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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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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으로 ‘스타’됐어요!

등록 2005-09-01 00:00 수정 2020-05-03 04:24

시청자 투표로 ‘최고의 여가수’ 뽑는 <후난TV> 오락프로에 대중들 열광
오랫동안 억눌려온 온갖 ‘욕망’들을 깨워주며 중국 최대의 충격으로까지

▣ 베이징=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매주 금요일 밤, 평범한 직장인 후(胡) 선생의 눈과 귀는 온통 TV에 ‘꽂힌다’. 이날은 퇴근하자마자 바로 저녁을 먹고 평소 아내와 함께 하던 ‘동네 한 바퀴’ 대신 일찌감치 TV 앞에 죽치고 앉는다.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금요일 저녁 식사 시간에 나누는 주요한 화제는 조금 뒤 8시30분부터 방송될 한 TV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다. 매주 이 부부는 누가 오늘 탈락할 것인가를 놓고 내기를 한다. 가끔은 서로 엇나간 결과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설전을 벌일 때도 있다.

프로그램 비판한 <cctv>에 비난 쇄도</cctv>

같은 시간대, 다른 중국인들의 눈과 귀도 TV 화면으로 쏠린다. 평소 같으면 동네 주변이 스포츠댄스와 각종 운동, 산보하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할 때지만 금요일 이 시간대만큼은 동네가 조용해진다. 방송이 끝난 뒤 쏟아지는 온갖 가십 기사들 중에는 둘 다 박사학위를 가진 어떤 부부가 대판 부부싸움을 했다는 내용도 있다. 서로 지지하는 후보가 달랐기 때문이다. 무슨 중요한 선거라도 하냐고? 엄밀하게 말하면 일종의 선거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도 굉장히 민주적인 선거다. 그래서 평소에 직접투표를 통한 ‘민주 선거’를 경험해보지 않은 중국인들이 더 이 프로그램에 열광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프로그램에서는 ‘민의’가 절대적인 힘과 권위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프로그램이냐고?

그냥 단순한 오락 프로그램이다. 전국 각지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과한 여성들의 노래자랑 경연대회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 대회에서 1등을 ‘먹는’ 순간 그는 곧바로 ‘뜬다’. 스타가 되는 것이다. 이름하여 <자오지 뉘성>(超級女聲·최고의 여가수)이 된다. 지난해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올해 두 번째 자오지 뉘성을 뽑는다. 지금 중국은 온통 이 <자오지 뉘성>에 중독돼 있다.

<자오지 뉘성>은 중국 지방 TV 방송국 중 하나인 <후난(湖南)TV>에서 지난해에 만든 대중 오락 프로그램이다. 처음 이 프로가 방송될 때만 해도 아무도 이것이 ‘대사건’이 되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반년도 채 안 돼 이 프로그램은 중국 사회의 일대 ‘사건’이 되고 말았다. 한 잡지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지난해 중국 최대의 ‘문화적 충격’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올해 들어 이 프로의 ‘충격’은 더 강해지고 있다. 중국 내 모든 TV 프로그램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광고수익으로 뭇 방송사들의 시샘과 부러움을 사고 있다. 중국 TV 매체의 ‘황제’로 군림해온 <cctv>마저도 내놓고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cctv>의 한 프로그램에 유명한 사회자들이 출연해서 <자오지 뉘성>을 ‘까는’ 발언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한마디로 “저속하기 그지없고, 사회적 책임감이 결여된 프로”라는 것이다. 이 방송이 나간 뒤 인터넷을 비롯해 상당수 언론매체에서는 “그런 ‘저속한’ 프로그램을 놓고 <cctv>의 간판급 사회자들이 나서 욕을 해대는 모양새가 더 저속하다”는 비난이 쇄도하기도 했다.
최근 몇달 동안 중국 내의 모든 언론매체와 문화평론가들, 유명 지식인들도 입에 거품을 물고 ‘자오지 뉘성 현상’에 대해 떠들고 있다. 심지어 베이징의 유력 일간지 <신징바오>(新京報)는 한 지면에 걸쳐 ‘자오지 뉘성 시리즈 평론’이라는 제목으로 매일 유명 논객과 일반인들의 논평을 내보내고 있다. 한 지방 방송국의 대중 오락 프로그램이 중국사회의 문화적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중이다.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서민의 승리’다. 민중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대 위의 사람이 황제, 재상, 대스타 등이 아니라 보통 서민이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이유도 이 프로가 처음부터 끝까지 서민들의 참여에 의한 축제이기 때문이다.” <인민일보> 인터넷판 <인민왕>을 비롯해 상당수 신문들이 자오지 뉘성의 인기몰이 원인을 분석한 내용 중 한 부분이다.
중국인들이 이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참여의 상상’을 직접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평론가는 이 프로그램이 중국에서 ‘문화민주’를 실현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직접 민주주의제’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개의 대중 오락 프로그램에 거창한 정치적 의미까지 부여됐다.

