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유럽 지도를 새롭게 그리는 창조자들인 유럽연합 공무원 입시의 세계
시험 거쳐 예비 리스트에 이름 올리고도 언제 발령받을지 몰라 로비전도</font>
▣ 브뤼셀=글·사진 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포르투갈 출신의 로드리고(29)씨는 포르투갈 농협의 브뤼셀 지소 주재관이었다. 올 봄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는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브뤼셀에서 유로크랫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브뤼셀에서 일하면서 사귄 네덜란드 국적의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싫어서라도 꼭 합격을 하고야 말겠다”며 각오가 대단했다.
소득세는 소속 국가 분담금에서 차감
유럽연합의 공무원을 영어로는 ‘유로크랫’이라고 통칭해 부른다. 유럽연합이 있는 브뤼셀은 유로크랫의 도시다. 2001년 말 브뤼셀의 유로크랫은 정규직 2만9647명, 비정규직 1846명에 달한다. 같은 브뤼셀에 있으면서 26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직원이 4500여명쯤 되니 유럽연합에 고용된 유로크랫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대략적인 비교가 된다.
지난 2004년에 개정된 유럽연합 공무원 조직에 따르면 유로크랫은 크게 행정직(AD)과 보조 행정직(AST) 2개 직군으로 나뉘어 16단계의 일원화된 계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 AD 직군(Administrators)은 대학 졸업 또는 3년 이상 수료의 학력이 필요하며, AST 직군(Assistant Administrators)은 전문대졸 또는 고졸 이상의 학력을 요구한다.
집행위원 같은 정무직이 아닌 직업 공무원으로서 가장 높은 등급은 AD 16등급이다. 우리말로는 총국장(Director-general)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집행위원회는 분야에 따라 소속 총국들을 거느리는데, 실제로 실무 정책은 이들이 최종 책임을 진다. AD 등급 중에 가장 낮은 AD 5등급은 아무 경력이 없는 대졸자들이 처음 취업했을 경우에 해당된다. AST 등급으로 가장 낮은 등급은 AST 1등급으로 주로 단순 기술직(Unskilled Worker)이다. 이를테면 신입 운전기사직이 여기에 해당된다.
유로크랫들은 비교적 높은 보수와 각종 혜택을 받는다. 2005년에 집행위원회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AD 5등급의 초임 월급은 3811유로(약 480만원), AST 1등급은 2325유로(약 290만원)였다. 이외에 각종 가족수당, 국외거주 수당, 품위유지비 등을 받으며, 자녀에게는 집행위원회가 브뤼셀에 설립한 유러피언 스쿨에서 실비로 교육받을 수 있는 특혜를 준다. 또 35년 이상 장기 근속한 경우에는 퇴직 직전 기본 급여의 70%를 연금으로 지급한다. 유로크랫들이 내는 소득세는 국적을 가진 국가가 아닌 유럽연합에 낸다. 이 소득세는 각 회원국이 유럽연합에 내는 회원국 분담금에서 차감된다. 유럽연합 소속 국적을 가진 유로크랫이라면 일하는 것만으로도 국가에 실질적인 ‘애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외에도 여러 가지 유로크랫의 유혹적인 조건들이 있다. 업무의 중립성을 위해 일정 등급 이상의 직원은 외교관의 신분과 각종 면책특권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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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위원이나 유럽의회 의원 같은 정무직이 아닌 한 유로크랫의 정규 직원은 모두 공개 경쟁 시험을 통해 충원된다. 따라서 유럽연합에 정규 직원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모집 공고문은 집행위원회가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관보를 통하거나 회원국 일간지를 통해 발표된다. 하지만 합격하더라도 바로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속 국가에서 이뤄지는 1차 서류전형과 선택형 필기시험, 2차 논술형 필기시험, 브뤼셀에서 있는 3차 구두시험을 거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3차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예비자 리스트에 올라가는데, 자신이 지원한 분야의 기관에서 해당 직종에 결원이 생길 때마다 한 사람씩 불러 다시 면접을 본다. 예비자 리스트에 오른 사람일지라도 정해진 기간(보통 1년) 내에 임용되지 않으면 리스트에서 삭제돼 모든 것이 무효가 된다. 따라서 예비자 리스트에 오른 수험생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발령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개인적으로 희망 직종의 인사 담당자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로비를 벌이기도 한다.
