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혁명 성공 위해 수백만달러를 뿌리며 지원한 서구 NGO의 배후세력
시민들은 친러정권을 친미성향 사카슈빌리로 교체한 미국의 야심을 경계한다
▣ 트빌리시=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소로스는 물러가라! 소로스는 그루지야를 떠나라!”
지난 6월28일, 십자가와 옛 그루지야 국기를 앞세운 50여명의 시민이 트빌리시 소로스재단 건물 앞에서 열띤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이 이곳에서 시위를 벌인 지도 벌써 3주가 넘었다. 이날의 시위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 그루지야의 초대 대통령 부인 감사후르디아 여사가 주도하고 있었다.
“소로스재단이 모든 악의 근원”
시위에 참가한 중학교 교사 바키아니(55)씨는 “소로스재단이 그루지야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장미혁명(2003년 11월)을 뒤에서 부추기면서 막대한 자금을 댄 게 소로스재단이며,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이나 현재 진행 중인 키르키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의 분쟁도 소로스재단의 배후 지원으로 일어난 것”이라며 소로스재단을 강하게 성토했다. 시위대들은 소로스재단을 그루지야에서 축출해야 할 대상 1호로 보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함성을 외치던 시위대들은 서서히 소로스재단 건물을 향해 행진해갔다. 재단 건물의 대문 앞에 멈추자 소로스재단쪽에서 관계자들이 몰려나와 시위 지도부와 격렬한 언쟁을 주고받았다.
“소로스재단을 해체하라!” “우리 재단의 사유지에서 즉각 물러나라!”
이렇게 밀고 당기면서 한동안 긴장이 고조됐고 서로 멱살잡이까지 하면서부터는 폭력적인 충돌이 예측됐다. 하지만 양쪽은 곧 이성을 되찾았는지 멱살잡이를 풀고 잠시 거리를 유지하다 한 발짝씩 물러섰다. 재단쪽은 건물 안으로 되돌아갔고 시위대는 조금 전에 시위하던 골목길로 물러난 뒤 다음날 시위 계획에 대해 알리고 시위를 해산했다. “소로스재단이 이 땅에서 물러날 때까지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는 대학생도 있었다.
필자는 시위를 끝까지 지켜보다 시위대가 해산한 뒤 소로스재단을 방문해 다치아슈빌리 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다치아슈빌리 이사장은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시위대와 고성을 주고받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었다. “재단 건물 앞에서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인해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졌다”면서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기도 했다. 이날 일어난 시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우리 단체는 그루지야를 좀더 발전된 민주사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시민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소로스재단이 장미혁명에 개입한 사실을 아무 거리낌없이 시인했다. “부패한 정부를 바꾸기 위해 일한 게 뭐가 잘못이냐? 이 일은 NGO(비정부기구)가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소로스재단은 그루지야에서 10년간을 활동해왔다. 문화활동과 교육 프로그램의 운영이 주된 활동이었으나, 장미혁명에 개입해 성공한 사례를 기반으로 좀더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해왔다. 다치아슈빌리 이사장은 “장미혁명 뒤 정부가 좀더 투명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개혁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어 NGO의 역할이 더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라면서 그루지야 정치에 계속 개입할 뜻임을 내비쳤다.
소로스재단이 그루지야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11월 그루지야에서 일어난 장미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어난 장미혁명은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사카슈빌리 체제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많은 그루지야 국민들은 셰바르드나제의 부패권력을 축출한 데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셰바르드나제 정권을 대체한 사카슈빌리 정부를 흔쾌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국을 대표하는 소로스재단이라는 제3자가 개입해 국가의 운명을 바꿔놓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카슈빌리, 세르비아에서 배우다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된 직후 NGO들은 동구권 유럽과 옛 소비에트권의 나라에서 자선의 목적이나 문화교류의 명목으로 우후죽순처럼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 조직체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서유럽의 재정 지원으로 생겨난 것으로 주로 영어를 구사하는 젊은 인텔리층을 중심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루지야에서 현재 말썽이 되고 있는 소로스재단은 미국의 억만장자인 조지 소로스의 이름을 따서 뉴욕에 세워졌는데, 동구권이 붕괴된 뒤 1990년 초부터 동구 유럽 국가들과 옛 소비에트 국가들에서 각 나라마다 다른 이름으로 ‘열린사회연구소’나 ‘유라시아연구소’ 등의 NGO로 세워져 지금까지 활동해왔다. 이 연구소들은 정치교육 프로그램이나 미디어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층들을 조직해 옛 소비에트 국가들이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데 한몫해왔다. 그루지야의 장미혁명이나 우크라이나의 황색혁명, 키르키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정치적 소용돌이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소로스재단이 후원하는 NGO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뒤늦게 NGO들의 활동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올해 초 NGO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경고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의 경고는 우크라이나의 권력 교체 뒤에 나온 것이어서 당연히 소로스재단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서구 세계의 물질적 후원을 받은 NGO의 정치적인 활동이 처음으로 성공적인 결실을 거둔 무대는 2000년 9월의 베오그라드였다. 당시 세르비아에서는 미국과 서유럽의 지원을 받은 ‘저항’(Optor)이라는 학생그룹이 조직되어 밀로셰비치를 몰아내는 전위조직으로서 성공적인 역할을 했다. 이 그룹은 총선에서 밀로셰비치의 사회당이 승리하자 이를 부정선거로 몰아붙여 거리의 대중시위를 통해 밀로셰비치를 권력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세르비아에서 NGO의 성공 사례는 옛 소비에트권에서 변화를 열망하는 세력들의 관심을 한순간에 받았고, 그 여세를 몰아 세르비아의 활동가들은 자신의 경험을 다른 옛 소비에트권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장미혁명이 있기 전 2003년 5월, 사카슈빌리는 베오그라드를 방문해 2000년 9월의 주역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그 응답으로 세르비아의 활동가들은 2003년 여름에 그루지야를 방문했다. 이들은 여름 내내 2천명의 그루지야 학생을 대상으로 세르비아에서 성공한 권력 교체의 사례를 교육시켰고, 교육 프로그램이 종결된 뒤에는 곧바로 교육받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크마라’(이제 그만)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바로 이 그룹이 11월의 장미혁명의 중심세력이었고 사카슈빌리의 친위그룹으로 활동했다.
