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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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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동운동, 50년만의 대사건!

등록 2005-08-04 00:00 수정 2020-05-03 04:24

국제서비스노조연맹과 전미트럭운송조합의 산별노조총연맹 탈퇴 결정
여성·흑인·이주·비정규노동자 중심으로 한 그룹의 반란은 성공할 것인가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이제 미국 노동자들의 새로운 시대가 개막됐다.”(국제서비스노조연맹·SEIU 앤디 스턴 위원장)

미국 노총이라고 할 수 있는 산별노조총연맹(AFL-CIO·위원장 존 스위니)이 분열 위기에 직면했다. 국제서비스노조연맹과 전미트럭운송조합(팀스터·Teamsters·위원장 제임스 호퍼)은 시카고에서 AFL-CIO 연차총회가 시작된 지난 7월25일 AFL-CIO 탈퇴를 각각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두 조직은 조합원 규모에서 AFL-CIO 산하 최대 산별노조다. 팀스터와 SEIU가 이탈을 선언한 데 이어 식품상업연합노조(UFCW)와 호텔·요식업노조(HERE)도 이탈에 동참했다. SEIU와 팀스터 양대 노조 조합원은 둘 다 합쳐 260만명가량으로 AFL-CIO 전체 조합원(56개 직종 및 산별노조·약 1300만명)의 20%를 차지한다.

‘주변부 노동계급’의 새로운 물결

이들 4개 조직의 AFL-CIO 연차 총회 보이콧 사태가 전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건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과연 21세기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이 ‘주변부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태동하는가?”에 있다. SEIU와 팀스터 등 이번 탈퇴 사태를 주도하고 있는 노동 조직은 이른바 ‘승리를 위한 개혁’(Chang to Win Coalition) 그룹인데, 이 그룹이 대표하는 600만명의 노동자가 주로 여성·흑인·이주노동자·비정규 노동자 등 주변부 노동자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SEIU 스턴 위원장은 “우리는 노조로 조직화되지 못한 미국 노동자의 90%에 대해 대대적인 조직화 노력을 할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파트타임·비정규직·이주노동자가 급증하는데도 AFL-CIO는 근본적으로 변화할 의지를 여전히 갖고 있지 않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변화를 꾀한다면 ‘미국의 꿈’을 재건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팀스터의 호퍼 위원장도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AFL-CIO는 지난 수십년간 조합원의 감소 흐름을 막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미국 노동운동의 힘을 강화하는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스위니가 AFL-CIO를 이끈 지난 1995년 이후 미국의 노조조직률은 15.5%에서 최근 12.5%로 계속 떨어졌고 민간부문 노조 가입률은 8%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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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조직의 반란이 갑자기 터져나온 건 아니다. SEIU를 비롯해 ‘승리를 위한 개혁그룹’에 참여하는 7개 노조는 “스위니 위원장이 조직화 사업을 내걸긴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지나치게 민주당에 치우친 정치적 노선을 걸어왔다”고 불만을 터뜨려왔다. AFL-CIO의 대대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조직 주변부 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조직화를 통해 미국 노동운동의 미래를 건설하자”며 스스로 별도의 개혁그룹을 만든 것이다.

SEIU와 팀스터가, 미국의 보수적인 실리주의 노동운동에 반대해 좌파 노선을 걷는 세력은 아니다. 그러나 두 조직은 흑인과 스페인계 이주노동자 등 주변부 노동자들과 지속적인 연계를 형성해왔고, 특히 밑바닥 조합원들의 전투성 강화 전략을 취해왔다. 이에 따라 미국 노동운동의 부활을 꾀하는 조직으로 평가받아왔다.

대규모 파업으로 정규직 전환을 얻어내다

우선, SEIU는 1921년 이민 아파트 경비원들이 결성한 조직으로 180만명의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다. 주로 공공 부문과 병원의 비정규 노동자, 빌딩 청소·관리 노동자, 라틴·스페인·아시아계 이주노동자, 흑인 등으로 구성돼 있고, 전세계적으로 노조조직률이 하락하는 중에도 1980년대에 50%의 조합원 증가율을 기록할 정도로 급속하게 성장하는 노동조합이다.

