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2003년 9월24일, 벨기에 최고재판소는 두 가지 사건에 대해 같은 결정을 내린 적이 있다. 하나는 1991년 제1차 걸프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지목된 조시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등 미국 정치인들에 대한 전범 소송을 기각한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1982년에 발생한 ‘레바논 학살’의 책임을 물어 기소된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당시 국방장관)에 대한 전범 소송을 기각한 것이었다.
비록 기각되기는 했지만, 벨기에가 이런 먼 나라 이야기들을 자기 나라에서 재판할 수 있었던 것은 1993년에 제정된 전범법 때문이다. 이 법에 따르면 전쟁범죄나 대량살상을 저지른 경우에는 가해자, 피해자의 국적을 불문하고 벨기에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벨기에가 이 법을 제정한 이유는 제네바 협약이 규정하는 반인륜 행위와 고문, 대량살상 금지 등을 자국 법률안에 포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전쟁범죄를 담당하는 국제형사재판소(ICC)는 2002년 7월에야 발족됐으니, 당시만 해도 벨기에의 전범법 제정은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혹자는 ‘벨기에처럼 조그만 나라가 그런 정의로운 법을 과감히?’ 하며 감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벨기에가 그렇게 정의로운 법체계를 가진 나라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벨기에는 이 법을 제정한 뒤인 1994년, 르완다에서 벌어진 투치족 학살 사건 관련자들을 브뤼셀 법원에서 기소했다. 즉, 벨기에는 과거의 식민지였던 콩고민주공화국, 르완다, 부룬디 등에서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곳의 반란자들이나 정치적 패배자들을 이 법을 통해 응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벨기에의 전범법이 노린 진짜 효과는 미국 대통령이나 이스라엘 총리를 기소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식민지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 실례로 이 법이 제정된 뒤 벨기에에서는 위의 사건들 말고도 피노체트 사건, 아라파트 사건 등 26건의 재판이 청구됐지만, 실제로 형이 선고된 적은 거의 없다. 현직에 있는 외국의 국가 원수를 벨기에가 국내에서 다룰 수 있는 강제 절차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2003년에는 이 법의 적용 범위를 벨기에인이 관련된 것으로 한정하고, 외국의 국가 원수는 면책특권을 주는 것으로 개정해 많이 느슨해지고 말았다.
국제형사재판소조차 2002년 2월14일, 국가 원수나 각료는 그 직을 유지하는 한 기소에서 면제된다고 판결해 벨기에의 전범법이나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 규정이나 법 적용에 한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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