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방콕 피플파워, 꼴 우습게 되다

등록 2006-03-18 00:00 수정 2020-05-03 04:24

14년전 방콕항쟁의 그 용사들이 다시 모은 시남루앙의 반탁신 투쟁 현장
지도부 이룬 언론재벌 손티와 전 방콕시장 참롱에 의해 망가져버리다니!

▣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href=mailto:asianetwork@news.hani.co.kr>asianetwork@news.hani.co.kr

“다시, 사남루앙에서!”

땡볕이 쪼아댄다. 14년 전 그날도 그랬다.

권태롭다. 변함없는 풍경이 나른한 기억들을 몰고 다닌다.

어색하다. 낯익은 얼굴들, 14년 전 그 용사들이 다시 뭉쳤지만.

그리고 ‘배반의 추억’ 속에 10만 군중의 함성이 아스라이 잦아든다.

참롱, 14년전 오판과 배반의 추억

1992년 5월 방콕 민주항쟁을 잉태했던 자궁 사남루앙에 14년 터울의 새 아기가 들어섰다. 1932년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뒤 20번도 넘는 크고 작은 쿠데타로 얼룩져온 타이 현대 정치사에서 늘 ‘반란’을 꿈꾸었던 사남루앙이 다시 입덧을 하고 있다.

오가는 시민들은 1973년 10월14일, 1976년 10월6일, 1992년 5월, 그 피로 물든 사남루앙의 출산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IMAGE1%%]

3월5일 노곤한 일요일 오후, ‘사남루앙 정족수’ 10만 명이 채워졌다. 지난 2월11일 로열 플라자와 2월26일 사남루앙에 이어 다시 10만 명이 훌쩍 넘어선 이 반탁신 시위에는 14년 전 ‘실패의 기억’을 안고 돌아섰던 이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민다. 1992년 5월 방콕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지도부와 그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서로 부둥켜안으며 14년 세월을 얘기한다. 전투주의 예술가 와산 시띠껫, 1992년 5월17일 무장군인들의 발포로 주검이 즐비한 사남루앙에서 체포령을 비웃으며 항쟁 지도부 중 유일하게 현장을 지킨 그이가 빠질 리 없다.

“문태, 피 냄새가 나지 않나? 나는 이미 한 달 전부터 피 냄새를 맡고 있어.” 대뜸, 그이는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못하는) ‘피’를 말했다. 1970년대부터 사남루앙 터줏대감으로 쌓은 경험과 예술가의 영감이 뿜어내는 그 ‘피’는 섬뜩한 기운을 자아낸다.

그 곁에는 1992년 20살짜리 신문학과 학생으로 사남루앙 시위에 참여했던 뻬나빠 홍통이 그날 꿈꾸었던 <네이션>의 중고참 기자가 되어 현장을 누비고 있다. 또 시위란 시위에는 모조리 나서는 프로페셔널 시민전사들도 드문드문 눈에 띈다. 1970년대부터 3대째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사남루앙에 나타나는 가족전사도 있다.

그러나 14년 만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사남루앙의 분위기는 신통치 않다. 무엇보다 에너지가 끓어오르지 않는다. 10만 대군의 함성도 예전 같지 않다. 모든 게 의심스럽기만 하다. “과연 이 기운이 제왕적 권력을 휘둘러온 탁신 친나왓 총리를 쫓아내고 권력을 시민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을까?” “탁신이 물러날 때까지는 결코 사남루앙을 떠나지 않는다. 지켜봐라.” 6개월쯤 전, 반탁신 시위를 촉발한 주인공이자 현재 5인 항쟁 지도부를 이끄는 언론재벌 손티 림통꿀은 전략을 묻는 기자에게 그 잘난 의지만 쏟아낸다. 한때 탁신의 친구로 적극적인 ‘친탁신’ 분자였던 손티가 자신의 토크쇼 프로그램이 금지당하면서 ‘반탁신’ 기수로 돌아선 사연이 석연찮듯이, 사남루앙의 3월도 짚이는 게 별로 없다.

또 다른 5인 항쟁 지도부의 핵심 인물 참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 탁신을 정치판으로 이끈 장본인이자 탁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이는 인터뷰 요청에 손가락을 입에 대며 침묵을 요구한다. 시민을 설득하고 시위를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가, 그것도 10만 대군이 집결한 결정적인 시점에 침묵을 무기로 들고 나섰다. 이 당치도 않는 지도자의 모습에서 1992년 군인들의 발포로 희생된 5월 시민들 주검이 쏜살처럼 떠오른다. 1992년 5월, 방콕 민주항쟁의 상징적인 시민대표 참롱이 저질렀던 오판과 배반의 추억이 14년 뒤 다시 불길한 예감으로 떠오른다.

우리를 막지 말라! 누가 막는대?

