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볼리비아 모랄레스에 이어 칠레 바첼레트까지 좌파정권이 석권한 남미 7개국
차베스가 카리스마에 기댄 포퓰리스트인것처럼 그들은 개혁성향의 자유주의자일뿐</font>
▣ 멕시코시티=옥영란 멕시코대학 중남미지역학과 박사과정 quintosol@hanmail.net
지난 몇 년 동안 이어진 라틴아메리카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두고 좌파 도미노 현상이라고들 한다. 자본의 안위를 걱정하는 다국적 기업과 미국을 비롯해 선거 결과에 고무된 이 지역의 진보주의자들까지 1990년대 후반부터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등에 들어선 정권의 성격을 폭넓은 의미에서 좌파라고 규정한다. 특히 지난해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된 미주정상회담에서는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가 단결해 미국의 일방적인 주도권에 반대함으로써 부시 대통령과 그의 가장 가까운 동맹인 멕시코의 폭스 대통령을 머쓱하게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 ‘좌파 대통령’들은 자국의 좌파들에게 맹공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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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기업 환대, 바첼레트의 핸디캡
라틴아메리카는 1800년대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유럽에서 독립했다. 이후 지역 내에서 영토나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전쟁을 겪기도 했지만 적대감보다는 연대감이 크다. 이 좌파 대통령들 사이에 연대감이 있다면 그것은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 때문이다. 하지만 연대감의 속을 들여다보면 이데올로기적 성향이나 대통령을 배출한 각국의 사정은 다르다. 가장 가까운 시점에 선거가 실시된 두 나라 볼리비아(2005년 12월18일), 칠레(1월15일)와 오는 7월에 예정된 멕시코의 대통령 선거를 둘러싼 사례를 보면, 각국이 처한 상황과 요구들이 현실적임을 알 수 있다. 앞질러 말하자면 라틴아메리카에서 선출된 역대 대통령 중에서 유일한 좌파, 그러니까 정책으로 국민의 동등한 권리와 분배 문제를 표현했던 사람은 칠레 인민연합의 아옌데 대통령뿐이다.
칠레에서 피노체트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16년 만에 반피노체트 세력들이 연합해 구성한 연정(콘세르타시온)에서 처음 두 대통령은 중도 우파인 기독민주당에서 나왔고 현재의 라고스 대통령은 연정 내의 첫 사회주의당 출신이다. 인구가 1550만 명 정도인 칠레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양하고 분화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연정은 좌우와 중도를 포함한다. 공산당이 반발해 연정에서 탈퇴하기도 했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대다수 나라들이 그러하듯 강령에서 드러나는 정책보다는 공동의 적에 대항해 연합한 것이다. 칠레의 경우는 미국이 직접적인 적이 아니라 ‘파시스트 우파’, 즉 친피노체트 세력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미첼레 바첼레트 당선자는 연정의 네 번째, 그리고 연정 내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당 출신의 대통령이 된다. 그러니, 다국적 기업의 환대를 받았던 라고스 대통령의 적자라는 것 때문에 지지기반을 물려받았지만 이것이 핸디캡이 되기도 한다. 라고스 대통령은 피노체트 시절부터 경제의 토대가 됐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대로 실행했을 뿐 아니라 앞장서 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출신에 붙은 ‘사회주의자’ 라벨 때문에 우파의 공격을 받았는데, 좌파에 우호적인 국민들의 지지도 처음 집권할 때와는 다르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옹호로 소득과 분배의 불균형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바첼레트 당선자는 이 두 가지 전임자의 유산을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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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1차 선거에서 5.4%를 얻어 결선에는 오르지 못한 좌파 토마스 히르쉬 후보를 지지하는 그룹들이 2차 선거를 대하는 입장은 크게 엇갈렸다. 사회주의당 출신인 바첼레트나 우파 기업인 출신의 피녜다나 거대 자본을 지지하기는 마찬가지이므로 무효에 표를 던지겠다는 입장이 하나, 어쨌거나 우파가 집권하는 것보다는 바첼레트가 낫다는 비판적 지지 입장이 또 하나였다. 결국 공산당은 다섯 항목을 내세워 비판적 지지를, 나머지 노동자당,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당, 사회주의를 위한 블록 등은 무효 쪽으로 갔다. 1차 선거에서 45.95%를 얻은 바첼레트에게 5.4%의 지지는 결정적이다. 2차 선거에서 우파는 합해서 48.63%를 얻었기 때문이다.
비판적 지지를 표명한 공산당은 노동 유연화에 대한 대안과 단체교섭권의 폭을 확대하는 노동법 개정, 연금을 100% 인상하는 사회보장법, 인권 확대를 위한 협약 제정, 양원제인 의회법 개정 등을 요구했다. 아울러 자신들의 지지는 연정의 정책과 입장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대한 좌파의 현실적인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도 강조했다.
