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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두가지 비전이 격돌한다

등록 2005-11-24 00:00 수정 2020-05-02 04:24

미주자유무역지대 닻을 올릴 것이냐, 라틴아메리카 통합을 우선할 것이냐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과 멕시코 폭스 대통령간의 공방에 숨은 것은

▣ 멕시코시티=박정훈 전문위원 ojala2004@naver.com

“우울하다. 멕시코의 대통령이 미국의 애완견 노릇을 하다니…”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이번엔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을 향해 구두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집회 연단 혹은 술자리에서나 들을 법한 이같은 발언 사실이 알려지자 멕시코 외교부는 즉각 술렁거렸다. 멕시코는 자국 주재 베네수엘라 대사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베네수엘라 외교부로 연락을 취했다. 그러는 한편 “충분한 해명”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비교적 차분하게 대응했다.

“날 흔들면 가시를 선물하리라”

그런데 11월13일, 일요일마다 국영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송출되는 전용 프로그램 <여보세요! 대통령>에 출연한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내 일에 간섭하면 다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태연하게 베네수엘라 민요의 한 구절을 낭송했다. “난 열대 초원의 가시나무라네. 무심코 지나치는 이들에겐 향기를 선사할 것이지만, 하나 날 흔드는 자에겐 가시를 선물할 것이라네.”

이같은 발언에 멕시코 정부는 발끈했다. 14일 월요일 안에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으면 멕시코 주재 베네수엘라 대사에게 철수를 요청할 것이며 베네수엘라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할 것이며 대사급 외교관계를 상무관급으로 낮출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에 베네수엘라 외교부는 “이러한 최후통첩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정당화할 수 없는 공격”이라고 반박하며 멕시코 주재 자국 대사에게 소환 명령을 내렸다.

얼핏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도발로 촉발된 듯 보이는 이 말다툼의 기원은 지난 11월 4~5일에 열린 제4차 미주 정상회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르헨티나의 마르델 플라타에 모인 미주대륙의 34개국 정상은 미주자유무역지대의 창설 문제를 둘러싸고 설전을 벌였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베네수엘라(12월에 공식 참가) 등 남미 공동시장 5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지대 구상을 반대했다. 이에 반해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자유무역협정 소속 국가들과 이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 자리를 미주자유무역지대 창설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정상의 말싸움

물론 남미 공동시장에 참가하는 5개국이 모두 동일한 생각에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은 아니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남미의 가장 핵심적인 신흥시장의 경우엔 미국과 캐나다의 농업보조금 지급 철폐를 주장하며 좀더 공정한 자유무역 구상을 주장하고 있었고, 베네수엘라와 이 회담에 참석하지 않은 쿠바는 라틴아메리카 통합을 우선시하는 ‘미주볼리바르 구상’이라는 새로운 제안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에 반해 멕시코는 남미 공동시장 소속 5개국을 제외하고서라도 찬성하는 나라들만이라도 계속 모임을 갖고 결속을 다지자는 입장을 취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아예 본회장 밖에서 열리고 있던 미주 정상회담 반대집회에 참가한 유일한 정상이기도 했다. 그는 월드컵 축구 경기장이었던 집회장소에서 “미주자유무역지대 구상을 매장해버리자”고 역설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미주자유무역지대의 닻을 올리고 싶었던 멕시코와 그 구상을 거부하고 있던 베네수엘라는 회담장에서 가장 대척점에 서 있었던 셈이다.

회담이 아무런 합의 없이 막을 내리자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회담이 끝난 뒤 폭스 대통령은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가리켜 “사람들을 선동하러 왔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또 아르헨티나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을 향해서는 “아르헨티나 여론에만 신경을 썼을 뿐 회담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면서 “회담 주최국으로 책임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이에 맞선 반격은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개시했다. 미주 정상회담장에서 아르헨티나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국제통화기금과 미국 또한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의 책임을 질 것을 주장했던 그는 “폭스 대통령은 멕시코 문제에나 신경쓰라”고 공격하면서 “국제회의에서 늘 아르헨티나 시민들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에겐 훌륭한 외교가 강대국에게 경의를 표하고 고개를 수그리는 것인가 보다”면서 멕시코의 협상 태도를 조롱하기도 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반격이 예상보다 강도가 세자 멕시코 대통령은 즉각 어조를 바꿔 “적절한 시기에 대한 생각이 다를 뿐 자유무역지대 구상에 관한 생각은 양국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이렇듯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양국 간의 설전이 진정 기미를 보일 즈음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무대에 등장한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멕시코의 비센테 폭스 대통령과 우고 차베스 대통령 간의 공방전이 미주자유무역지대 창설 문제 때문에 비롯된 것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2002년 4월 베네수엘라에서 쿠데타가 발발해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잠시 쫓겨났을 때 멕시코는 “새로운 베네수엘라의 정치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미국과 함께 쿠데타 정부를 용인하는 태도를 취한 적이 있다. 또 늘 국제무대에서 쿠바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던 멕시코가 2000년 비센테 폭스 정부의 취임 이래 미국과 마찬가지로 쿠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멕시코 정부로서는 이데올로기적 중립이라는 오랜 외교 원칙을 버리고 실용적인 외교 원칙을 세운 것이라고 자부했지만, 쿠바와 동맹관계를 맺고서 저렴한 가격에 석유를 제공해왔고 그 대가로 쿠바로부터 2만 명의 의사들을 받아들인 베네수엘라의 입장에선 멕시코 정부가 눈엣가시로 비쳤을 것이다.

차베스와 게바라, 그리고 볼리바르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외교정책은 경제적인 실리를 따지는 외교 원칙보다는 “라틴아메리카 통합”이라는 이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늘 남미 5개국을 스페인에서 독립시킨 시몬 볼리바르의 초상 앞에서 연설하며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혁명을 전파하고자 했던 체 게바라의 걸개그림 앞에서 주장한다. 그는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해 나라들에 석유를 싼값으로 공급하고 있으며 브라질과 스페인에서 무기를 구입하겠다고 발표해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왔다. 그는 미주자유무역지대가 미국에만 이익을 줄 것이고 라틴아메리카 빈민들에겐 하등의 혜택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멕시코의 비센테 폭스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 기간 멕시코 경제와 환율이 안정됐다는 것을 무기로 경제성장이 고용을 창출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주자유무역지대의 출범이야말로 그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폭스 대통령에겐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비현실적인 포퓰리스트에 불과하다.

이처럼 양국 정상의 구두 공방전 뒤에는 두 개의 비전이 충돌하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주소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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