야성을 이룬다. 그 한복판에 ‘아랍 거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거리에 들어서면 이곳이 불교국가 타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을 지경이다. 아랍어 간판은 물론이고 아랍 음식점과 아랍인들이 현지인들과, 또 다른 외국인들과 뒤섞여 있는 모습이 흡사 아랍의 여느 도시에 온 느낌이다. 알라딘의 마술램프에서 솟아나온 외계인 양 신기하기까지 하다. 거리를 걷다 보면 현지어인 타이어보다 아랍어가 더 많이 들려온다. 아랍어만으로도 넉넉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이 돼 있는 게다.

아랍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그레이스 호텔’로 들어섰다. 호텔 안은 바깥 거리보다 아랍풍이 더욱 거세다. 일하는 직원들을 제외하면 대개가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등지에서 온 아랍인들로 북적인다. 리셉션에는 ‘맘누앗 타드킨’(금연)이라는 아랍어 안내판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로비 주변은 물론 호텔에 딸린 각종 상점들과 서비스 업소는 타이어와 아랍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아마 이 호텔 고객의 80~90%는 아랍인들일 겁니다. 다른 호텔보다 아랍인들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조건들을 갖췄고, 숙박비도 다른 곳보다 저렴하기 때문이죠.” 호텔에 딸린 양복점 데어 헤르(Der Herr)에서 일하는 한 파키스탄 직원의 얘기다.

그레이스 호텔을 왼쪽으로 끼고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골목을 오가는 이들 대다수가 역시 아랍인들이다. 골목골목 가득하게 아랍 냄새와 문화의 향취가 느껴진다. ‘낫세르 엘마스리’라는 카페에 들어서자 아랍 전통 복장을 한 무슬림들이 여기저기서 물담배를 피워물고 있다. 어깨를 어긋 맞대고 볼을 비비는 아랍식 인사를 나누는 이들도 있다.

그 곁으로 이슬람법에 따라 도살한 고기만을 취급하는 케밥 등 아랍식 음식점들이 이어진다. ‘마뜨암 알이라키’ 같은 이라크 음식 전문 식당뿐만 아니라 각종 아랍 음식과 이슬람 음식을 취급하는 식당가가 펼쳐진다. 값싼 여인숙은 물론 아랍 각국을 잇는 항공권을 판매하는 티켓 대리점들도 많다. 무슬림 여성의 머리 덮개인 히잡 차림을 한 타이 여성들이 업무를 보는 경우도 상당수다. 여행사 안에 들어서면 ‘케이프 할락’(안녕하세요) 하고 아랍어 인사를 건넨다. 시장 골목 한켠에는 주요 아랍어 신문을 복사해 판매하는 좌판대까지 들어서 있다. 넘쳐나는 아랍풍 분위기가 신기한 듯 주변을 살피는 제3국 여행자들의 눈길도 인상적이다.

지난해 아랍인 10만명 범룽랏 병원 찾아

“왜 이 지역이 아랍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나요?” 같은 질문을 던져보지만 진단과 반응은 다양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입씨름과도 같았다. 이집트 분위기가 풍기는 식당 ‘알아흐람’에서 만난 아흐메드는 “주변에 좋은 시설의 병원들이 많고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으며 아랍 음식점들도 많은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이곳이 점점 아랍화돼가는 것”이라며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랍 거리가 점점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9·11 동시테러 이후 아랍 방문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설명은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9·11 동시테러가 아랍인들의 ‘동남아 열풍’에 중요한 변수였다는 점이다. 9·11 이후 서구 출입에 어려움이 생긴데다, 물가도 비싸고 환대하는 분위기도 아닌 유럽보다 상대적으로 물가도 싸고 볼거리와 살 것도 많은 동남아시아를 선호하게 됐다는 게다.

여기에 치료를 받기 위해 동남아를 찾는 아랍인 ‘의료관광객’이 늘고 있는 것도 ‘아랍화’를 부추기고 있다. 대표적인 명소는 범룽랏 병원이다. 지난해 10만여 명의 아랍인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고, 올 들어서도 아랍 외래 환자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게 병원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외래 환자들은 대체로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 등 페르시아만 연안국가 출신이다. 범룽랏 병원은 아랍어 통역 직원을 통해 아랍인들에게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고, 아랍어로 쓰인 수술 동의서를 비롯한 서류 양식도 비치하고 있었다. 입원실에선 등 아랍 위성방송도 볼 수 있단다.

아랍 무슬림들의 방콕 나들이가 늘면서 타이 현지 무슬림들에게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타이 무슬림은 전체 인구의 약 7%인 600만여 명에 이르며, 전국 76개 주 중 64개 주에 걸쳐 3524곳의 이슬람 사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2255곳의 사원이 말레이시아와 접한 사툰·얄라·빠따니·송클라·나라티왓 등 남부 5개 주에 몰려 있고, 55곳이 방콕에 자리하고 있다.

타이 무슬림들은 소수파가 겪는 각종 어려움을 안고 살고 있다. 이슬람과 테러를 동일시하는 경계의 시선이 따가운데다,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진영이 방콕까지 세를 넓힐지 모른다는 정부의 우려도 무슬림들을 위축시키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불고 있는 아랍인들의 동남아 열풍은 타이 무슬림들이 무슬림으로서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일상에서 이슬람을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5년 19만여 명이던 아랍 지역 출신 관광객들이 지난해에는 거의 40% 증가한 27만여 명에 이르면서, 아랍어를 구사할 줄 아는 타이 무슬림들의 일자리도 많아지고 있다.

타이 부동산 재벌은 문화공간 설립

‘아랍 거리’는 아랍인들은 물론 다국적 문화공간을 맛보려는 다양한 국적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확대일로에 있다. 이런 ‘아랍 거리’의 시장성에 주목한 것은 역시 ‘자본’이었다. 벌써부터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기업가가 타이의 부동산 재벌사 라즈타니와 제휴해 앞으로 5년 안에 ‘아랍 거리’ 주변에 다목적 문화공간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호텔과 콘도미니엄, 상가와 이슬람 사원 등이 포함되는 이 개발 프로젝트에는 모두 1억6천만달러가 투자될 예정이다. 방콕의 아랍 열풍이 더욱 거세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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