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교황이 헬기로 서안을 간 이유는…

등록 2006-05-12 00:00 수정 2020-05-03 04:24

아랍 이슬람 국가와 이스라엘이 종교를 초월하여 벌이는 성지 우월성 논쟁… 성지순례 관광객 유치 위한 자건, 상대 역사 이해하는 기폭제 될 순 없나

▣ 암만=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먼동이 터오면서 어렴풋하게 보이던 사람들의 얼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머리에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과 전통 복장을 한 아랍인들, 머리 덮개인 ‘키파’ 차림의 유대인도 상당수 눈에 들어온다. 한쪽에서는 다양한 국가에서 온 기독교인들이 저마다 찬양을 하거나 기도하는 모습도 발견된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동남쪽으로 홍해를 끼고 사막을 지나 400km를 달리면 도착하는 시나이산. 모세가 야훼에게서 십계명을 받았다는 이곳 정상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모세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의 선지자

시나이산을 찾은 이들 대다수는 물론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이집트는 물론이고 인근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 온 무슬림들과 이스라엘에서 온 유대인들도 적지 않다. 한 장소를 찾은 다양한 이들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성지순례다. 해발 2243m에 이르는 시나이산은 일찍부터 ‘신의 산’으로 불리며 성지로 여겨져왔다. 구약성서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이 산에 올라 불길에 휩싸였으면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들리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모세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 3대 종교에서 모두 선지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IMAGE1%%]

중동에서 최근 ‘성지’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은 물론이고 인근 시리아나 레바논, 멀리 터키까지 ‘성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합이 벌어지고 있다. 십자군 전쟁이나 유대인과 무슬림의 갈등과 유혈 충돌 같은 갈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루살렘의 영유권 논쟁 때문도 아니다. 어느 곳이 ‘진짜 성지’인지를 둘러싼 논쟁과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성지는 당연히 ‘이스라엘 그 자체고 이스라엘에 다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새삼 무슨 성지 논쟁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 성지 개발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전세계 무슬림들에게 최고의 성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다. 해마다 전세계에서 몰려온 수많은 순례자들로 홍역을 치른다. 이란의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라크의 카르발라나 나자프 등의 성지를 순례한다.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지고, 이라크에서 전쟁 아닌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성지 순례자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슬람의 성지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마호메트)의 사적과 연결됐거나, 이슬람 제국의 확장 역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런 이슬람 세계의 중심인 중동 각국이 국책사업으로 성지 개발에 힘을 쏟고 있는 이유는 물론 기독교 성지와 이슬람 성지가 겹치는 경우가 많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전세계에서 성지순례에 나서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바벨탑의 원형이 남아 있는 이라크

기독교 성지 개발사업에 정성을 쏟고 있는 대표적인 이슬람 국가는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요르단이다. 요르단에는 모세가 죽은 느보산과 선지자 엘리야가 승천한 광야 언덕, 세례 요한의 주 활동무대였던 요르단 강변과 그가 죽임을 당한 마케루스 요새, 예수가 세례를 받은 장소와 그가 피난했던 지역 등 기독교인들을 유혹할 만한 장소들이 즐비하다. 팔레스타인이나 이집트·시리아·레바논 등도 기독교 성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 무슬림 나라에도 기독교 성지는 널려 있다. 이라크에도 기독교 성지가 있다. 이라크에 파병됐던 한국군 서희·제마부대가 주둔했던 곳인 나시리야 지역은 ‘갈대아 우르’로 불린다. 이곳에는 바벨탑의 원형이 남아 있는데, 성서를 보면 이곳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땅이다.

아랍 이슬람 국가들의 성지 개발 경쟁에서 최대 라이벌은 당연히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 자체가 성지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세계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을 성지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동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성지가 이스라엘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우리나라 성지가 더 낫다”는 ‘성지 우월성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IMAGE4%%]

지난 2000년 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중동 성지순례를 전후하고 표출됐던 각국의 교황 유치 경쟁은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당시 이집트·요르단·팔레스타인·시리아 등 중동 각국은 교황의 성지순례 일정에 자국 성지를 유치하고 홍보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전세계 가톨릭 인구를 의식한 면도 있지만, 이를 계기로 자국 내에 있는 기독교 성지와 관광상품들을 홍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교황의 중동 순방을 앞두고 바티칸 교황청은 각국의 주요 성지에 대한 인준과 평가 작업을 벌이기까지 했다. 바티칸 공식인증 성지가 생긴 셈이다. 이 무렵 가장 첨예한 대립과 경쟁의 초점이 됐던 곳은 예수가 세례를 받은 장소였다. 교황청은 애초 예수 세례터로 알려진 요르단의 알마그타스 지역만 순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읍소가 이어지면서 방문 일정 중에 포함되지 않았던 요르단강 서쪽 지역을 교황이 헬기로 방문하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무슬림이 기독교인 가이드로 일하기도

기독교인들의 주요 성지순례 대상국가인 이집트나 요르단·시리아·레바논 등지에서 관광가이드로 일하는 현지인 대부분은 무슬림이다. “무슬림으로서 기독교 성지를 방문하면서 이상한 느낌이 없느냐”고 질문을 던져보면, 현장에서 일하는 무슬림 가이드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곳은 기독교인들만의 성지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이자 사적지다. 더욱이 예수나 모세, 세례 요한 등은 무슬림의 중요한 예언자들이기도 하다. 당연히 무슬림들에게도 중요한 성지다.” 이슬람 성지인 동시에 기독교 성지이지만, 주요 고객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성지라는 면을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많은 현지인들에게 기독교 성지는 그저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지는 성지 논쟁도 다른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과는 무관하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다른 종교와 국가의 성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관광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한 이미지 부각 경쟁만 난무하지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성지는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평화 공존을 위한 발판이 될 수도 있고, 갈등의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인류 공동의 자산인 성지 공동 개발과 보존, 이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상호 이해와 협력의 틀이 마련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