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배지 반이 불법으로 규정된 데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아슬아슬한 수준…농민 지지로 정권 잡았으나 미국 지원도 포기 못하는 정부의 고민은 깊어
▣ 코차밤바(볼리비아)=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s@yahoo.co.kr
하영식의 남미기행④
야간버스를 이용해 밤을 꼬박 지새워 볼리비아의 두 번째 대도시인 코차밤바로 가던 길이었다. 낡은 고물버스에는 빈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이 꽉 들어차 말 그대로 만원이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게다가 비포장 산길을 달려야 했기에 차체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어쨌든 지쳐서 잠에 떨어졌고, 한참을 비몽사몽 속에 헤매던 중이었다. 갑자기 버스가 멈춰서는 느낌이 왔다. 물론 처음에는 버스가 정류장에 닿았으려니 생각했지만, 사람들의 술렁이는 소리로 인해 눈이 떠졌다.
동틀녘, 버스를 막아선 농민들
새벽 3시30분이었고, 사위는 칠흑처럼 캄캄했다. 앞쪽 100m쯤 떨어진 곳에서 모닥불을 둘러싸고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를 점령해버린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알아본 버스 안의 승객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무장강도 일당이 길가는 차량을 세우고 금품을 갈취하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한동안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나이 든 수녀는 돈을 갹출해 이들에게 주고 길을 통과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타고 온 버스만이 아니라 다른 버스들도 뒤편에 줄을 잇고 정차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트럭과 승용차 등 모두 20대 이상이 길게 줄을 늘이고 서 있었다. 잠시 뒤 반대편 길에서 승용차가 우리 쪽으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코차밤바의 TV 방송사에서 상황을 취재하러 온 모양이었다.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인근에 사는 코카를 재배하는 30여 명의 농민들이 차량통행을 가로막고서 시위를 벌이는 중이었다. 이들은 여전히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서 있기를 3시간여, 멀리 동이 터오면서 날이 밝기 시작했다. 버스에 남아 있던 승객들은 모두 밖으로 나왔다. 뒤에 줄지어 있던 다른 버스의 승객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버스에서 내려와 도로를 차단한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닥불 주위에 있던 코카 재배 농민들의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요구사항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정책인 코카 생산면적 제한을 철폐하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였다. 미국의 압력으로 코카 생산면적이 제한된 데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그렇지만 한밤중에 몇 시간씩이나 시위대에 볼모로 잡힌 버스 승객들의 불만도 대단했다. 모닥불 주변으로 모여든 버스 승객들의 수가 100여 명으로 불어나자, 시위대 쪽에선 위기감을 느꼈던지 격한 함성을 지르며 돌을 던지기도 했다. 이에 맞서 버스 승객들도 맞고함을 치면서 후퇴하기 시작했고, 일대는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조성됐다. 기다리기에 지친 버스 승객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시위대 쪽에서도 세가 불리함을 깨달았는지 ‘15분간 도로 개방’을 외쳤다. 곧 버스들은 쏜살같이 도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탄 버스도 3시간여 만에 가까스로 도로를 빠져나왔다.
이 사건으로 이튿날부터 볼리비아에선 코카 문제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2주일이 지난 11월 중순께, 필자는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당시 코카 재배 농민들의 시위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 정부 쪽 협상단 대표인 정무부 산하 사회안전국의 일데스 세하스 국장을 만났다. 그는 시위 농민들의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부로서는 시위대의 요구를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미 코카 재배면적은 법률로 정해져 있어 이를 변경하기란 쉽지 않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세하스 국장은 또 현재의 시위 지역 상황에 대해선 “가라앉아 평온한 상태”라고 밝혔으나, “언젠가는 다시 폭발할 것”이라는 전망을 잊지 않았다. 그와 만나면서 코카 재배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획득한 모랄레스 정부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코카는 코카인이 아니다”
볼리비아에선 코카가 마약이라는 인식을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코카잎을 씹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항상 목격할 수 있다. 필자도 이들이 내민 코카잎을 함께 씹기도 했다. 이곳에서 코카는 단지 음식이나 기호식품이다. 코카잎를 주원료로 한 차는 물론이려니와 와인이나 비누, 샴푸, 치약에서 쿠키나 인스턴트 식품까지 개발돼 상품화돼 있다.
안데스 지역에서 코카 농사가 시작된 것은 5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문가들은 고산병이나 허기, 추위를 이기고자 케차나 아이마라 지역의 인디오들이 코카잎을 씹기 시작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볼리비아 인디오들의 전통으로 남아서, 공동체 의식이나 질병치료, 육체노동의 현장 등에서 항상 등장한다.
