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니파·시아파·쿠르드족이 자치권과 석유 수입을 나눠 갖는 ‘로렌스식’ 해법 논란…미국 통제만 강화하는 조처라는 비판과 지역적 분할은 불가능하다는 반론 만만찮아
▣ 정의길 기자 한겨레 국제팀 egil@hani.co.kr
영화사에서 뛰어난 대작으로 남아 있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에서 명장면으로 꼽히는 것이 주인공 로렌스가 사막을 건너 동맹을 맺을 다른 아랍부족에 도착하는 장면이다. 죽음의 사막을 건너 목적지에 도달하는 로렌스를 카메라는 롱샷으로 멀리서부터 조그만 점으로 잡기 시작한다. 사막의 먼지바람 속에서 서서히 부각되는 낙타를 탄 그의 모습은 아랍부족들에게 약속을 지키려는 그의 신뢰성을 은유한다.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홀브룩이 제안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영국군 장교 토머스 로렌스는 1차 대전 당시 독일 편에 선 오스만터키 제국 치하의 아랍족들에게 터키와 싸우면 통일 아랍국가를 건설해주겠다며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종전 뒤인 1916년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어, 오스만터키가 통치했던 아랍 영토를 갈가리 찢어 나눠가졌다. 지금의 이라크 핵심 지역, 즉 바그다드와 쿠웨이트까지 포함한 유전지대는 영국의 직접 통치 지역으로 규정됐다. 석유 때문이다. 당시 이라크는 아라비아반도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채굴된 지역이었다. 지금 최대 보존량과 생산량을 자랑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20여 년이나 지나야 석유가 개발된다.
침공 4년째인데도 좀처럼 출구가 안 보여 이라크 철군론이 힘을 얻어가던 지난해 10월 초. 리처드 홀브룩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는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을 에 게재했다.
“대통령 각하. 중간선거가 끝나자마자 각하는… 아마 린든 존슨 대통령이 1965년 베트남전 확전을 결정한 이래 어떤 대통령이 했던 것보다 복잡한 결정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라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내야 합니다. …정치적 해결책으로써, 누리 말리키 총리의 입지를 개선하려는 미국의 노력보다 훨씬 야심적인 것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조 바이든, 레스 겔브 상원의원은 1995년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한 협상에 빗대 ‘데이턴 방식’의 해결책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장해왔습니다. 즉, 3대 그룹에게 각각 충분한 자치를 주는 느슨한 연방제, 그리고 석유수입의 공유에 관한 협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라크가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으로 나뉘어 내전상태에 있으니, 이들을 분리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에게 충분한 자치권과 이라크를 지탱하는 재화인 석유수입도 인구에 따라 나눠주자는 것이다.
홀브룩 전 대사는 미 민주당의 최고 외교통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평화협정을 중재해 타결시켰다. 데이턴 협정은 이슬람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로 나뉘어 8년 가까이 끔찍한 내전을 치른 보스니아를 이 세 민족의 연방으로 분리시킨 협정이다. 세 민족이 사는 곳은 엉켜 있어 지역적으로 명확히 분리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데이턴 협정은 거미줄과 미로와 같은 분할선을 긋고, 권력분할 및 자원공유에 관한 복잡하고 정교한 제도를 규정했다.
