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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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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총살

등록 2006-05-12 00:00 수정 2020-05-03 04:24

85년 북한정보원 처형을 끝으로 공식 기록 없는 버마, 국경지역에선 예외…중국은 해마다 1500여명 집행… 세계 다른 모든 나라 합한 것보다 더 많아

▣ 베르틸 린트너(Bertil Lintner)/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타이 특파원

중국의 어떤 마을이나 도시에서도 사형수의 처형은 시끌벅적하게 이뤄진다. 운명의 날 죄수들은 수갑을 차고 포승에 결박된 채로 트럭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온다. 처형장에 도착한 다음 그들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줄을 서 처형된다. 자동소총의 총알은 한 사람에 두 번씩, 하나는 머리를, 하나는 심장을 관통한다. 최근에는 독극물 주입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이 경우 처형은 감옥 안이나 특별히 만든 처형용 차량 안에서 이뤄진다. 작은 버스를 개조해 만든 이 차 안에는 죄수를 싣는 들것이 있으며 의사와 간수, 법원 간부가 탈 수 있는 좌석이 있다.

불법으로 매매되는 중국 사형수의 장기

중국에서 해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사형되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국제사면위원회는 해마다 1500여 명이 총살형 혹은 독극물 주입으로 목숨을 잃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중국은 전세계 다른 모든 나라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이들을 사형하는, 해마다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사형수의 85%가량을 죽이는 세계 최대의 사형 국가다. 사형되는 이들은 대부분 살인, 강간, 마약 관련 범죄자들이지만 ‘경제적 범죄’로 인한 사형수도 증가하는 추세다. 국제사면위원회는 사형된 죄수들의 장기가 사전 동의 없이 불법으로 매매되는 사례가 보고된 것에도 우려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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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의 우방인 동시에 중국보다 더 억압적인 정권이 장악하고 있는 버마는 사형 선고에 소극적이고 사형 판결이 실제로 처형까지 이어지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 가장 최근에 알려진 사형 사례라고 해봤자 1985년 4월6일 양곤 외곽에 있는 인세인 교도소에서 북한 정보원 진아무개 소령이 교수형에 처해진 것이다. 진 소령과 북한 요원인 김진오, 강민철은 1983년 10월 버마의 독립영웅을 기리는 아웅산 묘역에 폭탄을 장착해 그곳을 방문한 한국 관료 18명을 살해했다. 사망한 이 가운데에는 서석춘 부총리와 장관 세 명도 포함됐다.

김진오는 폭발 직후 버마군과의 총격전에서 사망했지만 진아무개와 강민철은 생포됐다. 강씨는 수사에서 버마 당국에 협조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아직도 인세인 교도소 안의 ‘빌라 구역’에서 철조망으로 에워싸인 작은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

2004년 3월 민주화 활동가 9명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인데, 그들의 죄는 “정부 관료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사형 판결이 내려진 이 가운데는 버마의 유수 잡지 <일레븐 스포트>의 편집장 텟 조가 포함됐다. 그러나 자우 등 9명의 사형은 아직 집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공식 기록은 진실을 오도하는 측면이 있다. 원주민 반군과의 분쟁이 있는 국경지역에서는 초법적인 처형이 일상적으로 자행된다. 반군과 협조한 것으로 의심받는 사람이라면 여자나 아이들도 총살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반군이 식량을 얻는 마을들은 주기적으로 불태워진다. 그리고 인세인 교도소에 갇힌 모든 이들이 강씨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곳 안에서의 고문과 각종 학대, 잔인한 조사 수법은 종종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중 잘 알려진 경우만 해도 다음과 같다.