공무원 시험대비 학원은 없어
유로크랫에 지원할 수 있는 조건은 직급마다 조금씩 다른데, 회원국 또는 회원국 가입 예정 국가의 국민일 것, 각 회원국 법률이 정한 의무 복무(예를 들어 병역의 의무)를 마친 사람일 것, 업무에 합당한 자격 조건을 갖춘 사람일 것, 유럽연합의 공식언어(지난 5월 10개국이 새로 가입하면서 공식언어는 20개가 되었다) 중 두 가지에 익숙하고 그중의 한 가지는 유창할 것 등이 대체적인 공통 사항이다. 통·번역직의 경우에는 모국어 외에 공식언어 두 가지를 아주 잘할 것 등이 추가된다.
나이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AD 5등급의 경우 대부분의 신규 임용자들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다. 인종·성별·종교적 신념 등에 차별을 두지 않으며, 어느 특정한 국가를 위해 할당량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는 채용 단계에서 국가별로 인원 안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출신국별로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순이며 벨기에는 소국임에도 지리적 이점 때문에 네 번째로 많은 유로크랫을 배출했다.
로드리고씨처럼 경력자는 좀더 좋은 조건에서 채용될 가능성이 많다. 올해 AD 7등급에 합격한 스페인 출신의 자비에르(38)씨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몇몇 다국적 기업에서 회계 담당자로 일하다가 유럽연합 회계 검사원에 취업한 경우다. 그리스 출신의 이오니스(36)씨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소규모 택배회사에서 책임자로 있다가 유럽의회의 문서 운송 담당 부서(AST 7등급)에 취업이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기업이나 단체에서 인턴이나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경력을 쌓는 것을 우선순위에 둔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AD 5등급에 응시할 수도 있지만, 다른 직장을 다니면서 경력을 쌓아 그보다 더 높은 AD 7등급이나 8등급에 응시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처럼 대학생들이 공무원 시험 대비 학원을 다닌다든가 학교가 고시반을 운영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경력자들만 합격되는 것은 아니다. 올해 AD 5등급에 합격한 영국 출신의 다미엔(29)씨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집행위원회의 외교담당 부서에 첫 직장을 잡았다.
1999년 자크 상테르 위원장이 이끌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총사퇴한 부패 스캔들은 유럽연합 조직의 최대 수치였다. 불법적인 정실 인사가 발단이 되었던 이 사건은 유로크랫이 관료제의 병폐에 빠져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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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행사하는 로비스트 1만명
유로크랫에 대한 로비스트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면서 그들의 중립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미국 조지아대학의 마이클 스미스 교수는 그의 저서 <유럽의 해외 및 보안 정책>에서 “유럽연합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이사회에 이름을 올리고 분담금을 제공한 것도 미국이 집행위원회에 강력한 로비를 행사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집행위원회가 미국과 스위스의 업체가 개발한 유전자변형 농산물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들 업체의 로비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사고 있다. 현재 브뤼셀에서 각종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비스트의 수는 1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 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신임 칼라스 행정 담당 집행위원은 “유럽연합이 로비스트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오는 10월까지 업무 투명성 강화를 위한 법규를 개정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여러 논란이 있음에도 유로크랫은 아직 미완성인 유럽연합의 지도를 새롭게 그리는 창조자 구실을 한다. 그들은 언제나 뉴스의 중심에 서 있다. 그들은 하루에도 수천명의 사람을 만나고, 수백건의 결정과 법안을 처리하며, 수십건의 기자회견을 연다. 그리고 세계는 매일매일 그들이 발표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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