중간선거 직전인 11월 초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이라크 석유자원 수입을 지역 간에 분할 통제할 것이라고 말해, 이라크 분할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관측을 낳았다. 그는 11월3일 과 한 인터뷰에서 “이라크는 자원 이용에 지금과 같은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갖지 않을 것”이라며 “이런 방식이 좋은 듯한데, 석유에 대한 중앙집권적 시스템은 부패를 낳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이라크인들이 “다른 중동 국가들보다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크 연방제를 위해 나중에 나온 아이디어인 석유수입 분배를 먼저 언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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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라크 석유법은 지방 당국에 석유 개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다국적 자본의 진출을 훨씬 쉽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누리 말리키 이라크 총리(가운데 안경 쓴 이)가 바그다드 중심가 ‘안전지대’의 정부청사에서 각료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사진/ 연합/EPA/THAIER AL-SUDANI/POOL)
국유화 종식시키는 석유법 승인
지난 2월26일 이라크 정부 내각은 인구에 따라 지방 당국에 석유수입을 나눠주는 석유법을 승인했다. 5월 안에 의회를 통과시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연방제는 이미 지난해 10월 개헌을 통해 확정됐다. 다만 18개월의 유예 기간을 뒀다. 이라크 유전은 대부분 시아파가 거주하는 남부와 쿠르드족이 사는 북부에 있다. 중부와 서부에 거주하는 수니파는 석유자원 혜택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우려해왔다. 법안은 연방석유·가스위원회가 제정한 규정과 절차에 따라, 지방 당국이 석유개발 협상을 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지방 당국이 석유개발에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라크 석유자원에 대한 미국의 입김이 더욱 커질 것이란 전망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라크는 1972년 석유자원 국유화를 실시해 외국 자본 진출을 막아왔다. 새 법안은 △외국 업체에 최장 30여 년간 채굴권 부여 △외국 업체의 개발·운송·정유·서비스업 전반 참여 △개발 결정권을 쥔 연방석유·가스위원회에 석유업체 경영진 참여 등을 담았다. 홍콩 는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 석유 메이저들이 작성에 간여한 이라크 석유법은 애초 아랍어가 아닌 영문으로 쓰였다며 “사실상 미국 법”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석유 메이저들한테 법안 초안이 회람될 때에도 이라크 의원들한테는 내용이 전해지지 않았다.
이라크 유전은 표층에 낮게 묻혀 있는데다 질이 좋아, 개발 비용에 비해 높은 가격의 석유를 제공한다. 영국 석유탐사 업체인 ‘페트럴리소시스’의 존 틸링 회장은 “이라크에서는 1달러면 석유 1배럴을 생산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영국 일간 는 이라크 정부가 석유 메이저들한테 받을 몫은 생산량의 20%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라크의 연방제란 결국 이라크란 국가를 사실상 형해화하고, 이라크의 지정학적 전략가치와 석유자원에 대한 미국의 통제만을 강화하는 조처라는 분석이 당연히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일부 이라크 의원들과 석유노조는 석유법이 “국익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 세력을 모으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회의론이 크다. 분할된 이라크, 느슨한 연방제의 이라크가 분쟁 종식을 담보할 수 없고, 오히려 분쟁을 격화시킬 것이란 주장이다.
이라크 임시정부의 미국대표부 대표였던 랜드 알라힘 이라크재단 사무총장은 에 게재한 홀브룩에 대한 반론에서 “이라크의 모든 지역에서 각종 종파와 민족들이 섞여 살고 있어, 지역적 분할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서로 분리되는 와중에 200만 명이 죽고 110만 명이 추방됐다. 무엇보다도 이웃 국가들의 태도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당장 터키는 쿠르드 자치국가가 허용되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쿠르드족 문제에서 물불을 안 가리는 편인 터키는 자국의 쿠르드족에 영향을 줄 쿠르드족 국가 탄생을 막으려고 침공도 불사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본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를 보라
로렌스의 중동 구상에서도 이라크란 나라는 있었다. 지금의 이라크 영토 안 티그리스강 북쪽을 수니파 아랍족이 아닌 다른 종파와 소수민족을 위한 국가 영토로 설정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보다는 인구와 종족, 상업로에 따라 국경선을 그은 것이다. 자신의 구상을 빌려 20세기 초 제국주의적 영토 분할과 국경선 획정을 재연하는 미국을 본다면 로렌스는 어떤 생각을 할까?
이라크에서는 내년 여름이면 유예됐던 연방제가 실시된다. 과연 그 연방제는 이라크를 해체하는 폭탄이 될 것인지, 이라크란 나라의 틀을 유지할 접착제가 될 것인지 확인하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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