SEIU는 1980년대 중반부터 조직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조직활동가다.” “조직하라, 조직하라, 또 조직하라!”가 SEIU의 슬로건이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100만 조합원 내부 대토론’을 통해 저임금의 비정규 고용이 증가하는 서비스 부문에서 매년 3만∼4만명의 신규 조합원을 조직하자고 결의했다. 이에 따라 SEIU는 300여개 노조지부와 △노조지부 재정의 20%를 비노조 사업장에 대한 조직사업에 투입 △새로운 조직 전담 활동가 150명 채용 △중앙노조 예산의 절반을 신규 조합원 조직사업에 재배정 등 개혁 의제에 합의했다. 당시 SEIU 중앙노조에 단 4명이었던 조직 전담 활동가는 현재 5천여명에 이른다. SEIU가 벌인 조직화 사업의 가장 혁신적인 실험은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1991년부터 대대적으로 전개된 ‘빌딩 용역 노동자들을 위한 정의’(Justice for Janitors) 캠페인이다. 미국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의 극적인 성공이자 조직화 모델의 상징적 사건으로 알려진 이 캠페인을 통해 8천여명의 라틴계 이주노동자들이 조직화됐다. 그 누구도 캘리포니아에서 이런 감동적 드라마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저임금 비정규·이주노동자들의 또 다른 승리는 팀스터 노조가 이룬 것인데, 1997년 미국의 화물택배 다국적 기업인 UPS사에 대한 팀스터의 파업이었다. 수백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저임금 파트타임과 비정규 하청노동으로 전락시켜온 UPS에 맞서 팀스터는 1997년 8월 파업을 단행했다. 1990년대 미국에서 최대 규모로 기록된 이 파업에서 UPS 노동자 18만5천명은 15일간 대대적인 파업을 벌인 끝에 1만명의 정규직 전환과 높은 임금 인상을 쟁취해냈다. 이 싸움은 수십년 만의 ‘미국 노동계급의 대승리’이자 노동시장 유연화와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정면 돌파였는데, 쇠퇴의 길을 거듭하던 미국 노동운동에서 팀스터의 승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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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권력투쟁’일 뿐이라는 의견도

미국 노동조합운동은 이민·주변부 노동계급이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을 표방하고 기존 조직과 결별하는 과정을 겪어왔다. 1935년 광산노조 의장 루이스는 미국노조총연맹(AFL) 정기총회에서 직종별 AFL의 담합적 노사협조 노선에 반대해 새로운 산별노조 조직인 산별노조협의회(CIO)를 세웠는데, 당시 새로운 노동운동의 기반이 된 전투적 노동자들은 대부분 신이민 2세 노동자들이었다. 그 뒤 AFL과 CIO는 1955년 다시 조직적으로 화해하고 통합됐으나 이제 50년 만에 다시 분열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러나 팀스터와 SEIU의 이번 반란을, 미국 노동운동이 실리주의 노동운동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으로 변화하는 징조라고 보는 건 섣부르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사태가 “SEIU 스턴 위원장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이며, 개혁이나 노동운동 부활과는 상관없는 내부 권력 투쟁일 뿐”이라는 분석인데, 스위니의 AFL-CIO와 SEIU·팀스터 사이에 심각한 운동 전략과 노선상의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스위니는 1980년에 SEIU 위원장을 맡아 조직화 사업을 맨 처음 시작했던 인물로, 1995년 AFL-CIO 위원장을 맡은 뒤 기존의 무기력한 AFL-CIO 지도부 대신 강력하고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팀스터와 SEIU가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내걸고 AFL-CIO와 완전히 결별할 가능성도 있다. 이럴 경우 주변부·비정규 노동자 중심의 다른 노조 조직들까지 여기에 결합하면서 주변부 노동계급의 열망을 대변하는 새로운 노조연합체가 탄생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AFL-CIO의 추락

실리주의 노선으로 고전하면서 첨단산업 분야엔 전혀 발붙이지 못해

현재 미국의 노조조직률은 12%대(조합원 1600여만명)다. 노조조직률은 1945년 35.5%로 가장 높았다가 지난 60년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특히 저임금 서비스 부문에서 이주노동자 계층이 대규모로 등장했고, 이들 저임금 노동계급은 미국 중산층으로 편입될 희망을 잃어가는 가운데 미국 사회의 거대한 주변부를 형성하고 있다. 다수의 저임금 노동빈민층으로 등장한 이들은 자신들을 대변해주지 못하는 기존 노조를 불신임하고 나서는 판국이다.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미국의 노동계급이 처한 운명은 조직노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AFL-CIO는 오랫동안 민주당의 충성스런 외곽 노릇을 해온 결과 신자유주의 흐름을 막아내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계급이 계속 늘었다. 1980년대 초에는 임금 삭감을 필두로 한 양보 교섭 물결이 AFL-CIO 핵심 사업장에까지 파고들어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조합원 수는 격감했고 핵심 산별노조들은 지난 40년간 쟁취한 수많은 성과물들을 하나씩 내주었다. 뒤편에서는 탈노조화, 무노조 경영이 급속히 진행됐다. 노동자간 소득격차는 확대되고, 사용자들은 상시적으로 노조를 파괴했다.
실리주의 노동운동에 갇힌 AFL-CIO는 지역적·산업적 고용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1970년대에 막 성장하고 있던 반도체·컴퓨터 산업에 전혀 발붙이지 못했다. 실리콘밸리 등 거대한 첨단 공장들은 대부분 무노조 기업으로 세워졌다. 1980년대 중반에야 지역별로 진지한 조직화 노력을 시작했으나 대공장의 힘의 관계는 이미 사용자 지배로 돌아서 있었다. 이따금 노동자들의 반란이 터져나왔으나 노동조합운동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한 채 대부분 패배하고 말았고, 미국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좌절과 분노만 터뜨려야 했다. SEIU와 팀스터의 이번 반란은, 이들이 비록 ‘좌파 정치’를 내세운 건 아니지만 미국 주변부 노동자들의 분노와 좌절, 그리고 열망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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