‘노래 부르고 싶은 여성’이면 누구나 참여

이런‘정치적 평가’들이 나오는 이유는 일반 시청자들이 투표를 통해 우승자와 탈락자를 뽑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권위 있는 심사위원들이 참가자들의 당락을 결정하는 게 일반적인 오락 프로의 규칙이었지만 이 프로그램은 그런 ‘상식’을 뒤집었다. 시청자들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등을 이용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시청자들의 이러한 직접투표는 자오지 뉘성의 최종 당락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때문에 생방송이 진행되는 금요일, 중국 전역에서는 각 후보들의 열성팬들이 지하철역이나 백화점 앞 등에 모여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줄 것을 호소하는 이색 ‘선전전’을 펼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이 프로의 심사위원 중 한명이 시청자들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가 시민들의 빗발치는 비난을 받고 교체된 일까지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이 프로는 시청자가 곧 왕이고 주인이라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주었다. 이 역시 중국에서는 좀체로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프로에는 복잡한 자격조건 없이 나이, 직업, 신분 등을 막론하고 ‘노래를 부르고 싶은 여성’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유명 문화평론가이자 상하이대학교 교수인 주다커(朱大可)는 “(이 프로는) 처음으로 중국인들로 하여금 선거와 투표 참여를 통해 자신들의 우상을 만드는 시스템을 허락했다”며 이 프로는 이미 문화적 의미 자체를 벗어났다는 의미심장한 비평을 하기도 했다. 어떤 네티즌은 “봐라. 중국인들도 기회와 조건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민주주의를 할 수 있지 않느냐”며 정치적 민주주의를 들먹이기까지 했다.
이와는 반대로 이 프로그램은 상업적 오락물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주를 이루고 있다. “스타가 되는 것과 돈 버는 것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꿈’인데, 이 프로그램은 바로 이것들을 대리 만족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의 유명한 사회자 리징(李靜)이 분석하는 자오지 뉘성의 성공비결이다. 다시 말해 이 프로그램에는 모든 중국인들의 세속적인 꿈이 함축돼 있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여성들의 대다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다. 전국 각지에서 몇만 명의 경쟁률을 뚫고 본선에 오르는 앳된 신세대들은 “왜 참가했느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꿈을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들의 ‘꿈’이란 바로 스타가 되는 것, 그리고 유명해지는 것이다.
스타가 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은 꿈을 품은 이들은 비단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소녀들뿐만이 아니다. 제법 나이가 든 ‘언니들’도 ‘뜨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얼마 전 중국 인터넷을 발칵 뒤집어놓은 ‘푸룽(芙蓉) 언니’다. 올해 28살의 다소 ‘연로한’ 그녀는 몇년 전부터 베이징대와 칭화대 등 중국 명문대의 인터넷 게시판에 기이한 포즈로 찍은 자신의 사진들과 일기들을 올려서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다. 외모도, 학벌도, 직업도 모두 변변치 않은 푸룽 언니는 “나는 언젠가 반드시 유명해질 사람이었다”는 특유의 ‘공주병 배짱’ 정신 덕에 진짜로 하루아침에 벼락 스타가 되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인터넷에 자신의 성생활 일기를 올린 ‘무쯔메이’라는 여성이 중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스타’가 된 뒤 제2, 제3의 무쯔메이들이 중국 인터넷을 휩쓸며 유명인의 반열에 오른 적이 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성’을 폭로하거나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푸룽 언니나 <자오지 뉘성> 참가자들처럼 자신의 ‘끼’를 발산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유명해질 수 있게 되었다. <자오지 뉘성>의 또 하나의 성공비결은 바로 이렇게 평범한 중국인들의 개성 표출 욕망을 맘껏 발산하게 하고 또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것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

공주병 배짱으로 스타된 ‘푸룽 언니’

중국 인민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위궈밍 교수는 <신징바오>를 통해 “과거의 중국은 매우 고상한 사회였다. 사람들은 모두 최고의 이상을 추구해야 했고 성인이 돼야만 했다”며 <자오지 뉘성>은 바로 그러한 천편일률적으로 만들어진 중국인들의 가치관을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오랫동안 억눌린 채 감금돼왔던 온갖 ‘욕망’들이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자오지 뉘성은 바로 그러한 욕망들을 정확히 꿰뚫었다. 무대 위에서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산하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스타가 되는 것, 그리고 그 스타를 만드는 것이 사회 엘리트나 권력자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 중국인들은 지금 그런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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