원주민 복장으로 축하받은 모랄레스
칠레는 피노체트의 퇴진 이후 네 번째 대통령을 맞이하지만, 정치적 화두의 중심에는 늘 과도기 혹은 교체라는 의미가 자리하고 있다. 정권 교체의 시작, 정권 교체의 완성, 교체 내에서의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교체 등등. 바첼레트의 임기가 시작되면 칠레 사회는 극우 파시스트의 악몽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16년 만에 과도기 정권의 불안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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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첼레트 당선자가 피노체트의 고문으로 죽은 공군 장성의 딸이며 의사 출신이고 보건·국방 장관을 지냈을 뿐 아니라 불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인터뷰를 하는 엘리트인 데 반해, 1월22일 임기를 시작하는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당선자는 이변의 인물이다. 정책보다 인물 중심인 라틴아메리카의 풍토에서 원주민 대통령의 당선이라 특히 그렇다. 석유와 가스 및 코카 재배 농민들이 대다수인 볼리비아에서는 백인 대토지 소유자들이 제도권 정치를 독식해왔다. 당선을 축하하는 자리에 코카잎으로 만든 목걸이를 하고 늘 입고 다니던 원주민 복장으로 나와 깔끔한 서양식 정장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임기 시작 전의 첫 순방국이 쿠바라는 것, 중국과 아프리카가 포함된 순방 일정에 미국이 빠졌다는 것 또한 전통적인 대통령 당선자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의 당선 이후 첫 일갈은 미국이 코카 재배를 코카인하고만 결부시키는 통에 전통 약초로 코카를 재배하는 나라들과 농민들마저 범죄자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적대적인 코멘트를 삼간 채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에서 그에 대한 기대는 높다.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에는 차베스뿐 아니라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까지 공식적으로 지지를 표명할 정도였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라틴아메리카를 관통하는 가스관 추진 사업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이라는 단체의 리더였던 에보 모랄레스 당선자는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는 것을 경계해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발언과 정책을 숱하게 발표하고 있다. 가스와 석유 회사의 국유화를 선언했지만 볼리비아 내의 광부들과 노동자 조직들은 세제 개혁 차원일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국민들이 기대하는 것은 계급적 수준에서보다는 수백 년 동안 소외됐던 원주민들의 인권 개선이다.
멕시코의 로페스도 좌파라지만…
위의 두 사례에서 보다시피, 쿠바처럼 혁명의 길로 가는 좌파는 현재 라틴아메리카에는 없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는 제도권에 들어가지 않고 사회운동으로 존재(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브라질의 무토지 노동운동(Movement without land)의 경우)하거나, 제도권 내의 정당으로 정치 권력을 꿈꾸거나, 혁명으로 사회 전복을 시도하는 세 가지 경향으로 존재했다. 현재는 앞의 두 경향만이 가시적인데, 볼리비아의 차기 정권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가 혼재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후보 시절 에보 모랄레스의 연설에서 ‘사회주의’ 운운하는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권리’, 즉 코카 재배 노동자들의 권리, 원주민의 권리, 자주 외교 등이 그가 즐겨 쓰던 말들이다. 자주 외교에는 당연히 독립국가로서의 권리, 볼리비아 경제의 기반이 되는 석유와 가스, 광산업에 대한 권리가 포함돼 있다.
반면 올해 7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멕시코의 로페스 오브라도르 후보도 칠레와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제도권 정당 내의 좌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71년간 권력을 장악했던 제도혁명당 내의 비판주의자들 중 한 명이다. 살리나스 정권 시절, 멕시코 석유 국유화를 시행한 전설적인 카르데나스 대통령의 아들 쿠아우테목과 함께 당을 나와 제도권 내에서의 활동에 지지를 보내던 사회당과 사회운동 그룹들을 규합해 민주혁명당을 만들었다. 지난해 대통령 후보 수락을 위해 멕시코시티 시장직에서 물러나기까지 미혼모, 고령자들을 위한 사회보장 정책으로 폭넓은 지지를 얻어 현재 지지도 1위를 달리고 있다. 포퓰리스트라는 비판과 함께 개혁 성향에 대한 의혹이 있으며 사파티스타들과 불협화음이 있지만 미국의 대멕시코 이민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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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지만 정책 차원에서 보자면, ‘좌파’라는 건 반대파들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규정이다. 사실은 칠레나 볼리비아, 멕시코,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까지 ‘개혁 성향의 자유주의자’가 더 적당하다. 차베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의 군인 시절의 멘토가 베네수엘라의 저명한 좌파였다지만, 조직 기반이 없고 개인의 정치력이나 카리스마에 기댄다는 점에서 포퓰리스트다. 국가 부도의 위기와 여러 대통령이 갈리는 상황에서 정권을 쥔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경우처럼, 자국이 처한 상황이 대통령을 어떤 방향으로 단련시킬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베네수엘라가 가진 석유가 미국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을 만큼 미미했더라면 미국이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았을 것이고 차베스 대통령의 외교 노선도 좀더 온건했을지 모른다.
신자유주의를 인정해야 하는 딜레마
예전에 비해 세상을 일도양단하기가 쉽지 않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욱 ‘좌파’라는 이름에 사람들이 기대를 걸 것이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대통령들은 이미 시장의 논리와 자본주의 체제를, 그 체제 안에서의 게임의 법칙을 인정했다. 멕시코나 볼리비아, 페루 같은 나라들은 원주민의 권리 문제가 오래된 계급 논쟁과 함께 간다. 칠레의 바첼레트 당선자가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짧은 기간에 표를 모은 것은 여성 문제에 진지하고 현실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가의 주권이 다국적 자본의 이해관계에 좌우되고 국가라는 카테고리는 ‘정치적 의지’로서만 존재한다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지만, 어쨌거나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대통령들이 보여주는 경향은 국가의 정체성 사수를 위한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 확대다. 그래서 혁명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전통적 좌파와 구분해 ‘신좌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고수로 빈익빈 부익부가 확대되는 딜레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 민족과 인종 문제는 마르크스의 아킬레스건이라고도 했지만, 거꾸로 시장의 논리를 인정하는 것이 이 지역 내의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하는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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