안데스 지역 코카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은 1860년 한 독일 화학자가 코카인을 추출하면서였다. 코카잎이 함유하는 코카인 성분은 단지 0.1~0.8%지만, 코카잎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용되는 중독성 마약인 코카인의 가장 기본적인 성분으로 여겨지면서 코카의 이미지는 손상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들어 코카 수요가 급속하게 늘면서, 볼리비아와 다른 안데스지역 국가들의 코카 생산량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 코카는 볼리비아에서만 20억달러 이상의 생산을 달성해 볼리비아 국민총생산(GNP)의 13%를 차지하게 됐으며, 현재 코카는 볼리비아의 가장 중요한 농업 생산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라파스에서 3시간가량 떨어진 융가스는 전통적인 코카 재배지로 유명하다. 산허리를 깎은 도로를 따라 고립된 지역으로 들어서면 어디를 가나 코카 재배지가 널려 있다. 마을 들머리로 들어서자 말리기 위해 쌓아놓은 코카잎들이 보였다. 집 바깥에서 가족과 함께 코카잎을 말리던 야콥(57)을 만났다. 그는 코카 생산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가 빠듯한 소농이다. 농사일만으론 생활비와 자녀 교육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그는 간간이 코카 운송을 거드는 일당제 노동일을 한다. 현재 그는 다른 대부분의 코카 재배농들처럼 코카 재배농 출신인 모랄레스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지만, 정부의 불투명한 정책과 미국의 코카정책 모두에 불만이 높았다. 야콥은 “코카인과 우리가 생산하는 코카는 별개인데, 왜 미국은 우리나라의 코카 재배를 중단시키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미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 ‘마약과의 전쟁’
볼리비아의 코카 생산량은 남미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크다. 콜롬비아의 코카 생산면적이 5만5천ha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뒤를 이어 페루가 3만5천ha로 2위다. 그 다음이 2만5천ha에서 코카를 재배하고 있는 볼리비아다. 미국이 볼리비아에 ‘허용’하고 있는 코카 생산면적은 1만2천ha에 불과한 상태니, 나머지 1만3천여ha는 ‘불법’적인 코카 재배지인 셈이다. 미국과 볼리비아 코카농들의 마찰의 원인은 코카를 보는 근본적인 시각에서 유래하고 있다. 남미에서 생산된 코카는 모두 마약인 코카인으로 변해 미국을 파괴한다고 보는 것이 미국 정부의 시각이다.
라파스 중심가에서 반시간 정도 외곽으로 나가면 볼리비아인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아데프코카’(코카재배농협동조합)가 나온다. 이곳은 하루에도 융가스나 차파레 지역에서 생산된 수십t의 코카가 소매상들에게 거래되는 대규모 코카 시장이다. 시장 들머리에 들어서자마자 코카잎의 향기가 코를 찌르면서 이미 코카에 취하기 시작했다. 코카가 가득 찬 자루들을 거래하고 운반하던 상인들이나 짐꾼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그동안 이른바 ‘마약과의 전쟁’을 수행한다면서 외국의 마약단속반원들이 코카 재배지를 다니면서 아수라장으로 만든 기억이 있기 때문인 듯했다. 심상찮은 눈빛을 피해 곧장 조합 사무실로 향했다. 조합 이사장 사무실 앞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코카 재배농들이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이곳에서 엄청난 양의 코카 거래가 이뤄진다는 사실은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코카조합 이사장인 유로기오 콘도리(47)는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코카에 대한 악의적으로 왜곡된 인식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주문을 먼저 했다. 그는 또 “미국 정부의 코카 말살정책으로 코카 재배농들이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받고 있다”며 미국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코카조합 경비원의 안내를 받아 코카 거래장소에서 코카 재배농들을 만났다. 3층 건물 곳곳에는 코카 자루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지방에서 올라온 코카 재배농들이 그 곁을 지키면서 소매상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융가스 지역에서 올라온 코카농들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은 중남미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수행해왔다. 미국이 볼리비아에서 수행한 마약과의 전쟁은 코카를 뽑아내는 대신에 파인애플이나 바나나 등의 농작물로 대체하는 정책이었다. 이를 위해 그동안 7억달러 상당을 볼리비아 동부 차파레 지역에 투자했으며,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의 보안부대가 코카를 강제로 제거해왔다. 이 정책은 볼리비아의 특수한 지리적 특성이나 농민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단지 코카를 뽑아내는 데만 초점이 맞춰지면서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고립된 지역에서 생산된 농작물은 운송비가 지나치게 높아 생산비도 감당하지 못한 탓이다. 결과적으로 폭력과 가난만을 볼리비아 농민들에게 안겨줬고, 나중에는 미국의 대리전을 수행하던 볼리비아 정부에 맞선 민중봉기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코카농과 미국 사이 ‘줄타기’ 정책
지난 2003년부터 시작된 코카 재배농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의 반정부 투쟁은 60명을 애꿎은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볼리비아에선 두 번씩이나 정부가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코카 재배농들의 지도자였던 모랄레스가 지난 2005년 말 선거를 통해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코카 재배농들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정권을 잡은 뒤부터 거의 10개월 동안 모랄레스 정부는 코카농들과 미국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 정책’을 해왔다. 매년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을 위한 대가로 지원하는 막대한 규모의 경제지원을 저버리기란 모랄레스 정부로서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안팎의 압박에 직면한 모랄레스 정부의 고민이 깊어만 가고 있다.
(사진제공(맨위) / REUTERS/ NEWSIS/ BOLIVIAN PRESID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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