*해군 사령관 출신으로 저술 활동을 하던 마웅 토 카는 1989년 군사법정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현재 가택 연금 중인 야당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와 매우 가까웠고, 88년 민주화 시위 당시 수치 여사가 대중 앞에 나타나도록 독려한 이 가운데 하나다. 마웅은 체포되기 전부터 척수염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1990년 9월 인세인 교도소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가며 마비 증상을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교도소 의사가 아닌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지 못했고, 1991년 6월 심장마비를 일으킨 뒤에야 양곤종합병원으로 이송됐다. 사흘 만에 그는 65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버마 인세인 교도소의 고문과 학대

* 우 틴 마웅 윈은 50살의 나이에 독립 이후 조직된 양곤시 대학 학생회 연합의 일원으로 1988년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아웅산 수치의 정당인 버마민족민주동맹의 주요 멤버로 1990년 5월 양곤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다섯 달 뒤 체포됐고, 기소와 재판 여부도 불투명하다. 확실한 것은 그가 1991년 1월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검을 본 가족은 그의 몸에 구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주장한다. 버마 군부는 그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가족은 체포 전 그가 그런 병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 당시 25살이었던 학생운동 지도자 코 초 묘 탄트는 1989년 7월 체포돼 ‘군사법을 어긴 죄’로 18년 징역을 받았다. 그는 심한 구타를 당해 음식물 소화가 어려웠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1990년 5월 사망했다.

* 그리스와 버마인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제임스 리앤더 레오 니컬스는 해운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1962년 군사 쿠데타로 그의 사업체가 국유화됐는데도 이례적으로 버마에 남았다. 그는 1968년 노르웨이 명예영사로, 1978년 덴마크 명예영사로 임명돼 외교사절 임무를 수행했다. 버마 군부는 1993년 그의 외교사절 권한을 박탈했지만 그는 버마와 공식 외교관계가 끊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스위스의 실질적인 외교관 역할을 계속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아웅산 수치의 대부이자 친한 친구였고, 수치 여사가 그의 팩스를 사용해 일본의 <마이니치신문> 등에 기고문을 보냈다는 것이다. 니컬스는 1996년 4월5일 정부의 허락 없이 팩스와 전화선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5월5일 법원은 그에게 징역 3년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그는 6월20일 감옥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는 65살로 당뇨병과 고혈압, 심장병 등을 앓고 있었지만 그가 정기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약들을 복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부검 당일 양곤의 묘지에 묻혔는데 가족 누구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버마 정부는 그가 ‘별 볼일 없는 사기꾼’으로 ‘그에게 어울리는 운명’을 만났다고 그의 삶을 폄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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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살의 버마민족민주동맹 당원인 아웅 흘라잉 윈은 2005년 5월1일 체포돼 버마의 악명높은 군사정보 기관에서 조사를 받았다. 9일 뒤 그의 가족은 그가 심문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주검을 조사한 의사는 구타로 인한 상처와 부러진 갈비뼈 세 대, 멍든 심장과 부어오른 목, 내장 염증 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군사정보 기관은 그의 주검을 가족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서둘러 화장했다.

*1988년 민주화 운동 당시 학생 활동가였던 텟 나잉 우는 1998년 체포돼 징역 14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2002년 11월 풀려났지만 올해 3월17일 군인들과 군이 지원하는 극우 조직 구성원들과 시비가 붙어 심한 폭행을 당했다. 3월20일 그의 장례식에는 버마민족민주동맹 당원과 정계의 거물, 학생운동 지도자 등 1천여 명이 참석했다.

브라질 변호사, 화를 내고 버마를 떠나다

유엔은 여러 번 버마 특별인권조사관을 임명했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가장 최근에 임명된 브라질 변호사 파울루 세르히우 핀에이루는 2003년 3월 인세인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비공개 조건으로’ 인터뷰하던 도중 책상 아래에서 도청장치를 발견해 격분하고 버마를 떠났다. 그의 전임자인 모리타니인 라지수머 랄라는 버마 정부의 훼방으로 버마에 입국조차 하지 못했다. 설사 핀에이루 변호사의 후임이 정해진다고 하더라도 버마 안에서 독립적인 조사를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핀에이루는 버마 감옥 안에 1200~1300명의 정치범이 갇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국제사면위원회는 정치범 출신 사형수들에 대해서도 여러 번 밝혀낸 바 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버마에서 자행되는 초법적 살해에 대해 작성한 장문의 보고서에서 소수민족 거주 지역의 상황이 특히 심각하다고 밝혔다. 사형수들과 임의로 처형을 중국이 아닌 버마가 ‘전세계 최대 정부 주도 살인 국가’라는 불명예에 더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중국과 버마의 차이는 중국이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서라도 판결을 합리화하려 한다면 버마에서는 그런 시도조차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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