장미혁명의 과정을 보더라도 세르비아에서 2000년에 일어난 혁명과 거의 유사하게 전개됐다. 2003년 11월3일, 그루지야에서 열린 총선거는 사카슈빌리를 지지하는 단체들과 미디어에 의해 부정선거로 규정됐고, 사카슈빌리는 총선에서 자신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날을 위해 준비해온 학생조직인 크마라의 조직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트빌리시 거리는 합세한 시민들과 더불어 반 셰바르드나제 시위로 뒤덮였다. 계속되는 거리시위로 인해 11월23일, 셰바르드나제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을 동원한 시위 진압을 간접적으로 지시했지만 군에서 이를 거부하면서 사실상 셰바르드나제의 권력은 끝을 맺었다. 그 뒤, 2004년 1월의 재선거에서 사카슈빌리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오렌지혁명 적극 후원
열린사회연구소는 학생그룹을 처음 조직할 때부터 50만달러를 최초로 기부하기 시작해 장미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수백만달러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사회연구소의 후원으로 성공한 그루지야의 정치적 변혁은 다시 흑해를 건너 우크라이나로 파급됐고, 이른바 ‘오렌지혁명’이라는 정치 변혁을 겪으면서 친러 정권이 몰락하고 친미 정권이 들어섰다. 우크라이나에서도 소로스 재단은 오렌지혁명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조직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루지야나 우크라이나의 정치 변혁은 NGO의 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었고, 이에 박자를 맞춘 미국 정부의 역할도 상당한 몫을 차지했다. 장미혁명의 와중에서 미국 정부는 수시로 성명을 발표해 셰바르드나제 정부를 비판했고, 선거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성명까지 발표하면서 그루지아의 정치에 깊이 간여했다. 그리고 셰바르드나제가 물러나면서 군부의 개입을 지시하자 미국에서 직접 제지하기까지 했다는 비공식 보도도 나돌았다. 장미혁명을 통해 2004년 초, 미국 유학파이면서 친미적 인물인 사카슈빌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미국은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축하사절로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5월에는 부시 대통령까지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 기간 중 갑자기 그루지야를 방문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루지야의 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것과는 달리 아제르바이잔의 선거 과정에서는 미국의 이중적인 대외정책의 잣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루지야와 국경을 접한 이웃 나라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그루지야보다 사흘 먼저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이 선거에서 대통령인 아버지를 이은 아들 알리예프가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곳에서도 선거를 감시한 공정선거 감시단이 선거가 부정이라면서 재선거를 주장했다. 그루지야의 선거에 대해 보인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미 정부는 이를 묵살하고 곧바로 아들 알리예프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미 정부의 성명이 나간 뒤, 곧바로 알리예프는 야당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반민주적 폭거를 자행했다. 미국 정부가 알리예프 일가의 집권을 감싸준 이유는 다름 아닌 알리예프 일가의 굳건한 친미성 때문이다. 반면 셰바르드나제 정권이 축출된 이유는 친러시아적 성향 때문이었다.
그루지야의 장미혁명이나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을 통해 볼 때 미국 정부가 전세계에서 주도하는 정권 교체 방식도 변화됐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미국의 정권 교체 방식은 세계 각지에서 군사 쿠데타를 통해 친미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선 이후 옛 소비에트 국가에서 NGO를 통한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친미 정권의 수립을 추진하는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것도 저것도 통하지 않을 경우 이라크식의 전쟁을 통한 정권 교체 방식을 선택한다는 사실도 이미 보여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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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이 부재한 혼란의 시기… 러시아와 미국 모두 원하지 않아
장미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셰바르드나제가 집권할 당시 그루지야는 무법천지와 같은 상황이었다. 법이 있기는 했지만 이중적 잣대로 집행됐기 때문에 정의가 실현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사적인 관계에 따라 이뤄졌기 때문에 특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국유재산의 사유화 과정에서 갑자기 어떤 사람이 엄청나게 부유해지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런 계속적인 부패의 재생산 구조가 2003년 11월 일어난 장미혁명의 원인이었다.
