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유럽인권재판소의 재심 결정으로 기쁨에 들뜬 쿠르드인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향방이 석방의 변수</font>
▣ 아테네=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쿠르드 민족의 전통악기인 사스가 연주되고 이어 쿠르드 민족의 한을 담은 애절한 목소리가 무대에서 터져나오자 축제의 분위기에 빠져 신나서 뛰어다니던 어린아이들마저도 숨을 죽였다. 쿠르드 민족의 정신적 수도인 ‘디알박키르’를 쿠르드의 가수가 한을 토해내는 목소리로 노래하자 자리에 앉아 있던 300여명의 쿠르드인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대다수 활동가들 지하로 잠적
고향을 버리고 타국 땅에 와서 ‘불법 이민자’니 ‘테러리스트’니 하는 딱지를 붙이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조국은 너무나 간절한 염원이 된 것 같았다. 무대 정면에는 지금도 임랄리 교도소에 갇혀 있는 오잘란의 대형 그림이 걸려 있어 그의 석방을 기원하는 쿠르드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사회자가 나와 “쿠르디스탄!”이라고 외치자 모두 힘차게 쿠르디스탄을 제창하면서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5월 15일 저녁 열린 이 행사는 쿠르드노동자당(PKK)의 재탄생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그동안 PKK의 간판을 내린 뒤 두번이나 간판을 바꾸는 변화를 시도했다가 다시 이전의 당명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지난해부터 유럽연합에서는 쿠르드노동자당을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활동가들에 대한 탄압을 지속해왔다. 지난해 9월에는 아테네에서 쿠르드노동자당 아테네지부장이 체포돼 독일로 송환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대부분의 당 활동가들이 지하로 잠적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지난 11월 쿠르드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을 경찰들이 대대적으로 수색해 30명의 쿠르드인을 체포한 사건도 있었다. 이로 인해 쿠르드노동자당의 대외적인 활동은 매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반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듯 이날 집회에도 평소의 3분의 2가량이 참석했다. 하지만 유럽인권재판소의 오잘란에 대한 재심 결정이라는 희소식에 쿠르드인들은 어느 때보다 기쁨에 들떠 있었다. 이날 집회를 주최한 아테네의 쿠르드노동자당의 대표인 아흐멧은 “쿠르드 대중들의 독립국가를 위한 투쟁 의지를 밝히는 자리이고 오잘란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라고 행사의 의미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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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무원의 감옥에서 고통받는 오잘란의 삶은 쿠르드 민족 전체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쿠르드 민족의 독립운동은 오잘란을 통해 처음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쿠르드 독립운동사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러니 오잘란이 갑자기 케냐에서 체포돼 터키 감옥에 수감됐다는 소식은 쿠르드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당시 유럽의 곳곳에서는 수십명의 쿠르드인들이 분신해 목숨을 잃었고 수만명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왔다.
1998년 10월, 터키 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시리아 정부는 당시 그곳에서 머물던 오잘란을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곧 그는 망명객의 신세로 그리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지로 떠돌면서 망명을 신청하지만, 터키와의 정치외교적 불이익을 우려한 이들 국가에 의해 계속 추방되는 신세가 됐다. 1999년 2월15일, 그는 그리스 정부가 제공한 은신처인 케냐의 그리스대사관저로 옮겨갔다가 그리스 정부의 배신으로 그곳에서 쫓겨나왔고 곧 밖에서 대기하던 정보부원들에게 체포돼 터키로 압송되면서 현재의 임랄리 교도소에 수감됐다.
체포과정은 합법, 재판 과정은 불법?
오잘란이 체포된 이래 오잘란을 구출하려는 쿠르드 민족의 노력은 지대했다. 그가 구속되자 그의 생사를 우려한 쿠르드 게릴라들은 자발적으로 종전을 선포하기도 했다. 또 그의 사면을 위한 집회나 단식투쟁은 유럽 곳곳에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와 더불어 한편에서는 법률적 절차를 통한 석방 노력을 계속해왔다. 유럽인권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바로 오잘란을 구출하기 위한 터키 내의 변호사들과 유럽 변호사들의 지속적인 투쟁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오잘란을 구출하기 위해 터키에만 200여명의 변호사들과 유럽에서도 15명의 변호사가 오잘란 사건을 맡아 일해왔다.
유럽인권재판소에 오잘란의 재심을 신청한 것은 1999년 오잘란이 사형 선고를 받은 뒤였고, 유럽인권재판소에서 재심을 실질적으로 시작한 것은 2000년 가을부터였다. 그 뒤 터키 정부의 온갖 방해와 로비에 의해 지연되면서 5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지난 5월12일 유럽인권재판소에서 내린 판결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잘란의 재판이 불공정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다시 재판할 것을 판결한 부분이다.
