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노조운동 승리 25주년을 맞으면서 기지개 켜는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자본주의 모순은 세계화의 긍정적인 면을 적극 이용할 때에 풀릴 수 있어”
▣ 그단스크(폴란드)=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1980년 8월31일, 그단스크의 레닌 조선소 파업 사무실에서 파업 지도자인 바웬사와 부총리 야기엘스키가 합의문에 공동으로 서명했다. 폴란드 정부에서 파업 노동자들이 요구한 21개항의 요구사항을 거의 전격적으로 받아들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노동자쪽의 요구사항은 독립적인 노동조합과 파업권의 인정, 정치범과 운동가의 석방, 사전검열의 폐지 등으로 당시 공산권 국가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자유노조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유노조가 정식으로 인정된 지 16개월이 지난 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곧 계엄령이 선포됐다. 1981년 12월, 대부분의 자유노조 지도자들은 감금되거나 수배됐고 자유노조는 불법화되어 지하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자유노조는 세상에서 한동안 잊혀졌다. 6년 동안 자유노조는 지하에서 ‘불온 유인물’을 제작해 배포하는 활동을 주로 하면서 탄압에 맞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다.
1980년, 그단스크의 레닌 조선소 앞의 단상에서 마이크를 잡고 우뚝 섰던 노조 지도자 바웬사는 전세계에 자유의 바람을 몰고 왔다. 바웬사의 자유노조운동은 폴란드와 소비에트권뿐만 아니라 당시 군부독재 체제와 맞섰던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바웬사는 세계 자유화 물결의 선두에 있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그의 콧수염까지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더구나 바웬사가 주도한 자유노조운동이 한창일 때 그 운동의 의미나 미래를 간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지도자였던 바웬사조차 훗날 자유노조운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자유노조가 군부의 탄압으로 지하로 들어가던 시기에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87년 자유노조는 폴란드 전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다시 살아났다. 자유노조의 부활이었다. 자유노조의 부활은 곧 자유노조를 탄압했던 소비에트 체제의 몰락을 의미했다.
러시아에서 시작된 동구권의 공산주의 체제가 종말을 맞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고르바초프와 바웬사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특히 바웬사가 주도한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 솔리다르노슈츠- 은 철의 장막을 걷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전기설비 분야에서 일했던 노동자 출신으로 자유노조 지도자, 노벨평화상 수상자, 폴란드 대통령 등을 거치며 신화를 창조한 노동자 바웬사는 자유노조운동 25주년을 맞으면서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대통령을 역임하고 재선에 실패한 뒤로는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그는 현재 다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폴란드를 위해 세계적 차원의 일을 해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25년 전과 달리 검은 콧수염이 완전한 흰색으로 변한 것 외에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전임 대통령이지만 노동운동가 출신의 이력을 말해주듯 인터뷰 자리에는 통역자 외에는 아무도 합석하지 않았다. 정치적 분장이 없는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대답에서 옛날의 바웬사가 그대로 드러났다.
1천만명의 노조원이 50만명으로
자유노조운동을 시작한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무엇이 가장 변했는가.
= 현재 나는 은퇴한 상태로, 어떻게 변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폴란드가 소비에트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치경제적으로 독립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고 또 이를 성취했지만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자유노조를 시작하면서 조직한 노조원 수가 1천만명이었는데 지금은 50만명밖에 되지 않는 것도 가슴 아프다.
자유노조운동이 승리한 뒤 당시 목표로 했던 것을 성취했다고 생각하나.
= 우리의 승리는 폴란드 민족의 승리였다. 우리가 승리하면서 다른 민족도 해방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한 데는 우리의 투쟁이 결정적이었다. 지금 폴란드는 유럽연합의 일부분인데 사실 우리- 자유노조- 가 정권을 잡으면서 폴란드가 유럽으로 합류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는 폴란드의 정치경제적 안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성취다. 확대해석하면 우리의 투쟁이 없었더라면 유럽이나 세계는 여전히 해방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노조운동 당시 소비에트 진영과의 싸움이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 당시 폴란드 내에만 20만명, 국경 근처에는 100만명의 러시아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핵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긴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이전에도 소비에트 진영에 맞서 많은 봉기가 일어났다. 프라하의 봄도 무참히 짓밟혔고, 1970년 폴란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은 폴란드군에게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됐다. 그 과정에서 45명의 노동자가 무참히 죽었다. 파업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 탱크가 몰려올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터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함께 모여 투쟁을 계속했다.
공산당의 조직기반이 노동자, 농민인 민중이며 노조가 가장 중요한 조직기반인데 공산당 체제에 대항해 노조가 투쟁했다는 사실이 모순되지 않나.