현재 사남루앙의 반탁신 운동은 손티와 참롱을 비롯해 노동운동 대표 솜삭 꼬사이숙, 민중민주의의 대표 삐폽 동차이 그리고 교사 대표 솜끼앗 퐁파이분이 5인 지도부를 형성해 민주민중동맹(PAD)의 이름으로 참여한 22개 시민단체를 이끌고 있다. 그러나 사남루앙은 처음부터 폭발적인 군중 동원력을 지닌 손티와 2천여 명에 이르는 종교단체 조직원 다르마 아미(Dharma Army)를 이끌고 나타난 참롱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직 동원력이 없는 시민단체들은 탁신을 쫓아내기 위한 잠정적·전략적 연대만을 외치는 들러리 신세다.

“어쩔 수 없다. 목표를 이루려면 그 둘을 이용할 수밖에.” 민주민중동맹 대변인 노릇을 하는 수리야사이 까따실라는 ‘울며 겨자먹기식’ 연대를 한탄하면서도 조직 내분으로 비칠 것을 염려했다.

이렇듯 2006년 사남루앙은 개인 손티라는 ‘얼굴마담’이 자리를 펴자 풀만 먹고 사는 참롱이라는 ‘신비주의자’와 별로 시민 없는 시민단체들이 어울린 태생적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

그러니, 5인 지도부는 바깥에 알려진 것과 달리 따로 노는 물레다. 손티와 참롱은 ‘상황에 따라 국왕이 권력을 갖는 전통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의 헌법 제7조를 원용해 일찌감치 임금님에게 새 총리를 지명해 과도내각을 결성해달라고 탄원해왔다.

이에 맞서 5인 지도부의 솜삭 꼬사이숙을 비롯한 다른 3명은 “시민에게서 나온 권력을 시민에게 되돌려줘야 한다. 권력을 국왕에게 되돌린다는 건 시대착오”라며 강력하게 비난해왔다. 말하자면 5인 지도부는 ‘탁신 추방’을 위한 목적지만 같을 뿐, 서로 딴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5인 지도부 사이의 메우기 힘든 간격은 현장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일요일 밤 10시쯤 벌어졌다. 랏차담런 길을 따라 민주탑을 지나 정부 청사로 행진하던 사남루앙 시위대가 경찰 저지선과 부딪쳤다. 처음부터 10만 대군을 저지할 의사 없이 3중 저지선에 기껏 250여 명을 배치한 경찰과 시위 대표자가 협상을 벌이는 사이, 손티와 참롱은 1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기자들에 휩싸여 ‘적진’ 돌파를 시도했다. 경찰이 저지선을 치지 않은 그 도로는 시민과 차량 통행을 위해 열어놓은 시민용이었다. 아무도 저지하지 않는 도로를 마구 달린 손티와 참롱 일행은 경찰 저지선 뒤를 밀고 다시 시위대 앞쪽으로 돌아 나왔다. 두 지도자의 치기 어린 행동을 지켜보던 기자들은 말문이 막혔다.

“경찰은 우리를 막지 말라. 우리를 막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어 선도차에 뛰어오른 참롱은 마이크를 잡고 근엄한 장수처럼 열변을 토했다. 지켜보던 경찰 책임자는 “막을 생각도 없다. 우린 당신들의 보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 과정에서 5인 지도부 가운데 3명은 그 둘의 돌출행동을 전혀 눈치채지도 못했다. “둘이 우리와 상의도 없이 감정대로 마구 움직이니…. 전략도 전술도 통할 수가 없어.” 솜삭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피플파워에 피플은 없더라

뿐만 아니라, 민주민중동맹의 일원으로 학생 300여 명을 이끌고 시위대 후미를 지원했던 타이학생연합(SFT) 대표 꼬차완 차이야붓은 “제1선에서 함성이 올랐지만, 우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고 당시 상황을 털어놓았다.

결국 정부 청사에 이르는 시위대의 행진은 고삐 풀린 망아지 꼴이 되었다. 선도 차량이 앞서가는 시위대를 멈추고자 갖은 애를 썼지만 통하지 않았다. 지도부가 시위대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노출하고 말았다.

언론과 시민들은 사남루앙 2006년을 ‘피플 파워’(People Power)라 부르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근데 사남루앙에는 피플이 없다. 손티와 참롱만 있을 뿐이다. 3월10일 현재까지는 그렇다. 그리고 로열 그라운드(royal ground) 사남루앙이 어떤 아기를 낳을지, 아직까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다만, 지루하고 고단한 시위가 연상될 뿐이다.

사남루앙이 두 인물 손에 휘둘리고 있는 한, 그리하여 사남루앙이 시민들의 손에 넘어오지 않는 한 2006년의 아기는 사산될 가능성마저 안고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