장미혁명이 일어난 지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시민들은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무엇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장미혁명이 일어난 뒤 많은 것을 기대했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 답답하다. 현재 그루지야에서 가장 뒤떨어진 분야가 시스템이다. 여전히 모든 것이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우선 모든 분야에서 시스템을 수립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또 다른 하나는 정부나 의회에서 질 낮은 관료나 의원들을 청산하고 질 높은 인물로 대체하는 일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인물들이어서 부패 청산이 어렵다.
그루지야는 강대국들의 대립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러시아가 군사기지를 옮겨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의 진출을 뜻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가 떠나면 미국이 들어올 것이라 추측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우리는 미국이든 러시아든 외국 군대가 이 땅에 주둔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 민족은 오랜 문화를 간직한 고대 민족이며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다. 이곳에 오랫동안 러시아군이 주둔하면서 그루지야가 제대로 무장하지 못했다. 러시아가 물러나면 그루지야도 스스로 무장을 하여 자주적인 국방력을 키우는 게 중요한 목표이기도 하다. 미국이 이를 지원할 수는 있지만 미군이 러시아를 대신해 들어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러시아군이 그루지야를 떠나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루지야와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다. 스탈린이라는 인물을 배출한 곳이 바로 그루지야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그 틈을 타 1919년 그루지야는 독립국가를 수립한 역사를 갖고 있다. 물론 오래가지 못하고 3년 뒤 러시아군에 점령되고 말았다. 사실은 스탈린 때문에 그루지야가 많은 고초를 겪은 셈이다. 소비에트의 연방으로 있으면서 언제나 독립을 꿈꿔왔으나 언제나 좌절됐다.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이유도 소비에트 연방으로 있으면서 발전하기는커녕 모든 부문에서 후퇴한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발전시켰다면 누가 러시아가 물러나기를 원하겠는가. 이 때문에 러시아가 깨끗하게 물러나줬으면 하며 그루지야를 그만 괴롭혔으면 한다. 이 작은 나라에 피난민만 30만명을 넘어선다. 현재 일어나는 정치적 혼란과 치안 부재, 경제적 문제는 모두 러시아가 뒤에서 일으키고 있다고 확신한다. 러시아가 물러나면 그루지야는 분명히 더 좋아지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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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500만명의 작은 나라 그루지야가 이처럼 세계 강대국들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무엇보다 지리적 중요성 때문이다.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남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서쪽으로는 흑해와 터키를 접하고 있어 군사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 코카서스 지역의 중심지다.
특히 지난 4월에 완공된 바쿠-체이한 파이프라인은 그루지야의 트빌리시를 통과하고 있다. 카스피해의 석유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시작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공급되어 그루지야를 통과해 터키의 남쪽 항구인 체이한까지 이어져 그곳에서 선박으로 세계 각지로 수송된다. 파이프라인을 통한 경제적 가치를 고려한다면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이나 러시아의 관심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유럽이 그루지야에 퍼부은 원조는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았지만 극도에 달한 셰바르드나제 정부의 부정부패로 인해 원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미국이나 유럽이 그루지야 정부의 극도의 부패를 눈감아주면서 계속 원조를 해온 이유도 다름 아닌 그루지야의 지리적 중요성 때문이다.
당연히 미국과 러시아의 정치군사적 갈등은 이 지역에서 계속됐다.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으로 본다면 좀더 세련된 방법을 동원한 미국이 군사적 힘에만 의존해온 러시아를 눌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러시아와 미국 사이를 오가며 정치적 게임을 벌여온 셰바르드나제 정권의 몰락은 곧 러시아의 패배를 의미한다. 셰바르드나제 정권의 몰락은 즉각적인 러시아 군사기지의 철수로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군은 이미 그루지야에서 철수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현재 러시아군의 장비와 무기를 아르메니아로 옮기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에서 독립한 그루지야는 지하경제와 조직범죄가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하고 무질서한 국가로 돌변했다. 게다가 흑해에 위치한 북서쪽의 압하지야와 북동쪽의 남오세티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의 거주지인 아칼칼라키 등에서는 자치권이나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어 국가의 영유권까지 위협당하는 형편이다.
장미혁명이 일어난 지 1년 반의 기간이 흘렀지만 개혁의 속도는 시민들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40%의 높은 실업률과 마피아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힘든 삶을 견디고 있는 시민들의 인내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부패한 셰바르드나제 정권이 물러가고 사카슈빌리 정권이 들어설 때 시민들이 가졌던 희망은 원망으로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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