= 당시 노동자들의 권리는 막론하고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상태였다. 공산당은 공식적인 선언이나 철학으로는 노동자들을 위하는 체제라고 항상 말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단지 선전에 불과했다. 나는 공산당이 노동자들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다. 무엇보다 소비에트 진영이 패망하자마자 가장 재빨리 자본주의자로 탈바꿈한 사람들이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그렇다고 서구의 도덕이나 정치적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서구의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이뤄지고 또 선거를 통해 모든 게 정당화된다. 미국의 대통령들을 예로 든다면 이들의 부도덕함은 만천하가 알아도 선거를 하면 다시 당선된다. 이것이 서구 민주주의의 문제다.
철의 장막을 뚫고 자유노조운동이 승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 70년에 있었던 투쟁에서는 노동자들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투쟁의 대열로 이끌어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투쟁방식을 선택하기로 했다. 바로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투쟁이었다. 우리는 이 노선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고 곧 이 방법이 옳다는 것이 증명됐다. 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자유노조에 1천만명의 민중이 합류했다.
지난해 서거한 요한 바오로 2세가 자유노조운동에 많은 지원을 했고 당신에게도 많은 영감을 줬다고 들었다. 어떻게 교황이 당신을 지원했나.
= 70년에 유혈사태가 일어난 뒤 우리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그래서 투쟁이 계속 미뤄졌다. 그러다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됐다. 교황이 선출된 뒤 처음으로 모국인 폴란드를 방문하면서 숨통이 트였다. 당시 교황은 우리에게 혁명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공산주의 진영의 개혁을 원했다. 교황은 우리 민족을 위해 싸우는 게 다른 민족을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당시 폴란드 출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자 소비에트 진영은 발칵 뒤집혔다. 교황은 공산주의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 단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다고 본다. 무엇보다 그로 인해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의 승리 요인을 분석한다면 교황의 공로가 50%를 차지하고 나와 자유노조가 30%, 그리고 20%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승리에서 교황이 차지한 비중은 너무나 컸다.
승리의 50%가 교황의 공로
공산주의 체제를 무너뜨린 당사자로서 빈부격차가 극심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 만약 10%의 소수가 90%의 부를 차지하는 체제가 지속되는 한 자본주의는 생존하기가 어렵다. 세계화는 이러한 부의 편제를 가능하게 만들어왔다. 부의 이동이 자유로워졌고 이로 인해 상대적 부의 편차가 더욱 심화됐다. 당연히 이 문제는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 세계화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확대재생산하는 기능을 주로 한다면 이를 막는 게 당연하다. 지금부터 우리는 세계화가 경계를 없애고 분리를 막고 통일을 진전시키고 사회적 기본요구를 충족시키도록 만들어나가야 한다. 지난 20세기는 땅을 소유하기 위한 투쟁을 주로 했다. 이에 반해 지금은 지식정보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지금 음식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보다 통신이나 정보를 위한 비용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지난 세기에 중요했던 조직이란 것도 사실상 그 개념이나 역할에서 이미 구시대적인 낡은 것이 돼버렸다. 어쨌든 인류가 모두 잘살기 위해서는 구시대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해 좀더 진보한 사고체계를 수립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즉, 세계화의 긍정적인 면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을 몇번 방문했다. 한국 방문에서 느낀 인상과 더불어 한국의 노동운동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한국은 짧은 기간 안에 경제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이로 인해 노사간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안고 있는 문제는 지금 자유노조가 안고 있는 문제와 거의 유사하다. 한국의 노동운동을 보면서 노동자들이 너무 서두른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혁명을 하라고 부추기고 싶지 않다. 다만 평화적인 방법의 투쟁을 통할 때에만 참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평화적 투쟁은 전투적인 투쟁보다 더 어렵고 복잡하며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방법만이 더 많은 사람들을 연대하게 만들고 끝내는 승리의 길로 이끈다고 확신한다. 자유노조운동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노동자에서 세계적인 지도자가 된 전설적인 입지전적 인물이다.
= 나는 다른 정치가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 노동자로 노조운동가로 그리고 나중에는 대통령이 됐다. 이런 삶의 배경으로 인해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정치가들은 없다. 내가 좋아한 인물은 교황 요한 바로오 2세뿐이었다. 물론 많은 세계적인 정치가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한번씩 농담조로 “당신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나요? 당신은 여기 소속이 아닌데 말이죠”라고 말하면서 나를 간접적으로 격하시키기도 했다. 또 노동자들이 모인 곳에 가면 “당신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인데 왜 여기에 왔죠?”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었다. 이것이 나의 인생이었다.
국가와 노동자들이 같은 이슈로 연대해야
자유노조운동 25주년을 맞아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혼재된 세계에 살고 있다. 뚜렷한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닌 그런 세계에 살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나름대로 문제를 갖고 있고 세계적인 차원의 문제도 산재해 있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연대로만 풀어나갈 수 있다. 국가와 국가의 노동자들이 같은 이슈와 문제를 갖고 연대를 모색하고 조직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 조직간의 연대도 물론 필요하지만 개인간의 연대 또한 중요하다. 세계는 아름다운 곳으로 우리가 노력만 한다면 모두 잘살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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