유럽인권재판소에서는 변호인단이 불법이라고 제기한 오잘란의 체포 부분에서는 합법적이라는 판결을 내리면서도 체포된 오잘란이 구속 상태에서 합법적인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그리고 체포된 오잘란을 신속하게 법정에 세우지 않은 것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터키의 군사법정에서의 재판 과정에 대해서는 11 대 6의 비율로 공정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잘란의 재판은 독립적이지도 공평하게 이뤄지지도 않았다는 오잘란 변호인단의 문제 제기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터키에 도착한 뒤, 임랄리 교도소에 투옥됐다. 그곳에서 1999년 2월15일부터 2월23일까지 구금돼 보안대의 취조를 받았다. 이 기간에 오잘란은 법률적인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터키의 변호사는 보안대 요원들에게 저지돼 그를 방문하지 못했고 16명의 다른 변호사도 1999년 2월23일 방문을 거절당했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그리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오잘란은 변호인단을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고 재판과 관련된 문서도 제대로 열람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공정한 재판 과정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오잘란의 법률고문인 카라니디오티스(40)는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은 정치적인 타협의 결과물”이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오잘란의 변호인단이 가장 중요하게 지적하는 불법적인 납치와 감금에서는 유럽인권재판소에서 터키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케냐에 있던 오잘란을 백주에 납치해 비행기로 실어와서 터키의 특별보호감호소에 감금한 것은 명백한 불법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에서 그의 불법적인 납치와 체포를 용인한 부분 등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무죄 판결 나더라도 강제력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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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정부의 지도자들은 유럽인권재판소에서 내린 오잘란의 재심 판결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재심 판결이 내려진 뒤 터키 총리 에르도간은 “오잘란의 재판이 다시 열리든 열리지 않든 간에 이미 이 문제는 민족 정기를 위해 이미 끝난 것”이라고 밝히면서 “테러리스트가 자유롭게 다니는 것을 결코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리고 압둘라 굴 터키 외무장관은 “오잘란이 백번을 다시 재판받는다 해도 같은 선고(종신형)를 받을 것”이라고 오잘란 재심에 대한 의미를 애써 축소하기도 했다.
현재 터키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국가의 운명을 걸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적대적인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고 내부에서는 민족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연합 가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믿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에는 터키가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들이 요구되고 있다. 군부독재 체제를 개혁하라는 것과 피를 불러왔던 쿠르드 민족과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터키가 쿠르드 민족에 민주적인 제반 권리를 인정해주고 권력을 나눌 수 있을지에는 현실적인 회의론이 팽배하다. 그럼에도 유럽인권재판소의 오잘란의 재심이라는 판결은 또 다른 추측을 가능케 하고 있다. 쿠르드 전문가들은 재심을 통해 오잘란을 석방해 그를 무장투쟁의 지도자가 아닌 쿠르드의 공개정당을 대표하는 정치가로 세워 터키 정치권으로 흡수하려는 의도로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유럽인권재판소에서 오잘란의 재심 판결이 있었다고 해서 금방 오잘란의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인권재판소에서 무죄를 선고했더라도 오잘란을 석방할 수 있는 강제적인 힘은 없다. 다만, 오잘란 사건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면 터키와 유럽에서 쿠르드족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될 것이다. 불법적인 오잘란 체포에는 미국을 비롯해 유럽연합의 국가인 그리스가 직접 개입됐고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간접적으로 관련돼 있어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특별한 소송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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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회부된 오잘란은 누구? </font>
1949년생인 그는 전형적인 가난한 쿠르드인 집안 출신으로 고등학교까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 ‘우르파’에서 성장했다. 그 뒤 앙카라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사회과학을 접하게 되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고향인 쿠르디스탄으로 돌아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쿠르드 민족의 현실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쿠르드 민족의 운명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이를 위한 대중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에도 터키 정부는 쿠르드 민족의 정체성과 쿠르드 문화를 부정했다. 그가 당시 활약했던 조직은 ‘동방민주문화협회’였고 쿠르드인들의 민족적 요구를 지원했다. 그 뒤 터키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뒤 조직은 양적·질적인 발전을 거듭했고, 1978년에는 처음으로 터키에 쿠르드 독립을 위한 정치결사체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이 창립됐다. 오잘란은 PKK의 결성을 주도하면서 지도자가 됐다. 쿠르드노동자당은 쿠르드 민족의 주체적 권리를 찾기 위해 1984년 최초로 터키 중앙정부에 대한 무장투쟁을 선언한 이래 지금까지 터키 정부와 투쟁을 벌여왔다. 1999년 케냐에서 터키 정부의 요구와 미국 정부의 지원과 더불어 각국 정보부들의 국제적인 합동작전에 의해 케냐의 그리스대사관에 은신해 있던 오잘란을 체포해 터키로 이송했다. 오잘란은 현재 터키의 임랄리섬에 있는 교도소에 혼자서 수천명의 무장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수감 중이다.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2002년 8월 터키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되면서 현재 종신형으로 대체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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